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의 주제는 대타자의 극복에 관한 것이다. '대타자는 극복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조금 변주시켜 본다면 '대타자는 극복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발전해갈 수 있다.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렇게 질문을 바꿨을 때, 이 문제는 당위를 묻는 것에서 가능을 묻는 것으로 이행해 간다. 그러나 이 논의를 하기 전에 우리는 대타자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대타자에는 실체가 없으며 또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타자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일은 쉽지 않을 테지만 거칠게나마 그 윤곽을 그려 보아야 대타자의 극복에 관한 논의로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극복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극복을 논한다는 것은 공허한 일이 될 뿐이다.
대타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우리 눈앞에 있는 타자들과는 또 어떻게 다른가?
라깡이 고안해 낸 개념인 대타자(Autre)는 쉽게 말해 언어-상징계를 의미한다. 또는 언어-상징계의 주인이라고 이야기해 볼 수도 있겠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언어에는 주인이 없으며 그 누군가가 독점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타자에 실체가 없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런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언어의 주인이되 그게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대타자를 다른 말로 '상징적 아버지'라고 표현해 볼 수도 있다. 나를 낳아준 아버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따라야 하는 언어의 주인이라는 의미에서의 아버지이다. 이 아버지는 우리가 지난 시간 다루었던 '남근(우리의 욕망의 방향을 결정하는 대상)'의 소유자이기도 하다.(그러나 남근도 대타자도 실체가 없는 것들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는 모종의 규칙이 있고 소위 '정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이것을 따른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 배움을 의미하고 동시에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학습함을 의미한다. 한국어로 말을 할 때 우리는 주어, 목적어, 동사 순으로 이야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와 어휘를 선택해서 말한다. 즉 허용된 단어와 규칙을 통해 언어를 구사하면서 우리는 배운 대로 말하는 것이다. 이 규칙을 벗어나서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이야기할 수 있더라도 타인과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많은 경우 언어에 대해 의사소통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라깡에게 있어서 언어란 억압의 수단이다. 언어는 신경증자들을 억압하고 주체를 탄생시킨다. 만약에 언어가 왜 우리를 억압하는지 모르겠다면, 그것은 언어의 억압하는 기능이 매우 은밀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것이 자신의 목적을 탁월하게 달성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 언어는 중립적이고 무고한 언어가 아니다. 언어는 권력의 언어이다. 언어의 배후에는 우리를 억압하는 기능이 숨겨져 있고, 이것을 관장하는 것을 대타자(Autre)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언어가 어떻게 억압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일까? 가장 쉬운 예부터 들어보자. 우리는 부모의 '안돼'라는 말로부터 금지를 배운다. 성장함에 따라 인간은 모유 대신 밥을 먹어야 하고, 아무 데서나 대소변을 보아서도 안 된다. 부모의 말을 통해 우리는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학습하지만, 부모가 사용하는 언어는 그들의 것이 아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역시도 자신들이 발화하는 언어에 내포되어 있는 규칙과 금지를 따른다. 눈앞에 있는 소타자, 상상적 타자, 어머니와 아버지 너머에,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보장해 주는 누군가가 있고 그것이 바로 대타자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실체 없는 언어의 주인에 대'타자'라는 이름이 붙는지를 알 수 있다. 바로 타자들(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주할 수 있는 자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배후에 있는 자이기 때문에 대'타자'인 것이다.
언어에 장악당하고 그 아래 종속되는 예로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도 있다. 최근 '반팔 티'라는 용어가 혐오 표현으로 문제 제기된 일이 있었다. 반팔이란, 온전한 팔이 있고 그것의 절반 밖에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소외와 차별의 언어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예컨대, 우리가 반바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다리'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는다.) 물론 우리가 '반팔 티'라는 용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할 때,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을 차별해야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발화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반팔 티'라는 단어를 쓰는 순간 타인을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언어 속으로 들어가 버리게 된다. 언어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은밀하고 드러나지 않게 우리를 장악한다. 언어를 사용하는 한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것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우리에게는 해도 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다. 내가 혼자 속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고 입 밖으로 꺼내도 되는 이야기가 있다. 입 밖으로 내뱉기 전 많은 경우 내가 한 생각에 대해 '이 말을 해도 될까?' 검열을 시행한다. 해도 되는 말인지 안 되는 말인지 헷갈릴 때에는 고민을 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즉각적으로 해도 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구분하곤 한다. 이것은 의식적인 차원에서의 설명이고, 보다 심층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하는 사유 역시도 억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머릿속에서 생각을 자유롭게 떠올린다고 흔히 여기지만 우리는 허용된 것, 이미 언어 안에 존재하는 것들만을 사유한다.
위의 예는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관찰 가능하고 체험할 수 있는 차원에서 든 것들이지만, 사실 라깡이 이야기하는 언어에 의한 억압은 보다 근원적이다. 부모의 말을 통한 금지를 이해하고 알아듣기 이전에, 언어를 받아들인 순간부터 억압은 시작된다. 무의식이란 억압되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하는 것을 지칭하는데, 프로이트와 라깡은 무의식이 말실수와 농담을 통해, 즉 언어 안에서 드러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 이유는 억압을 시행하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에 그렇다. 라깡의 유명한 명제를 가져와 설명해 보자면,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L’inconscient est structuré comme un langage)". 언어는 무의식을 억압하고 무의식은 언어의 파열점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언어를 받아들인 순간을 특정하거나 '이때'라고 드러내어 보일 수는 없다. 다만 신경증자를 억압하는 것이 언어라면, 기표 체계 안으로 들어오게 된 순간은 반드시 있을 것이고 따라서 논리적으로 최초의 억압이 있다고 가정할 뿐이다. 언어 체계 안으로 들어오게 된 순간부터 억압은 시작된다. 억압을 시행하는 최초의 기표를 라깡은 아버지의 이름(Le Nom-du-Père), S1이라는 주인 기표, 부성적 은유라고 부르기도 한다.
언어는 억압뿐 아니라 소외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언어이다. 그러나 언어는 전체를 드러내고 표현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야기되지 못한 잔여를 남긴다. 내가 가진 감정의 크기와 상관없이 발화할 수 있는 언어는 '사랑해'라는 말로 한정되어 있다. 사랑한다는 말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만 드러내어 보일 수 있다. 우리는 이 보잘것없는 기표에 수많은 감정을 담아 전달해야만 하기에 언제나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신경증자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결여에 대해 우리는 '공허하다' '슬프다' '우울하다' 등등의 기표를 사용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기에 남겨지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용된 기표는 한정적이다. 아무리 설명하려고 애써 보아도 우리는 작은 우물 안 기표를 맴돌 뿐이며 기표의 테두리 너머로 무언가가 남겨진다. 지금 라깡과 대타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상세하게 설명한다고 해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언제나 남게 된다.
여기까지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대타자는 언어-상징계(의 주인)를 의미하고 언어-상징계는 인간에게 억압과 소외를 불러일으킨다. 이 논리적 흐름을 따랐을 때 대타자의 극복에 대한 문제는 억압과 소외의 극복이라는 말로 재진술될 수 있다. 이제 '억압과 소외는 극복되어야 하는가?' 또는 '억압과 소외는 극복될 수 있는가?'라고 다시 질문을 던질 차례이다.
억압과 소외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뉘앙스 때문에 이것들을 마치 당연하게 극복되어야 하는 사태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언어에 의한 억압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기표에 의해 억압당하지 않았다면, 근원적으로 우리가 소외된 존재자들이 아니라면, 우리는 문명 속에 진입할 수 없다. 상실을 대가로 우리가 얻은 것 중에는 '안정'도 포함되어 있다. 타자의 언어를 따르며 사는 삶은 안정적이다. 혼돈으로 가득 찬 실재의 세계를 설명 가능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고정시킨다. 일상적인 차원에서는 남들에게 주입받은 생각과 이야기를 되뇌면서 순응하며 살아가면 된다. 어쩌면 대타자의 극복이라는 문제에 대한 당위나 가능 여부를 묻기 전에, 그럴 필요가 있는가를 묻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이들에게 대타자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상징계가 선사하는 안정과 문명이 주는 쾌락이 견딜만하다면, 그래서 이곳을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대타자가 제시하는 법칙 안에서 살아가도 무방하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라는 데에 있다. 더 많은 억압과 소외와 결여를 느끼는 자들이 있다.(우리는 이전 글에서 이러한 주체는 '여성적'이라고 규정한 바 있었다) 대타자의 극복에 관한 논의는 이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대타자를 극복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앞서 들었던 반팔 티의 예를 다시 들어 보자. 반팔 티가 소외의 언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이들은 반팔 티 대신 반소매 티라는 대체어를 제시했다. 이처럼 대타자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기표의 발명'(물론 반소매라는 표현은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던 것이기는 하다), '다르게 말하기'의 형태로서 가능하다. 대타자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언어를 변주하는 것을 통해서 실천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해야 하는데, 언어-상징계의 억압을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다르게' 사용해야 한다.
이것을 정신분석의 내담 상황으로 가져와 보자. 내담자가 분석실에 와서 처음 이야기를 할 때에는 배운 대로 이야기하게 된다. 어릴 때부터 있었던 일을 하나씩 풀어내지만 사실 이건 타자가 만들어준 서사일 뿐, 내담자 스스로가 풀어내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신분석가는 이 이야기가 소진되기를 기다린다. 타자의 이야기가 끝이 나고 바닥을 드러내게 되면 사실은 그게 아닌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기도 하고 이 모든 것을 불러일으키는 시작점이 드러나기도 한다(이것은 근본 환상이라고 부른다). 여기까지 도달하고 난 뒤에야 다른 이야기는 시작될 수 있다. 반복되는 증상의 시작점, 원인의 자리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그동안 해오던 이야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문체를 바꾸고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 순간부터 내담자는 새로운 주체로 태어나게 된다. 물론 이 새로운 주체라는 것이 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멀리 갔다가 되돌아온 원래의 자리는 전과 같을 수 없다. 증상의 원인, 근본 환상과 마주하고 온 자는 어쨌든 조금 변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경증자는 언어 자체를 벗어날 수 없다. 이미 귀에 익숙해져 버린 음악을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이미 받아들인 언어 이전의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우리의 선택지를 벗어난 일이다. 여태까지 나를 장악하던 대타자로부터 다르게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변주시키고 극복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스쳐 지나가는 과정이며 대타자를 극복한 항구적인 사태로 머무를 수는 없다. 새로운 기표를 발명하고 다르게 이야기하기 시작한 순간, 우리는 대타자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주체로 나아갈 수 있지만 다시 새롭게 발명된 기표에 우리는 장악당하게 된다. 새로운 서사는 낡은 것이 되고 증상을 초래하는 대상a는 새롭게 건축된 상징계의 벽을 뚫고 다시 우리를 찾아온다.
그래서 우리는 다르게 말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대타자는 극복되어야 하지만 극복될 수 없다. 그리고 정신분석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