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를 복기하며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은 다면기다. 살다보면 이기는 바둑도 있지만 지는 바둑도 있다. 바둑 십계명에 사소취대라는 격언이 있다. 굳이 지는 바둑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질 것 같으면 적당히 져주고 유리한 바둑은 확실히 이기는 것이 현명하다. 바둑과 인생은 많은 점에서 닮아 있다. 첫단추를 잘못 꿰면 꼬이는 것도 비슷하다. 인생은 행마를 실수해도 관계라는 안전망이 있지만 바둑은 자력으로 이겨내야 하는 것, 그것이 매력인 듯.
바둑은 수담이라 했던가, 손으로 나누는 대화이자 말없이도 뜻이 통한다고 할까? 또한 대표적인 신선놀음이다. 알파고가 정복하기 전까지만 해도 바둑은 보드게임 계의 최고봉이었다. 이세돌 9단이 알파고를 신의 한 수로 이긴 것이 그나마 마지막 불씨였을 것이다. 이제는 인간계와 AI계가 나뉘고, 프로 기사들조차도 AI 추천수를 고려하는 판이니 인생살이에 참고할 만하다. 과연 AI와 대비되는 사람의 비교우위란 무엇일까.
그렇다면 시작하는 자에게 철학이 필요하다. 포석을 넘어야 행마가 있고, 세력과 실리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그럴싸한 한 판의 바둑이 완성된다. 흉내바둑에는 한계가 있다. 삶이라는 기나긴 마라톤에서 스스로 전략과 청사진을 갖추고 결을 따라 나아갈 때 대표성과 에너지가 주어진다. 결을 읽을 때 중요한 건 아무래도 사회성 아닐까.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이 스테디셀러로 회자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국제관계에서도 비슷한 룰이 적용된다. 지금은 중국이 선수를 잡은 듯하다. 오랜 세월 세계 질서를 리드해온 서양에 반해 동양은 '도광양회', 즉 덩샤오핑의 말처럼 도검의 광채를 숨기고 때를 기다리던 시절을 지나, 무대에 올라 본실력을 경주하게 된 것이다. 힘이 없는 이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후발 선진국으로서의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열쇠인 동시에 미중을 위시한 강대국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 해야하는 처지다.
하지만 묻어가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에 숟가락을 올려두는 건 전혀 손해가 아니다. 다만 경제학에서 말하는 다변화의 필요성처럼, 초기엔 여러 군데 숟가락을 올려두고 전망할 필요가 있다. 게중에는 커지는 숟가락도 있지만 녹이 스는 그것도 있을테다. 석가의 자등명 법등명과 같은 이치다. 일단 소속 집단을 선택했으면 집단 내에서 공유되는 효율에 의지하면 된다. 작은 집을 짓다가 큰 집으로 넘어갈 수 있다.
정말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일까. 포석도 중요하고 세력 싸움도 필수불가결하나, 끝내기로 불리했던 판을 역전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후발 주자로서의 이점이란 무엇일까. 중국이 원천 기술 발명은 미비해도 기존 기술을 베껴서 응용하는 건 경지가 있다. 내수 시장이 비할 데 없이 큰 데다 군더더기 없는 공산당의 의사결정 프로세스를 십분 활용한다. 그 넓은 땅에 십수억명의 인구를 데리고 민주주의 할 수 있겠는가?
결론은 비효율의 제거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들 말하지만, 사실 삶의 방향은 정해져 있고 주안점은 그 흐름을 어떻게 가속할 것이냐다. 정답은 좋은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을 줄이는 것이다. 방향이 어긋나면 엔트로피가 증가하므로 상부 구조의 개입 없이는 방향전환이 불가하다. 개인 차원에선 가족이, 가족의 차원에선 사회가, 그 다음은 국가 - 세계 - 신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 극기는 기본이다.
재독 철학자인 한병철 씨도 저작에서 자신을 넘어야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하더라. 헤세가 말한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경험을 이름일까. 역시 천재란 골방이 아니라 광장에서 만들어진다. 누구나 처음엔 모방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있다. 허영만의 만화 식객에선 온고지신의 성찬과 일신우일신의 오봉주가 대결한다. 그럼 누가 이겼냐고? 요리대결은 차장수가 이겼지만 권력은 운암정의 주인에게 있다.
동묘앞까지 가는 프로기사를 배웅하며 나눴던 대화에서 외연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한국에 남아봤자 우물안 개구리일 뿐이다. 난중에 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은 신대륙을 보고 와야 한다. 경제 문제도 마찬가지다. 피크 재팬, 차이나에 이어 한국이 후발 주자의 굴레를 벗고 신성장 단계로 도약하는 길은 역시 선진국 행세를 제대로 하는 것이다. 교육만능주의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고 어차피 AI에 의해 무너진다.
아... 운명이란 무엇일까. 모든 인간은 신의 배우로서 살아갈 운명을 지니고 있다. 자유의지란 세상과 결맞음을 이루고 진리를 체화하여 실천하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운명의 메세지를 곧이 들으려면 육감을 예민하고 날카롭게 단련하여 안테나를 세워야만 한다. 작가는 글을 쓰고 마라토너는 달리기에 집중할 때 능동적인 주인이 되어 비로소 다르마를 획득한다.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는 작심한 통뼈라서 둘 다 했다.
바둑이든 삶이든 무엇이든 간에, 연결해야 한다. 큰 흐름과 연결하면 발전이 있고 단절하면 이익이 있다. 부지런히 외연을 확장하면서도 내실을 다지는 것이 합리적이다. 코로나 때 느꼈겠지만 약한 고리를 보완하는 것이 최적의 수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소실점은 소수의 스타 플레이어가 아니라 약점에 있다. 제대로 연결하려면 중앙으로 치고 나가야 한다. 삶 또한 큰 강물의 본류로 나아가는 것이 맞다. 그것이 진정한 세계화 아닐까.
지난 한 해, 대학생으로서 롤플레잉을 하며 다양한 바둑을 두었다. 등산과 밴드라는 바둑 이후에 클래식과 달리기란 바둑이 있었다. 가난한 노래의 씨앗은 충분히 뿌려졌다. 남은 것은 스스로 초인이 되어 이를 널리 전파하는 일 뿐이다. 세상의 법칙은 본인 뿐만 아니라 당신도 움직이게 한다. 바야흐로 움직이는 것이 질서를 만든다. 그간의 슴슴한 노력은 비둘기 걸음으로 오는 사상을 탑재하기 위함이었다. 하긴 니체가 뭘 알았겠냐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