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미로 Sep 30. 2021

몬트리올의 시간 - 차도락

여행, 그 순간에 머물다

이 길이 맞는 걸까, 몇 번을 의문했다.


몬트리올 시내에서, 큰길을 벗어나 작은 길목으로 들어서자 상점이나 식당 같은 건 보이지 않고 그저 주택가 같은 풍경이었다. 힙한 카페나 식당이 그렇게 뜬금없는 위치에 자리하는 게 아주 드문 일만은 아니었지만, 몬트리올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그런 곳을 찾아가자니 역시나 미심쩍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큰 기대 없이 찾아본 티룸 리뷰들에서 단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렇다면 한번 가볼까 싶었던 것이다.


지도를 따라 걷다 보니 코너에서 여긴가, 싶은 곳을 마주했다. 커다란 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다구들에서 시선을 올려 간판을 보니 쓰여있는 Cha Do Raku. 겉으로 보기에도 조용한 분위기에 조심스레 문을 여니 주인으로 보이는 단정한 커트머리의 여자가 나긋하게 안녕하세요, 티룸입니다, 라고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마시러 왔다고 하자 신발을 벗고 들어와 달라며 슬리퍼를 내주었다.


아주 작은 티룸이었다. 앞쪽에는 다구와 소분한 차들을 파는 공간이 있었고, 카운터 옆으로 작은 방이 있어 그 안쪽에서 차를 마시게 되어 있었다. 테이블 두어 개, 카우치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매우 작아서 누군가의 집에 온 듯 내밀한 분위기였다. 나를 제외하곤 남녀 한 팀만이 차를 마시고 있었기에 붐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나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메뉴를 읽기 시작했다.


우롱과 녹차 위주의 메뉴였다. 우롱이 유명하다는 얘기에 궁금하기는 했지만 바로 직전에 먹은 푸틴의 느끼함을 잡아주고 그 뒤의 공연 때까지 정신줄을 잡아줄 강한 홍차가 간절했다. 홍차 셀렉션은 많지는 않았고, 대만이나 중국의 다원 홍차라 생소했다. 고민하다 주인 여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추천을 부탁하니 대만의 허니 블랙을 권해 그것을 주문했다. 앉아있는 테이블 옆 창문으로 주홍색 햇빛이 스며들어 실내를 따스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주문한 홍차는 일본식 다구에 담겨 나왔고, 트레이 위에는 도자기 찻잔과 모래시계, 그리고 보온 물병이 함께 올려져 있었다. 주인 여자는 친절한 말씨로 우림 법을 설명해주었다. 세차는 하지 말고 1분씩 두 탕을 우리며, 세 탕째부터는 시간을 늘릴 것. 모래시계는 1분, 3분, 5분의 삼면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을 붓고 1분의 모래시계를 거꾸로 내려 차가 우러나길 기다렸다. 달큰하면서 알싸한 향이 주홍빛의 실내 공기에 은은하게 번져 조금은 곤두서 있던 신경줄을 차분하게 가다듬는 듯했다.


1분이 지나 옅은 다갈색의 찻물을 찻잔에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은은한 달큰함과 약간의 스파이시함이 부드럽게 감겨들다가 톡 쏘는 듯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나는 차를 마시고 저물어가는 햇빛을 느끼는 감각에 온 몸을 내맡긴 채 편안함을 느꼈다. 그동안 쌓여왔던 피로감이 은근하게 녹아내리는 듯한 휴식의 시간이었고, 나는 그로 만족했다. 그때까지 뭐하자고 굳이 몬트리올까지 왔을까, 싶었던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불만이 그 순간 어느 정도는 해소되는 듯했다. 일상을 벗어나고, 그로 스스로에게 편안해질 핑계를 주는 것.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겠지만, 거기에 더해진 예상치 못한 사소한 즐거움. 낯선 도시에서 찾은 편안한 공간에서 좋은 차를 마시는 그 시간. 나는 아주 오랜만에 감사함에 가까운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정보다는 긴 시간 그곳에 앉아있다가 나오면서, 나는 소분된 허니 블랙을 집어 들었다. 이 차가 맛있었던 것은 어쩌면 여행을 와 너그러워진 마음에, 낯선 공간에서 새로운 차를 마셨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것을 집에서 우려 마시면 그처럼 맛있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예전 같았다면 그러한 생각들이 그 차를 사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다. 환상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은 어설픈 두려움 때문에. 


하지만 이번에 나는 그것을 샀다. 환상이 부서져도 상관없었다. 맛이 그만 못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제 연약한 환상에 매달려, 그것이 깨질까봐 전전긍긍하며 살지는 않을 것이다. 부서질 것은 부서지고, 깨어질 것은 깨어져도, 결국 남는 것들이 있다. 그 남아있는 것들만이 단단하게 내 안을 차지하게 둘 것이다. 그렇게 내 안의 비어버린 공간들을 채워가리라고, 고작 찻잎 몇 그램을 사 오는 것에 거창한 이유를 부여하면서 나는 엷은 미소와 함께 그곳을 떠났다. 


다시 돌아오리라는 생각과 함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