영화를 보다 보면 몇 가지 클리셰들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그중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롭다고 느꼈던 것은 아이를 향한 엄마라는 여성의 집착이었다. 이언희 감독의 <미씽: 사라진 여자>, 아니쉬 차칸티 감독의 <런>,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블랙 스완> 등 많은 영화에서 아이에 대한 여성의 사랑이 직간접적으로 다루어진다. 작년에 출간된 앰버 가자의 <내가 당신이었을 때> 역시도 뒤틀린 모성애를 소재로 한 스릴러 책이니 영화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이처럼 많은 대중 매체에서 아이는 여성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제시된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이런 영화와 소설 속 여성들에게는 아이 외에 소중한 것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이 왜 독특한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면, 아이가 갖고 싶어서 납치를 하는 남성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내가 앞서 언급한 <미씽, 런, 내가 당신이었을 때>는 아이가 갖고 싶어서 아이를 납치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영화에서 남성이 아이를 납치하는 이유는 돈 때문일지언정 그 아이 자체가 욕망의 대상인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모든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이 아이를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온다는 이야기는 아니며, 실제 현실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여성이 모두 모성애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모성애가 있듯이 부성애가 있고 인간이 이 두 가지 모두를 선천적으로 타고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 매체에서 다루어지는 모성애, 아이를 향한 여성의 사랑으로 글을 시작한 이유는 오늘 이야기를 풀어나갈 주제가 '여성적 욕망'이기 때문에 그렇다. 아이와 여성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 글에서 나는 '여성적' 욕망과 '여성의' 욕망을 구분해서 사유할 예정이며 강조점을 두고자 하는 것은 '여성적 욕망'이다. 학술적인 구분이라기보다는 논의를 이끌어 나가고 이해를 돕기 위한 잠정적인 구분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여성은 무엇을 욕망하는가? 여성의 욕망에 관해서 수많은 담론들이 존재하겠지만 정신분석에서는 '여성의' 욕망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남근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남근처럼 선망의 대상(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대상)이 되고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근 대신 아이를 가지고자 하는 것이다. 다소 시대착오적으로 들리는 두 가지 여성의 욕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근이라는 개념에 대해 알아야 한다. 남근/팔루스는 프로이트와 라깡 모두가 사용하는 개념이지만, 이론적으로 유사한 동시에 다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이 글의 목적은 여성의 욕망이 아닌 여성적 욕망을 이야기하기 위한 글이고 프로이트보다는 라깡의 이론에 비중을 두어 설명할 예정이다.
프로이트는 남성에게는 거세 위협이, 여성에게는 남근 선망이 있다고 말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시기 남자아이는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포기하지 않으면 거세될 것이라는 위협을 받게 된다. 이에 따라 거세 위협을 받는 남자아이는 어머니를 포기하고 '아버지처럼' 되기를 선택하게 되는데, 어머니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이므로 아버지처럼 되면 언젠가 어머니와 같은 여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반면 남근이 없는 여자 아이는 '어머니처럼' 되기를 선택한다. 마찬가지로 남근이 없는 어머니가 어떤 방식으로 욕망을 추구하고 만족을 얻는지를 관찰했을 때, 아버지의 여성이 되는 방식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식을 따라 남성은 여성을 포함한 무언가를 소유하고 쟁취하고자 하는 욕망을, 여성은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길을 따르게 된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설명하는 여성과 남성이 추구하는 욕망의 다른 길이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여성에게 남근이 없다고 규정했던 것과 달리 라깡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남근, 팔루스가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남근은 생물학적인 생식기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만족을 줄 것으로 '가정되는' 대상을 의미한다. '가정된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남근이 실제로 만족을 주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잡한 논의들을 제거한다면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연봉처럼 사회적으로 모두가 가지고 싶어 하는 것들이라고 아주 압축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이 남근은 가질 수 있는 것으로 '가정'될 뿐 실제로 가질 수는 없는 허상이다. 좋은 집을 샀지만 다른 동네에 더 넓고 비싼 집이 있다. 내 명의로 된 집만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갑작스레 불만족이 찾아온다. 더 좋은 집이 갖고 싶다. 집 한 채가 더 있으면 세를 놓으면서 보다 풍족하게 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집 한 채는 이제 불만족의 대상이 된다. 좋은 차를 샀지만 매년 더 좋은 기술을 가진 새로운 차종이 계속해서 출시된다. 내가 가진 새 차는 얼마 가지 않아 구식 모델이 되어 버린다. 이 연봉으로 먹고사는 데에 부족함이 없지만 더 높은 연봉을 받으면 더 큰 만족이 있을 것만 같다. 필요 없는 가방이지만 저것을 사야만 내가 행복해지고 만족을 느낄 것만 같다. 그러나 만족을 위한 소비는 새로운 상품의 소비로 이어질 뿐이다.
이런 방식으로 남근은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만족을 줄 것으로 가정되지만 실제로 만족은 끊임없이 뒤로 연기된다. 라깡이 이야기하는 남근은 이런 것이다. 눈치챘겠지만 남근, 팔루스는 사회적으로 허용된 대상들을 가리킨다. 우리의 욕망이 어디로 흘러야 하는지, 무엇을 가져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대상인 동시에 사회의 규범과 통제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장치와도 같다. 좋은 집, 좋은 차를 갖기 위해 우리는 좋은 연봉을 받길 원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 한다. 노동을 하는 와중에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일을 '잘' 해야 하고 일을 잘한다는 것은 사회의 구성품으로서 제 기능을 한다는 뜻이다. 돈을 주는 고용주에게 불만을 제기하고 덜 노동하고자 하는 노동자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기보다는 눈엣가시이다. 이처럼 팔루스/남근으로 대변되는 욕망의 대상은 우리를 사회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기능하도록 이끈다. 노동을 하고 소비를 하고 돈을 많이 쓰면 쓸수록 더 크고 많은 쾌락이 올 것이라고 믿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남근인가? 얼핏 보면 더 좋은 학교, 더 높은 연봉, 더 넓은 집과 남근은 상관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좋은 학교, 높은 연봉, 넓은 집은 남성뿐만 아니라 이제는 여성도 누릴 수 있는 것이 되었다. 프로이트 시대 여성이 남근 선망을 가질 수 있었을지 몰라도 현재에 와서 남근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용어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럼에도 굳이 남성의 생식기를 지칭하는 남근이라는 용어를 라깡이 프로이트로부터 이어받아 사용하는 이유는, 많은 체제와 국가가 가부장제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소급해 올라가면 거기에는 남근이 있다. 여성이 지금보다 더 많이 억압받았던 시대에 오로지 남성만이 사회에서 부와 명예를 쥘 수 있었다. 마치 남성에게만 있는 페니스처럼, 부와 명예와 권력은 남성만이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프로이트가 성 이론을 통해 정신분석을 만들었을 당시만 해도 그렇다는 이야기다. 현대에 와서는 여성도 좋은 직장, 좋은 차, 좋은 집, 부와 명예를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런 것들에 더 가까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여성보다 남성이다. 구조적으로 보았을 때 동일한 노동을 하더라도 여성보다 남성이 높은 임금을 받는 문제는 여전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고, 정치인이나 대기업 임원들 중 여성의 수가 현저히 적다는 것 역시도 여전히 여성에게는 장벽, 이 이상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시사한다. 남근이라는 개념 여성이 가질 수 없는 것을 지칭한다. '여성에게는 없고 남성만 가질 수 있다'는 고정 불변한 사실을 명시하는 단어가 아니다. 남근은 아직 여성에 대한 억압이 남아 있음을 지시하는 단어이다. (물론 남근을 추구하는 욕망 역시 남근에 종속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남성 역시도 억압받는다고 할 수 있다. 가부장제에서 남성이 온전히 자유롭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원초적인 억압에 있어서 여성이나 남성이나 동일하다. 그러나 원초적인 억압 이후 문명 속에서 가해지는 이차적인 억압은 여성과 남성에게 다르게 주어진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을 듯하다.)
이제 다시 원래의 논의로 돌아와 여성의 욕망과 여성적 욕망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앞서 나는 여성의 욕망과 여성적 욕망을 구분할 예정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었다. 남근을 매개로 한 욕망, 즉 남근을 가질 수 없으니 우회적으로 남근이 되고자 하는 욕망(남성이 가지고 싶어 할 만한 여성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남자들과 달리 남근을 가질 수 없으니 팔루스 대신 아기를 가지려는 욕망을 나는 '여성의' 욕망으로 귀속시키고자 한다. 이것들은 모두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이것만을 욕망하라고 허락해 준 것들이다. 대중 매체에서 아이를 가지고자 하는 여성의 욕망이 자주 그려지는 이유는 이것이 여성이 가질 법한 욕망이라고 많은 이들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은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대상 중 하나에 불과하다. 요즈음에는 남근처럼 되기와 아이 갖기 대신 남성들과 경쟁하고 더 많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좇고자 욕망할 수도 있다(남근 갖기로 대변되는 이것을 정신분석에서는 소위 남성적 욕망/강박증적 욕망이라고 부른다. 생물학적인 여성도 남성적 욕망을 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의 욕망이든 강박증적인 남성적 욕망이든 정신분석은 여기에 관심이 없다. 라깡의 정신분석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보다 초과적인 '여성적' 욕망이다.
라깡이 이야기하는 '여성적' 욕망이란 무엇인가? 여성적 욕망을 우리는 '히스테리적 욕망'이라는 용어로 바꿔 부를 수도 있다. 히스테리라는 말이 자궁을 지칭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히스테리와 여성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히스테리란 여성에게 유독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증상'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핵심은 '이해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녀들이 왜 이런 증상을 보이게 되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히스테리를 겪고 있는 여성들 또한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다만 확실한 것은 여기에 없는 것을 원한다는 것이다. 마치 채식을 하는 사람을 고기 뷔페에 데려간다면 먹을 수 있는 게 없는 것과도 같다. 무엇이 먹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는 없지만 일단 여기 눈앞에 차려진 고기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육식을 하는 사람들은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맛있는 고기를 두고 다른 것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처럼 여성적 욕망은 여성 자신들에게도 외부의 사람들에게도 모호한 것으로 남으며 동시에 주어진 선택지 바깥을 원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여기까지 글을 읽었다면 이런 의문이 떠오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여기에 없는 것을 원하는 것, 초과하려는 욕망에 '여성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정신분석은 남근이라는 기표를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여성'이라는 기표를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여기에 '여성적'이라는 이름이 붙는다고 해서 생물학적인 여성 모두가 여성적 욕망을 추구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생식기가 남성인 사람도 여성적 욕망을 가지거나 추구할 수 있다. 생식기가 여성인 사람도 좋은 차, 좋은 집, 높은 연봉과 같은 것들을 원하고 추구할 수 있다. 다만 여성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는, 여성에게서 초과적인 욕망과 모호한 욕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유는, 여성이 더 많은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규범과 제도가 허용한 테두리 너머에 있는 것을 욕망하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에는 어쩌면 성별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후적으로' 그것을 '여성적'이라고 지칭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보다 초과하려고 하고 보다 억압받고 있는 자들이 현실에 여성이 많기 때문에 그렇다.
앞에서 했던 왜 남근인가에 대한 설명의 연장선에 있기도 하다. 더 많이 억압받는 자들에게는 더 적은 것이 주어진다. 사회는 여성에게 부, 권력, 명예 대신 출산의 기쁨을 인생 최대의 성과이자 소유물로 여기도록 강제한다. 남성들과 경쟁하기보다는 그들의 소유물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말한다. 현재의 체제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추구하는 욕망에 여성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위한 제도가 아니다. 여성에게는 할 수 있는 것보다 해서는 안 된다고 제시되는 금기가 더 많으며 가질 수 있는 것이 제한되어 있다. 여성적 욕망과 생물학적 여성이 관계가 없다고 했음에도 초과적인 욕망에 '여성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는 더 많은 억압을 받는 생물학적 여성이 여성적 욕망을 추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여성적 욕망을 설명하기 위해 라깡이 자주 언급하는 대상 중 하나는 '안티고네'이다. 안티고네가 원한 것은 자신의 오빠인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땅에 묻는 것이었지만, 폴리네이케스는 반역자이기 때문에 테바이의 왕이자 안티고네의 삼촌인 크레온이 시체를 묻지 못하도록 금지를 한 대상이다. 크레온은 테바이 왕국 사람들에게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묻지 말라는 선택지만을 제공한다. 그러나 안티고네가 원하는 것은 시체의 매장이다. 결국 안티고네는 시체를 묻으려 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왜 안티고네가 오라버니의 시체를 묻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였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안티고네의 욕망에는 타당한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은 크레온의 주장이다. 다만 그녀는 왕이 정한 법 바깥의 것을 욕망하고자 했고 법을 초과하고자 했을 뿐이다. 결국 그녀는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묻는 데에 실패하고 죽음에 이르렀지만 그녀의 죽음은 약혼자이자 크레온 왕의 아들 하이몬과 크레온의 부인인 에우리디케의 자살로 이어지고, 결국 테바이 왕국을 몰락으로 이끌게 된다.
안티고네에게서 우리가(라깡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억압과 금지에 대한 거부이다. 하라는 것을 하는 대신 어떠한 선택지를 거부하고자 하는 욕망을 정신분석에서는 여성적 욕망이라고 부른다.
여성의 욕망에 관한 영화로 글을 시작했으니 여성적 욕망에 관한 영화로 글을 마무리해볼까 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송곳니>라는 영화인데 자세한 영화의 줄거리를 서술하기보다는 어떤 장면에서 여성적 욕망을 발견하였는가를 중점으로 이야기를 할 예정이다. 영화에는 한 가족이 등장한다. 이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딸 두 명과 아들 한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로 살아가고 있고 이곳에서는 아버지의 명령이 절대적이다. 여기에는 아버지가 만든 한 가지 규칙이 있다. 바로 송곳니가 빠지면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인데, 영구치인 송곳니가 빠질 수는 없으니 사실상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장치에 불과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성욕을 풀어주기 위해 크리스티나라는 여성을 돈으로 매수하여 집에 들인다. 그러나 바로 이 크리스티나 덕분에 첫째 딸은 바깥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첫째 딸은 아령으로 쳐서 자신의 송곳니를 뽑는 데에 성공하고 탈출을 감행한다.
내가 주목한 것은 영화 속 첫째 딸이었다. 그녀는 크리스티나에게 구강성교를 해준 대가로 몰래 비디오를 받게 되는데, 물론 이 비디오들은 금지된 것이다. 그 뒤로 첫째 딸은 아버지의 법 '외부'의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고 외부를 욕망하면서 '히스테리적인'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첫째 딸, 둘째 딸, 아들에게는 이름이 없는데 이제는 이름을 가지고 명명되기를 원하기도 한다. 그녀의 히스테리적인 모습은 부모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춤을 추는 장면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된다. 두 명의 딸이 결혼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부모 앞에서 춤을 추는데, 이제 그만 춰도 되는 순간을 지나서도 첫째 딸은 계속해서 춤을 춘다. 둘째 딸은 이미 춤을 추기를 그만둔 뒤다. 어색하지만 춤처럼 보이던 몸짓에서 점차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이행해 가는 그 모습이, 마치 19세기 정신분석이 막 태동하던 시기 사람들 앞에서 구경거리로 보여지던 히스테리 여성의 몸짓과도 같다. 그리고 춤 추기를 멈춘 그녀가 갑자기 식탁에 앉아서 케이크를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가족들은 첫째 딸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녀의 춤사위와 갑자기 식탁에 달려들어 음식을 섭취하는 모습은 기행처럼 보이고 이런 일련의 행동들은 억압을 느끼되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자들이 보이는 '증상적' 순간과 닮아 있다. 발작적이고 우발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은 억압을 뚫고 나가려는 자가 취할 수 있는 '히스테리적' 행동들이다. 예전에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을 보고 '노처녀 히스테리'를 부린다는 말을 사용하곤 했었다. 그녀들이 갑작스럽고 우발적으로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부리는 이유에 대해 알 수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결혼을 하지 않아서'라는 방식으로 이유를 만들어 붙인 결과이다.(여기에는 여성은 남자와 결혼을 해야 한다는 압박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그 여성들은 결혼이라는 선택지, 즉 한 남자의 여자가 되고 아이를 갖는 것을 거부한 여성들이다. 그녀들이 히스테릭한 행동을 보였던 이유는 결혼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여기에 그녀들이 원하는 것이 없다는 반증에 가깝다.
영화의 결말에서 과연 첫째 딸이 탈출에 성공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설령 탈출에 성공했다 할지라도 그녀가 바라던 바를 이루었는지 역시도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다.(애초에 그녀가 탈출 이후에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역시 모호하다.) 어쩌면 기이할지언정 아버지의 보호 아래 편하게 집 안에서만 지내던 삶이, 온전한 송곳니를 가지고 지내던 그 삶이 더 행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첫째 딸은 이제 거기에 만족이 없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이제 아버지가 외부에서 사다 주는 물품들에서 만족을 느낄 수 없고 그 안에서만 통용되는 규칙을 따르고 말을 잘 들었을 때 주어지는 칭찬에서 기쁨을 느낄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파괴적인 행동, 즉 송곳니를 뽑는 것을 대가로 외부로 나가기를 선택했다. 이러한 자기 파괴적인 행동 역시 히스테리증자들의 모습과 어딘가 닮아 있다.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묻고자 했다가 죽음에 이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안티고네처럼, 그녀도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신체를 훼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곁가지로 크리스티나에 대해서도 주목해 보고 싶다. 크리스티나는 '송곳니' 가족에 최초의 균열을 가져온 여성이다. 크리스티나는 첫째 딸에게 금지된 비디오를 전달한 인물이다. 그리고 비디오를 전달하게 된 원인에는 불만족이 있다. 크리스티나는 가부장에게 돈을 받고 아들과 섹스를 하지만 거기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아들에게 원하는 방식을 요구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데, 이후에 첫째 딸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줄 테니 구강성교를 해달라는 요청을 하게 된다. 크리스티나의 '불만족'이 가족에 균열을 가져온 셈이다. 첫째 딸이 금지된 비디오를 보았고 그것을 크리스티나로부터 얻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부장은 '기존 크리스티나 대신 새로운 크리스티나를 찾아야겠다'라고 말하며 두 명의 딸 중 아들이 원하는 여성과 성관계를 하도록 만든다. 이제 첫째 딸은 새로운 크리스티나가 된다. 영화 속 '크리스티나'라는 이름이 크리스티나에게서 첫째 딸로 이행해 간 것처럼, 불만족과 초과하고자 하는 욕망이 이행해 간다. '크리스티나'는 여기에 없는 것을 욕망하는 자를 가리키는 기표가 된다.
마지막으로 정리를 해보자. 이 글에서 제시된 개념으로 여성의 욕망, 여성적 욕망(히스테리적 욕망), 남성적 욕망(강박증적 욕망)이 있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기표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를 바라며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 여기서 사용되는 여성과 남성은 생물학적인 성별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허용된 욕망으로는 '여성의 욕망'과 '남성적 욕망'을 들 수 있다. 사회적으로 허용된 욕망들은 남근과 관련되어서, 남근을 매개로 하여 구성된다. 남성적 욕망은 남근으로 제시되는 것들(좋은 학교, 높은 연봉, 좋은 직장, 자본주의적 소비 등)을 의심 없이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고 여성의 욕망은 그중에서도 특히 생물학적인 여성들에게 남근을 추구하기보다는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또는 아이 낳기를 욕망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여성적 욕망은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은 욕망을 가리킨다. 또는 그 욕망의 정체를 현재의 언어와 담론으로 포획하고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한 욕망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성적 욕망은 맹목적이다. '이 중에서 하나 골라'라고 제시된 것들을, 제시된 남근을 모두 거부하는 대신 허용되지 않은 것을 이루고 성취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욕망이다. 정신분석에서 여성적 욕망을 중요시하고 그것에 집중하는 이유는, 바로 여성적 욕망이 타자의 담론에 종속되지 않고 새로움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남근을 추구하든 남근이 되기를 추구하든 사회적으로 허용된 것들 내에서 순환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주어진 것들에 만족한다면 우리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정신분석은 모든 것을 거부하는 욕망을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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