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미로 Sep 27. 2021

몬트리올의 시간 - 블러디 오렌지

여행, 그 순간에 머물다

검게 젖은 도시에 번지는 붉은 빛.


공연장을 나설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갑이 겨우 들어가는 작고 얇은 클러치에 우산이 들어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클러치를 열어보았다. 잠시 고민하다 봄비니까, 이상한 핑계를 스스로에게 던지며 나는 거리로 나섰다. 방금 본 공연의 열기가 온 몸에 남아있던 것도 무모한 결정에 일조했을지 모르겠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서인지 처음엔 머리 위에 내리는 빗방울마저 산뜻하게 느껴졌지만, 걷다보니 발걸음은 점점 늘어졌고 허기마저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공연 시간에 늦었다며 그때까지 저녁도 제대로 먹지 않은 상태였다. 제법 늦은 시간, 가벼운 식사를 할 곳이 있을까 거리를 둘러보았지만 딱히 눈에 띄는 곳은 없었다. 머릿속에서 여전히 울리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이 서서히 희미해진다 느껴질 즈음, 젖은 거리에 비치는 은은한 오렌지색 조명이 눈에 띄었다.


블러디 오렌지.


조명에 어울리는 이름이군, 아니 이름에 맞게 조명을 단 걸까. 어찌됐든 그리 상관은 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바의 문을 밀었다. 어두운 실내에 붉게 빛을 내는 홍등이 군데군데 걸려있었고, 나는 홀로 자리에 앉았다. 메뉴는 아시안 퓨전인 듯, 대체로 중국 요리에 웨스턴 트위스트가 가해진 것들이었다. 나는 칼라마리 샐러드와 블러디 오렌지라는 칵테일을 시켰다. 나른하게 흘러나오는 라운지 음악을 들으며, 그와는 사뭇 달랐던 다닐 트리포노프의 연주를 다시금 떠올렸다. 


마치 광기에 휩싸인 듯 그의 눈빛은 강렬했고, 그가 온 몸으로 만들어내는 음악에 관객들은 집단 최면에라도 걸린 듯 숨을 죽이고 집중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셀 수 없이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한 그 유명한 곡을 그는 무시무시할 정도의 열정으로 연주해냈다. 그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보면 연주자로서 음악을 전달하는 느낌 이상의 전율이 느껴지는데, 마치 음악 안에 푹 잠겨 온 몸으로 음악을 살아내는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들, 특히 2번과 3번은 워낙 인기있는 레퍼토리기도 하고 관객 반응이 좋은 편이지만, 트리포노프의 연주에 대한 반응은 단순히 좋은 정도가 아니다. 열광이라 표현해도 어쩐지 부족한 느낌이 들 정도. 물론 그건 내가 트리포노프의 열렬한 팬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몇 년 전 처음으로 그의 라흐마니노프를 들은 후, 나는 그가 토론토에 올 때마다 공연을 찾았다. 사실은 몬트리올을 방문한 가장 큰 이유도 그의 라흐마니노프를 듣기 위해서였다. 이미 그의 연주를 몇 번 보았지만, 그가 이렇게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는 것을 볼 기회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될까 싶어서. 


칵테일이 나오고 나는 하이볼 글래스에 담긴, 밝은 오렌지색의 술을 한모금 마셨다. 오렌지맛이 새큼하면서 달달했고, 보드카의 투명한 쌉싸름함이 꽤 잘 어울렸다. 하지만 이건 그냥 스크류 드라이버 아닌가, 이걸 왜 블러디 오렌지라고 하지. 그냥 식당 이름에 맞춘 게으른 작명이었을까, 궁금함에 나는 칼라마리 샐러드를 가져온 서버에게 물었다.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당신은, 심장이 부서져본 적 없나요?"


뜬금없이 무슨 말일까,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왼쪽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심장이 부서지고, 거기에서 흐른 피. 뜨겁고, 끈적이고, 비릿하고, 그리고 지독히 슬픈. 그 피의 맛을 모른다면, 당신은 블러디 오렌지의 맛을 알 수 없을 거에요. 영원히."


나는 내 앞에 놓인, 반쯤 비워진 술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서진 심장에서 흐른 피의 맛이라니, 칵테일 하나에 너무 심오한 것 아닌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나를 본 그가 웃었다.


"농담이에요. 원래 블러드 오렌지 주스를 넣어 만드는 건데, 실수로 그냥 오렌지 주스를 넣은 모양이네요. 미안해요. 새로 만들어 드릴게요."


그는 내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잔을 들고 뒤돌아섰다. 그의 밝은 금발에 홍등에서 비치는 조명이 붉게 내려앉았고, 그 색채는 어쩐지 핏빛을 연상시켰다. 나는 어쩐지 비릿하게 느껴지는 칼라마리를 먹으면서 오래된 기억 속의 한 장면이 떠오르려는 것을 억눌렀다. 이곳보다도 어두웠던 바에서, 붉게 빛나던 네그로니. 맞은편에 앉아 나를 바라보던 그 남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부서진 심장 같은 건, 그 감각 같은 건, 느끼고 싶지 않았다.


새로 나온 블러디 오렌지는 과연 피처럼 붉은 빛이었다. 새콤한 향이 강렬했지만 나는 그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한 모금도. 그리고 계산을 요청했다. 영수증에는 서버의 이름과, 그의 전화번호일 숫자 몇 개가 적혀 있었다. 순간 어느 영화에서 봤던 장면 - 은밀한 메세지를 적은 냅킨을 물잔에 넣는 손, 그리고 투명한 물 속에 번지던 검은 잉크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 영수증을 블러디 오렌지에, 피처럼 붉은 칵테일에 넣는다면......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대신 반쯤 남긴 칼라마리 샐러드와 물기 없이 바삭한 영수증을 뒤로 하고 바를 나온다.


밤의 몬트리올, 거리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내겐 여전히 우산이 없었다. 나는 비에 젖은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빗물이 무방비한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라흐마니노프의 낭만적인, 처연한, 찬란하게 부서지는 슬픔 같은 멜로디가 빗소리 사이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듯 했다. 나는 입술에 맺힌 빗물을 머금었다.


비는 미지근했고,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몬트리올의 시간 - 차도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