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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명재 Oct 06. 2024

명랑한 현대 미술

캐리비안 은행에서 만난 설치 미술

- 통통 튀는 인포메이션


파나마에서 근무를 시작한 지 2개월이 되어간다. 나라 전체 인구가 서울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 약 450만 명 - 작은 국가이지만 수도 파나마시티의 스카이 라인은 꽤 인상적이다. 파나마는 북미와 남미를 연결하는 허리에 위치해 있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운하는 바로 이 가느다란 허리를 가로질러 만든 것이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 덕에 많은 다국적 기업들이 파나마에 지역본부를 두고 있다. 그러다 보니 중남미에서 손꼽히는 마천루가 형성되었다.


파나마의 즐비한 고층 빌딩 중에는 겉모습만 그럴듯한 건물이 있는 반면 내부가 더 멋있는 건물도 있다. 하루는 점심시간에 커피를 마시고 나오는데 카페 창 너머로 보이는 로비가 인상적이었다. 자연스레 로비로 발걸음을 옮겼다. 로비에 들어는 순간 곧바로 '씩' 웃음이 나왔다. 중앙에 있는 설치 조각이 너무나 재치 있었던 것이다.


< 좌. Banistmo 은행 로비 설치 조각 / 우. 인포메이션 픽토그램 >

완만한 곡선의 철제 조각 위에 철사로 만든 구가 둥실 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인포메이션' 픽토그램을 3D 조각으로 만든 것이다. 보통 공공 건물의 로비에는 인포메이션 데스크가 있는데 이 건물 또한 그러하다. 설치 미술은 작품이 전시되는 공간에 맞추어 제작된다는 점을 떠올려 볼 때, 이 조각은 설치미술의 정의에 딱 들어맞는다.


철이라는 재료는 자칫 딱딱하거나 육중해 보일 있지만 조각은 밝은 색상 덕에 가벼워 보인다. 살짝 휘어진 곡선은 프랑크 소시지 같은 탄력마저 느끼게 준다. 그런데 이 조각은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다. 머리 높이 정도의 부분이 움푹 파여 있다.


< 찌그러진 부분 >

한 동안 고개를 갸우뚱하고 찌그러진 부분을 바라봤다. 불현듯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그냥 가볍게 상상을 해 봤다. 누군가 걸어가다가 '쿵!' 부딪힌 것이리라.


쿵! 쿵...!?


조금 떨어져서 조형물이 거꾸로 뒤집힌 모습을 떠올려봤다. '느낌표'가 보였다. 인포메이션은 정보다. 정보(i)를 뒤집어 보면 충격(!)이 된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해석될 것 같은 정보도 다른 각도로 보면 신선한 충격, 비범한 인사이트가 될 수 있다.


< 인포메이션을 뒤집어 보면 느낌표가 된다 >




- 곡선과 어우러지는 격자


조각에서 조금 떨어져 배경을 둘러보았다. 정면에는 나무 질감의 격자창이 있다. 이러한 격자창은 교토의 마치야 같이 오래된 일본 건물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 중 한 명인 쿠마 겐고가 애용하는 디자인이기도 하다.


세계 각 국을 여행하다 보면 일본식 격자창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프리츠커 상 수상자를 최다 배출한 일본의 건축 디자인이 자연스레 유행하는 것 같다. 미국의 중상류층에서 '젠(Zen)'이나 '와비사비' 같은 일본의 정신 문화가 유행하고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짐작한다.


< 좌. 로비 벽면의 격차창 / 우. 일본 마치야의 격자창 >

고객을 들어 천장을 보았다. 역시나 정사각형의 그리드로 가득 차 있는 가운데 조명도 그리드를 따라 사각형의 네 귀퉁이에서 빛나고 있다. SF 영화에 나오는 우주선을 올려다보는 느낌이다.


< 우주선 같은 빛을 뿜어내는 천장 >

조각은 휘어지고 찌그러졌다.

배경은 반듯하고 끈하다.


얼핏 이 둘은 콘트라스트를 이루는 것 같지만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바닥, 천장, 조각, 조명 모두 따뜻한 톤으로 통일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형물이 짙은 색 계통이었다면 로비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을 것이다.




- 캐리비안 은행


< 슈퍼마켓도 길거리도 모두 총천역색이다 >

지금까지 소개한 로비는 중미의 대형 은행, 'Banistmo' 건물 로비이다. 파나마는 중남미의 금융 허브라 은행이 무척 많다. Banistmo는 파마나시티의 수많은 은행 중에서도 가장 예술적인 로비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한다. (모든 은행을 가 본 것은 아니지만)


파나마는 카리브해에 위치해 있다. 일 년 내내 태양이 빛나는 이 나라는 눈을 찌르는듯한 총천연색이 가득하다. 자연도 건물도 모두 밝고 화사하다. 우버를 타면 흥겨운 레게통이 나오고 TV를 틀면 즐겁게 춤추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우리는 '카리브'라는 지명을 들으면 밝은 기운을 연상한다. 무시무시한 해적도 캐리비안이라는 단어만 갖다 붙이면 왠지 유쾌해 보인다. 한국 유수의 물놀이 공원 이름에도 '캐리비안'이 들어가 있다.


'캐러비안의 은행'에는 명랑하고 쾌활한 분위기가 어울린다. Banistmo의 설치 조각은 '인포메이션 데스크'라는 장소에 딱 들어맞고 파나마의 흥겨운 분위기와 한 번 더 들어맞는다.




- 샐러리맨과 예술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하는 샐러리맨의 발걸음은 천근만근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유모와 재치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예술이 주는 위안은 한 밤의 어둠 속에서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며 잘 나가는 거장의 작품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 창 업무에 매진해야 하는 한낮에도, 무명의 작품 속에도 예술의 위안은 깃들어 있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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