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아침의 베를린은 고요함을 넘어 적막했다. 비가 내리고, 도로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으슬으슬 차게 젖은 거리를 걸어 찾아간 식당의 굳게 잠긴 문을 나는 괜히 몇 번이고 당겨 보았다. 닫는다는 말 같은 건 없었는데. 본 적 없는 식당 주인이 야속할 정도로 무심하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문득, 전에 옆 골목의 카테 콜비츠 뮤지엄을 다녀오던 길에 봤던 식당이 생각났다. 이름이 예뻐서 인상적이었는데, 정작 그 이름이 뭐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한 번 가보자 싶어 발걸음을 옮겼다. 기억을 더듬어 가 본 길에 과연 식당이 있었다.
빈터가르텐 (Wintergarten).
대문을 지나 작은 정원을 가로지르면 얕은 계단이 있었고, 그 위에는 유리로 만든 집 같은 건물. 그 주위에 가득한 초록의 풀잎들. 식물원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
막상 들어가보니 식당보단 카페에 가까웠다 (나중에 다시 보니 역시 카페였다). 테이블이 드문드문 있었고, 나 외에는 커플이 하나, 그리고 신문을 읽고 있는 노신사가 한 명 있을 뿐이었다.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그들 앞에 놓인 그릇들을 짧게 일별하고 메뉴를 들어 보았다. 브렉퍼스트 메뉴가 꽤 길게 적혀 있었지만 기본은 심플했다. 나는 오믈렛과 롤, 그리고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카페 안으로 노신사 한 명이 들어왔다. 그리고는 신문을 읽던 노신사의 맞은편에 앉았다. 두 신사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멀리 떨어져 있어 그들의 대화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리고 들렸다 해도 독일어라 알아들을 수는 없었을 것이지만) 반갑게, 즐겁게 나누는 대화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라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삼 생각하다 문득, P와 함께 했던 뉴욕 여행을 떠올렸다.
그 해의 뉴욕은 정말 추웠다. P가 미국 여행을 계획하며 토론토에 들른다 했을 때 나는 겨울에 왜 토론토에 오냐며, 추워서 아무것도 못할 테니 차라리 같이 뉴욕에 가자 했다. 하필 그 해 뉴욕의 겨울이 토론토보다도 춥고 눈도 더 많이 오리라는 건 물론 예상하지 못했지만. 나는 추위에 고개를 내저으며 P의 호텔에 도착했다. 방문을 두드리자 P는 양치를 하면서 들어오라 했고, 나는 방이 뭐 이렇게 어지럽냐며 농담을 했다. 거의 3년 만에 만났지만, 어색함 같은 건 느낄 수 없었다. 그 순간 그 호텔방은 아주 따듯한 공간이었다. 바깥에 눈보라가 아무리 휘몰아쳐도 상관없다 느껴질 만큼.
나이가 들어 흰머리가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흰머리가 된 P가 식당에 들어와 내 맞은편에 앉는 것도. 우리는 스스럼없이 인사를 주고받을 것이다. 그게 몇 년 만에 만난 것이라 할지라도, 어색함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자연스러움으로. 그리고 늘 그렇듯,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대체로 사소하고, 아주 가끔 진지해지다가 결국 웃음으로 넘기고 마는, 그런 이야기들을.
상상 속에 젖어 있는데 종업원이 카푸치노와 오믈렛, 롤을 가져왔다. 오믈렛은 특별한 재료 없이 간단했지만 촉촉하고 부드러워 맛있었고, 롤도 겉보기엔 투박해 보였지만 막상 먹어보니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워 좋았다. 독일의 빵은 대체로 보기보다 부드러웠는데, 마음에 들었다. 카푸치노는 무난했지만 카페인 충전용으로 더할 나위 없었다. 나는 유리 천장에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늦은 아침을 즐겼다.
식사를 마치고 카페를 나가며 보니 노신사들은 여전히 테이블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나와 P보다는 자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나는 우산을 펼쳐 들고 밖으로 나왔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공기는 한결 부드럽게 느껴졌다. 혹은 내 마음이 조금은 풀어져 있었던 것일지도. 나는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을 들었다. 비의 노래, 라는 부제가 붙은 곡. 이자벨 파우스트의 담담하면서도 차분한 온기가 느껴지는 바이올린에 기대어, 잠시 머물렀던 빈터가르텐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