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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곰 Mar 01. 2019

002

비겁함

002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힘들다고 토로하는 걸 정말 싫어한다. 그리고 지금 스스로가 무척 싫다.

행동은 언제나 의욕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 목적의식은 늘 필요하다. 지금 나에게 목적의식이 있느냐고 하면 글쎄. 목적은 있지, 분명히. 나는 취업을 하고 싶고, 해야 한다. 다만 그것이 나에게 의욕을 부여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은 듯하다. 취직은 하고 싶고, 영어는 하기 싫고. 그게 지금 내가 정말 싫어하는 모습이다. 애석하게도 나의 모습.



늘 뚜렷한 인생을 살아왔다. 남들이 보기에 빡세고 힘들 법한데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던 건, 내가 하고 싶은 게 명확했고 그 뚜렷한 의욕 덕분에 그것을 위한 지루한 절차마저도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 목표는 때때로 달라지기도 했다. 꿈꾸던 것이 기대와 다른 모습을 보여 방향을 선회하는 일. 그런 순간까지도 나는 꿈꾸는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런데 지난 2년간 나는 기대를 잃었다. 어떤 것을 갈망한다는 것은 내가 아직 갖지 않은 ‘그것’이 엄청 매혹적이리라는 기대를 전제한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제 그 어떤 것도 매혹적이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상태에 접어들었다.

아직 해보지 않은 것이 그렇게나 많고, 미처 가보지 않은 길이 무수한데도 더 이상 기대감이 생기지 않는다. ‘현실적’이라는 탈을 쓰고 기대를 놓아버렸고, 그만큼 용기를 잃었다. 용기는 언제나 의욕과 함께하고, 의욕은 기대와 함께하니까. 나는 기대도 의지도 용기도 없는, 희망도 실천력도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유감스럽다, 라는 말 외에 적합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더 이상 매년 버킷리스트를 갱신하지도, 아니 작성하지조차 않고, 다이어리를 사며 새해 목표를 세우지도 않는다. 거창한 신년 목표가 없는 건 소소한 것을 달성하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현실적이란 탈을 쓰고 실패하지 않으려는 비겁함이다.

본디 완벽주의는 안 되는 것조차 되게 하려는 용기라고 생각한다. 안 될 것 같아서 시작조차 하지 않는 건 비겁함이다. 시작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시작하지 않는 것.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어쩌지 않으려는 것.

대단한 실패의 경험을 하지 않았음에도, 남은 에너지가 전혀 없이 사회에서 닳고 닳아 소진되어 버린 것. 사실 엄청난 실패를 경험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좌절할 수 있다. 좌절에조차 자격이 필요한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그리고 나는 충분히 좌절했다. 비록 내가 지난 몇 년 간 가장 매달렸던 일에 괜찮은, 만족스러운, 성공적인 마무리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삭막해졌다. 지쳤다는 말이 좋겠다. 주변에서는 그게 번 아웃(burn-out)이라고 하고,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내가 과연 그 말을 써도 될 만큼 열심히 살았는가에 대해서 이내 확신을 잃고 마는 나약한 상태가 되었다. 분명히, 남들이 보기에도 또한 내가 돌이켜 봐도 나는 지난 몇 년간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그게 아득해져서 스스로 한없이 의심할 정도로, 내가 그렇게 치열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인 걸 잊은 것 마냥, 그렇게 비겁해지고 있다.

삭막하고 비겁한 사람. 유감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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