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베를린. 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잿빛의 공기는 차가웠으며 일요일이라 인적도 드물었다. 닫힌 상점 문에 어지럽게 그려진 낙서들을 보면서 어쩐지 마음이 심란해졌다. 아무리 이번 여행의 테마가 음악이고, 그래서 그 외에는 별 조사 없이 떠났다지만 너무 안일했나.
어지러운 길목을 걸으며 눈에 띈 건 바클라바, 케밥 같은 걸 파는 터키 음식점들이었다. 터키 이민자가 많다더니 정말인가 보군, 생각하며 계속해서 앞으로 걸었다. 8시간의 비행 후 머릿속에 끈적하게 뭉쳐있는 피로를 억눌러줄 강력한 카페인이 필요했다. 꿈이라면 악몽에 가깝다 싶게 우울하게 내려앉은 거리를 걷다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짙은 초록의 풀잎으로 뒤덮인 벽 사이로 조그맣게 Bonanza, 이름이 보였다. 지금까지 걷던 거리와는 완연히 다른, 고요하고 평화로운 느낌의 길을 걸으며 참 독특한 곳에도 카페가 있구나, 생각했다.
몇 분쯤 걸어 들어가자 꽤 커다란 건물이 눈에 띄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제법 힙한, 그러면서도 식물을 이곳저곳 배치해 어쩐지 아늑한 느낌이 드는 카페였다. 씁쓸하고 새큼한 커피의 향이 넓은 공간을 진하게 채우고 있었다. 바리스타에게 다가가 더블 에스프레소를 시키며 둘러보니 핸드드립도 하는 모양이었다. 최근 유행하는 오스트레일리아식 로스터리 카페 분위기라 유러피안 느낌은 강하게 들지 않았는데, 아마 그게 힙하다며 인기 있을 듯한 분위기랄까.
에스프레소는 산미가 강하고 맛도 진해서 좋았다. 토론토에도 괜찮은 카페가 꽤 많고 이제는 집에서 커피를 잘 내려마시지 않기 때문에 굳이 빈을 사지는 않았지만, 커피 좋아하는 사람이 베를린에 간다면 한 번쯤 들러보길 권할 수 있을 만큼 괜찮은 커피였다. 한번 더 들른다면 핸드드립을 마셔볼까 싶었지만, 위치가 애매해서 그 한 번의 방문이 끝이었다.
카페인을 충전하고 조금 가벼워진 상태가 되어 실내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비가 오는 일요일, 이토록 외진 곳에 있는데도 사람이 많았다. 천장이 높아서 좋다는 생각을 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독일어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을 느끼며 그제야 독일에 왔구나, 실감했다. 애초에 딱히 환상 같은 것 없이 그저 음악을 즐기겠다는 일념으로 독일 여행을 결심했고, 2주의 여행 중에서 1주일 가까이 베를린에 머물기로 한 건 오직 음악 공연 때문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베를린에 1주일가량을 머물겠다는 내게 사람들은, 특히 베를린을 다녀왔다는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베를린에 도착해서야 그 이유를 체감했다. 이래서였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밖은 차갑고 비가 내려도 카페는 아늑했고 나는 비로소 약간의 안도감이 스며들고 있음을 느꼈다. 정신없이 바빴던 회사 일로 복잡하게 뒤섞여있던 머릿속도, 바닥난 체력도, 추위에 움츠린 마음도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 뒤에 갤러리를 가고, 또 저녁엔 필하모니에서 공연을 보기로 했기에 내가 보난자에서 보낸 시간은 고작 1시간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은 내게 오롯한 휴식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특별할 것 없다 해도, 일상을 벗어났다는 것을 처음으로 온전히 느낀 시간이었기에.
가끔 비가 오면, 그토록 축축하고 건조하던 베를린이 생각난다. 그리고 추워서 고생하던 시간들은 여전히 약간의 고통과 함께 떠올리는 한편 아름다웠던 순간들은 벅찬 마음으로 기억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다시 가고 싶다, 는 생각을 하고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