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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곰 Mar 0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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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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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많은 건 오래도록 장점이었다. 별 생각 없이 말을 뱉는 아이들이 많던 질풍노도의 시기에는 더욱 그랬고, 조금 더 나이 먹어서도 생각을 곱씹어 말을 고르는 습관은 나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이 끝도 없이 이어질 무렵, 생각에 밀려 행동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처음으로 들었다.


생각이 범람하는 시대다. 너도나도 ‘내 생각’을 공유할 수 있고, 또 그게 미덕일 만큼 표현을 권장하는 사회. 그러나 동시에 서로가 서로의 의견을 듣는 게 아니라 검열하고, 평가를 매기도록 방임하는 사회. 그러다 보니 미처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생각이라며 말하기도 하고, 어떤 수에 몰렸을 때 ‘그냥 내 생각일 뿐이야’ 하고 핑계를 대기도 한다. 어떤 때는 마음껏 비겁해지고, 어떤 때는 치열하게 검열당하는 생각의 이상한 표현들. 그런 사이에 누군가에게 평가 목적으로 ‘제출’하는 글은 몹시 혼란스러운 상태에 놓인다. 개성 있되 평가에 부합해야 하며 자유롭게 써도 되지만 자유롭지 않은 글.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지만 수없이 자기 검열을 거쳐야 하는 글.


자기소개서 앞에 놓이면 비겁한 나와 용감한 내가 끝없이 싸운다. 신중해야 하기에 많이 생각하고 오래 고민하지만 끝내 한 발을 내딛기가, 아니 한 자를 적기가 그토록 힘 든다. 그래서 쓰라는 자소서는 시작조차 버겁고 이렇게 아무 말을 생각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비겁하게 쓰고 있다. 좀 비겁하면 어때, 두려운 건 어쩔 수 없는 법. 그래서 쓰는 비겁한 취준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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