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쓰 Eath May 23. 2022

세상 모든 을들에게

대학원생 전상서

난데없는 무례함에 얻어맞은 날 가이드


지난여름, 양재역에서 환승을 하는데 프랜차이즈 아이스크림 가게의 현란한 간판이 눈에 띄었다. 갑자기 집에 아이스크림을 포장해서 가고 싶어졌다. 계산을 하고 점원에게 맛을 골라서 얘기하고 있는데 옆이 소란스러웠다. 한 중년의 남자와 점원이 대치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포장이 왜 안 되냐’, ‘뚜껑이나 하나 줘봐라’, 하던 실랑이가 점점 언성이 높아지더니 고성이 들렸다. 하얗게 질린 어린 점원을 들여보내고 점장이 흥분한 손님을 맞았다. 기어이 그는 너나 처먹으라며 아이스크림이 담긴 컵을 점원에게 집어던졌고, 나를 비롯한 다른 손님들이 개입하며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끝까지 욕지기를 내뱉으며 그는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눈물을 흘리는 점장과 직원을 달래던 커플을 뒤로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 무례와 폭력의 대상이 내가 아니었음에도 난 그 일이 내 일인 양 진이 빠지고 괴로웠다. 익히, 그리고 자주, 겪어온 상황 이어서다.



도대체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저럴 수 있을까 싶은 일이 꽤나 자주 벌어진다. 심각한 범죄가 아닌 사소한 분풀이지만, 피해자의 입장에선 여간한 폭력이 아닌 그런 일들. 발뒤꿈치가 가볍게 까져도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못 견디게 아픈 것처럼, 누군가에게 고성이나 모욕을 들은 날은 가슴이 내내 뜨끈뜨끈 욱신하다. 스무 살 때부터 다양한 서비스직의 아르바이트를 해왔던 나는 아이스크림 가게의 점원에게서 스물두 살 때 맥도날드의 냉장고에 들어가서 숨어 울던 내 모습을 보았다. 대학원생 시절, 지도교수나 사수의 갑질에 두들겨 맞고 인공환경실에 숨어서 울던 나도 보았다. 항온 항습을 위한 시끄러운 기기 소리와 밀폐된 문 덕분에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는 인공환경실에서 식물을 심어 기르던 플레이트를 보며, 애기장대 이파리를 쓰다듬으며 얼마나 울었던지.


지금은 갑질을 흔하게 당하는 직무가 아니기에, 그렇게 나만의 ‘숨어서 우는 공간’이 필요할 만큼 무례함에 두들겨 맞는 일이 잦지는 않다. 그렇지만 제법 나이를 먹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스펙에, 학벌에, 이것저것 다 갖춘 요즘도 잠깐 가드를 내린 사이에 난데없이 무례함의 잽을 날리는 사람들이 있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얻어맞으면 굉장히 아프다.


우리는 보통, 그렇게 얻어맞고 나서, 스스로를 탓한다. 내가 왜 맞았는지를 곱씹는다. 내가 뭘 잘못했지. 내가 그때 왜 그랬지. 내가 왜 거기를 가서,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해서, 내가 왜 그 사람을 만나서, 내가 왜 그런 말을 해서, 내가 왜 그렇게 답을 해서. ‘내가 왜.’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맞은 놈은 죄가 없다. 맞을 짓을 해서 때렸다는 건 치졸한 핑계다. 맞을 짓을 한다고 모두가 그렇게 남을 패고 다니지는 않는다. 이것은 맞을 짓을 하는 상대를 존중해서라기 보다는, 내가 인간이기에 더러워도 참는 거다. 눈앞의 상대가 만만하다고 힘의 논리로 그의 인격을 공격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사회적인 규칙을 준수하는 사회적 동물이 아닌, 그냥 ‘동물’이 되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정말 잘못을 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닌, 상대방의 무례함과 갑질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굳이 인과를 따지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에서, 우리는 공간은 돌이킬 수 있지만 시간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일은 수정이 불가하고, 그저 남는 것은 그로 인해 상처받은 나 자신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그때 왜’가 아닌, 지금의 내 상처를 다스리는 일에 더 집중해야 한다. 나는 불자가 아니지만 매번 되새기는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산을 넘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았을 때, ‘이 화살이 어디서 온 건지, 왜 쏜 건지, 누가 쏜 건지’ 그걸 따지고 있지 말라고. 얼른 화살을 뽑고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먼저라고.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느닷없이 날아온 화살을 왜 막지 못했나 자책하지 말고 치료부터 하자는 거다.


우리는 마음을 다쳤을 때, 쓸만한 각자의 치료법을 만들어두는 것이 좋다. 나는 그럴 때마다 “우리 엄마한테 일러줄 거야”라고 혼잣말을 하곤 한다. 어린 날, 내가 아무리 큰 애한테 얻어맞고 가서 울어도 엄마는 늘 든든한 내 편이었다. 시험을 망쳐서 우울한 날도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 하고 내 문제를 별 일 아닌 걸로 만들어준 것도 엄마였다. 엄마 손은 약손이고, 엄마 품은 피난처였다. 등을 토닥이는 따뜻한 손에 조금 울고 나면 기분이 나아지곤 했다. 친구들이 죄다 애를 낳고 부모가 된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어김없이 서러울 때면 엄마를 찾는다. 물론 진짜 엄마에게 연락하는 건 아니다. 그냥 혼자 앉아서 ‘우리 엄마한테 일러줄 거야’ 한마디를 입으로 뱉고 나면 내가 아이였던 날, 든든한 피난처였던 내 엄마의 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이가 난데없는 갑질에 서러운 하루를 보냈다면, 앞으로는 자책 보다, ‘나만의 치료법’을 찾는 데에 골몰하기를 바란다. 우린 과거의 사건을 돌이킬 수는 없지만, 현재와 미래의 행동을 통해 과거의 사건에 대한 평가를 바꿀 수는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계속 곱씹으면 그 문제는 점점 커진다. 내가 무시하면 사소한 문제가 된다. 지금 처한 시공간에서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날 지키기를. (특히 그대가 대학원생이라면 더욱)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에메랄드 같은 사람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