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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인 Mar 22. 2019

맹목과 집착, 그 허망함에 대하여

<은전 한 닢>과 영화 <우상>

이수진 감독, 영화 <우상 (2018)>

※ 어쩌면, 스포일러.




"... 나는 한 푼 한 푼 얻은 돈에서 몇 닢씩 모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돈 마흔여덟 닢을 각전 닢과
바꾸었습니다. 이러기를 여섯 번을 하여 겨우 이 귀한 '대양(大洋)' 한 푼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돈을 얻느라고 여섯 달이 더 걸렸습니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돈을 만들었단 말이오? 그 돈으로 무얼 하려오?"
하고 물었다. 그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이 돈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

- 피천득, <은전 한 닢> 중에서

 

  영화 <우상>을 보고 나오며 피천득의 그 유명한 수필, <은전 한 닢>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은전 한 닢>의 그가 한 닢의 은전에 그러했듯, <우상> 속 인물들 역시 자신의 '우상'을 집요하게 좇는다. 그리고 <은전 한 닢이> 그러했듯, 영화는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것의 허상과 허망함을 보여준다.



인물들의 우상


  영화는 구명회(한석규)로 시작해 구명회로 끝나는 영화이다. 구명회의 선택으로 영화가 나아가고 스토리는 중식(설경구)을 중심으로 펼쳐지며 영화의 공기는 련화(천우희)가 장악한다.


 대중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고 말하는, 나름 양심과 분별력을 갖춘 인물로 시작하는 구명회. 그는 '명예'를 우상으로 둔 인물이다. 연기와 눈속임으로 얻은 명예는 진정한 명예일 리 없거늘, 그는 도지사라는 명예를 좇아 스스로의 눈을 가린다. 결국 자신의 아들마저 재물로 바치고 타인의 비극을 이용하며 자신의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생명이 위독한 아들을 방관한 자신의 뒤틀린 내면과 마주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는 자기 자신의 욕망을 택한다.


 대중이 구명회를 소비하는 방식이 특히 인상적이다. 의원님, 의원님 하며 구명회 앞에서 자신을 넙죽 낮추는 그들은 구명회의 실체는 보려 하지 않고 그가 만든 드라마, 즉 그의 이미지 만을 소비한다. 이 얄팍한 맹신은, 쉬이 타오르고 쉬이 식는다. 감독이 '우상'에 대해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들과 구명회의 관계성에 있는지도.

   

 중식에게 생의 목적은 단 하나, 아들이다. 지체 장애인인 아들의 자위를 직접 해주는 것에 모자라 성매매까지 해줘 전과 10범에 이른 그는, 아들이라는 우상에 눈이 멀었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향해 돌진하며 며느리 '련화'에게도 지극정성이다. 결국 자신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은 그는 광화문 이순신 동상의 머리를 폭파한다. 영화의 제목을 관통하는 이 테러는 꽤 의미심장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중식의 캐릭터와 연관성이 떨어져 보이기도 한다. 단순하며 앞만 보고 질주하는 그가 한 행동이라기엔 좀 메시지 적이랄까.   


  련화에게 목적이란 한국인으로 삶을 이어 가는 것, 그것뿐이다. 아직 정착하지 못한 그에게 당장 급한 것은 생존뿐이니, 우상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련화는 짐승과도 같다. 한국에 오기 위해 살인을 하고 자신을 위협하는 자에게 서슴없이 칼을 내미는 한편, 곁을 준 이들에겐 한없이 아이 같은 면을 보인다.



Pardon?


 캐릭터 자체는 위와 같이 비교적 단순하나, 스토리와 화법을 의도적으로 빙빙 돌려놓았다. 한 씬이라도 놓치면 전체를 놓치기 쉬울 정도로 씬과 씬이 얽혀 있다. 헌데 정보성이 담긴 대사들 중 끝내 알아듣지 못한 것이 여럿이었다. 아마도, 열 건 이상. 대사 전달력이 좋은 배우들 부분까지 종종 놓쳤으니, 녹음 문제도 있는 듯하다. 연변 사투리에라도 자막 좀 넣어줬다면 이해가 쉬웠을 것이다. 영화가 무얼 말하려는 지는 리얼한 영화 제목 덕분에라도 쉽게 잡혔으나, 나는 끝내 영화의 스토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진실은 무엇이며 련화를 죽이러 온 남자는 누구인가, 마지막 씬의 구인회는 정확히 무얼 하는 것인가. 영화 시나리오를 구해 보고 싶다.



괜히, 아픈 손가락


 <은전 한 닢>의 끝엔 독자의 상상이 있다. 나는 은전을 손에 넣은 거지의 이후의 삶이 궁금하다. 한편, 영화 <우상>의 끝엔 나의 어리둥절과 난처함이 있다. 전달받지 못한 대사로 인한 이해 부족은 물론이요, 영화가 얽어 놓은 갈등도 풀리다 만 채 영화 안에 머물러 있다. 인물에 감정이입이 어려우니, 영화 이후에 이어질 그들의 삶이 궁금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잘 됐으면 좋겠다. 고민과 고생의 흔적이 역력한 이 영화가 괜히 아픈 손가락처럼 느껴진다. <한공주> 같은 의미 깊은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과, 연기에 온 에너지를 쏟는 배우들의 영화인지라 그렇다. 나 빼고 모두들 재미있게 보고 또 보길, 그리하여 본전 이상 뽑는 영화가 되길. 더 좋은 작품으로 돌아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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