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는 크게 상설전시와 기획전시로 나눌 수 있다. 상설전시는 미술관 혹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을 상시적으로 전시하는 것이고 기획전시는 특정화가나 특정주제에 대해 일정기간 전시하는 것을 말한다. 기획전시는 전시회 개최 미술관의 소장품을 전시하기도 하지만 다른 미술관으로부터 대여한 작품이 많다.
과거에 비해 미술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에서도 여러 기획전이 인기리에 개최되었고 또 개최되고 있다. 2023년 상반기에는 호퍼의 기획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데이비드 호크니, 빈 미술사 박물관 기획전도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 티센 미술관의 '발렌시아가 의상과 스페인 회화' 기획전 >
유럽의 대형 미술관은 대부분 일 년 내내 기획전을 선보이고 있다. 이 미술관들은 상설전시 중인 작품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기획전까지 챙겨보시라고 추천하기가 조금 망설여진다. 시간이 많지 않은 분은 상설전시 위주로 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미술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기획전도 반드시 둘러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설사 미술에 관심이 덜한 분이라도 유럽 여행을 계기로 미술을 더 알아가고 싶다면 역시 추천한다.
< 귀도 레니 - 무염시태 >
기획 전시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개최 중인 기획전을 예로 들어보겠다. 첫 째, 특정 화가를 집중 조명하는 것이다. 프라도 미술관은 귀도 레니 특별전을 개최 중이다. 귀도 레니는 17세기 이탈리아 볼로냐 출신 화가이다. 17세기는 바로크의 시대였지만 귀도 레니는 고전주의 화풍을 고수했다.
전시 작품 중에 ‘무염시태’가 눈에 띈다. 프라도 미술관은 ‘무염시태’의 각축장이다. 무염시태는 성모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가톨릭 교리이다. 프라도가 상설전시하고 있는 루벤스, 무릴요, 티에폴로의 무염시태와 기획전에서 전시하고 있는 귀도 레니의 무염시태를 비교하면 즐거움이 배가될 것이다.
< 카포디몬테 미술관 소장, 파르미자니노의 안테아 >
둘째, 특정 미술관의 작품들을 초청하는 것이다. 루브르 미술관 홈페이지에 들아가 보니 ‘카포디몬테 미술관’ 기획전이 진행 중이다. 카포디몬테 미술관은 이탈리아 나폴리에 있다. 어마어마한 미술관이 즐비한 이탈리아에서도 손꼽히게 중요한 미술관이다.
원근법의 개척자인 마사초, 화려한 색채의 티치아노, 신체 왜곡으로 유명한 파르미자니노까지. 카포디몬테가 자랑하는 대가들의 작품이 파리에 모였다. 화가들의 화풍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테지만 시대의 흐름을 음미하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루브르의 기획전은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초기(마사초)를 거쳐 성기(티치아노)를 지나 변형(파르미자니노)에 다다르게 되는 흐름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게 한다.
< 좌측, 엘 그레코 - 십자가형 / 우측 피카소 - 아코디언 연주자 >
셋째, 특정 주제로 기획하는 것이다. 영향을 주고받은 화가들의 작품을 함께 전시한다던가, 특정 시기의 다양한 화풍을 비교 전시한다던가, ‘19세기의 부르주아들’같이 시대상을 비춰준다던가 하는 것이다. 프라도에서는 ‘피카소, 엘 그레코 그리고 분석적 큐비즘’을 주제로 전시하고 있다.
피카소는 엘 그레코의 작품에 크게 감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엘 그레코의 길쭉한 신체왜곡과 피카소가 철저히 분해한 인체 조각들.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을 거부했던 두 화가가 300년의 시차를 두고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살펴보는 것은 흥미진진한 감상이 될 것이다.
기획전시만의 묘미는 어떤 것이 있을까. 먼저 ‘공간예술’의 제약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술은 ‘공간예술’과 ‘시간예술’로 분류할 수 있다. 공간예술은 회화, 조각, 건축이 있고 시간예술은 음악, 문학, 무용이 있다. 공간예술은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공간을 차지하기 때문에 진품을 보기 위해서는 예술품이 있는 장소를 방문하는 수밖에 없다.
시간예술은 이와 좀 다르다. 음악을 예로 들어보면 특정 아티스트를 좋아한다면 그 사람의 대표곡을 모두 한 자리에서 들어볼 수 있다. 스마트폰만 있다면 말이다. 과거에는 음악도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 있어야만 감상이 가능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 덕에 장소의 제약을 상당히 벗어났다. 물론 음악도 스마트폰으로 듣는 음악과 라이브의 감동은 다르다. 하지만 미술품을 사진으로 보는 것과 진품으로 보는 것만큼의 차이는 아니다.
< 좌측부터 슈타델 미술관, 루브르 박물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
기획전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작품을 한 곳에 모아주기 때문에 공간예술의 제약을 벗어날 수 있다. 앞서 애기한 귀도 레니 특별전을 위해 작품을 대여해 준 미술관의 면면을 보자. 프랑크푸르트의 슈타델 미술관,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과 루브르 박물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런던의 왕실 컬렉션, 로마의 국립고전미술관. 귀도 레니의 작품을 아무리 좋아한다 하더라도 이 미술관들을 다 방문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프라도의 기획전을 방문한다면 한 장소에서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이 위대한 화가의 대표작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기획전을 가면 작품 설명에서 어느 미술관으로부터 대여한 것인지를 꼭 확인한다. 미술 상식도 넓어질 뿐더러 이 기획전이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기획전의 또 다른 묘미는 화가나 화풍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정 화가에 대한 기획전을 개최하게 되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제나 화풍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그렇게 변화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 지를 친절히 설명한다. 한 화가에 대한 지식이 깊어진다는 것은 지식의 폭도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가를 깊이 알아가다 보면 그 화가와 영향을 주고받은 화가, 당시에 유행한 기술과 기법, 사회, 문화적 배경까지 함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얘기해보자. 기획전은 미술을 바라보는 시야와 사고의 폭을 넓혀준다. 앞서 애기한 피카소와 엘 그레코 작품 간의 비교 기획이 좋은 예다. 따로 보았을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점을 나란히 함께 걸어놓고 비교해 보면 달리 보일 수 있다. 이렇게 한 번 시야의 폭을 넓혀두면 다른 작품을 볼 때도 더욱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다. 마티즈의 색채와 티치아노의 색채는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을까, 같이 말이다.
한국의 기획전 수준도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지만 아직은 유럽 미술관의 수준이 더 높은 것이 사실이다. 미술관의 역사와 규모를 생각하면 그럴 수 밖에 없다. 또 한 가지 그들의 강력한 경쟁력은 전세계 미술관과의 네트워킹 이다.귀도 레니 특별전에 작품을 대여해 준 어마어마한 미술관들을 떠올려보면 그들 간의 네트워킹이 얼마나 단단한 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귀도 레니 작품을 빌려줘서 고마워. 다음 번에는 우리 미술관의 엘 그레코 작품을 빌려줄께.' 이래저래 유럽 미술관은 압도적인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유럽미술관의 기획전을 방문한다면 작품의 양이나 질, 어느 면에서나 실망할 일은 없다.
용산 국립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잠시 휴식하며 박물관 소식지를 읽었던 적이 있다. 마침 기획전을 준비하는 분들에 대한 기사가 있었다. 그분들이 기획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생각해 보면 기획전이란 미술작품을 재료로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예술이다.
어떤 주제로 전시할지, 어떤 작품을 선정할지, 작품들은 어떤 순서로 배치할지, 전시실의 분위기는 어떻게 조성할지. 이 모든 것이 고도의 창작활동이다. 기획전시실에 들어설 때면 늘 두근거린다. 예술가가 만들어 낸 작품과 기획자가 창조해 낸 공간이 어우러져 황홀한 예술의 향기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모처럼 유럽의 미술관을 찾았다면 조금 더 시간을 내어 기획전을 방문해 보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