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는 할 수 없었던 이야기
아빠의 엄마는 남대문에서 교자상을 팔았다. 집에는 상이 많았다. 찻잔 두 개, 작은 접시 하나를 놓으면 꽉 차는 작은 후식 상부터 삐걱삐걱 다리를 펴면 어른 여덟도 둘러앉는 큰 밥상까지 크기별로 종류별로 있었다. 옷장과 벽 사이에, 침대 밑에, 손이 닿지 않는 부엌 선반 제일 꼭대기에, 상들은 얌전히 숨었다가 손님이 오면 어디선가 나타났다.
할머니는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다. 목소리도 컸다. 어떤 사람은 할머니를 호탕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할머니 성격이 불같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기자와 경찰 공무원으로 그저 청렴하고 결백하게 일하는 집이었다. 할머니가 집에 돈을 댔다. 남대문에서 각지로 팔려간 상들이 장대 같은 아들 둘과 할머니를 꼭 닮은 딸 둘을 키워냈다. 자식들을 학교 보내고 결혼시키고, 그 자식들이 다시 아들과 딸을 낳을 때까지 할머니는 시장에 살았다.
상이 잘 팔린 날에는 할머니는 가게 문을 일찍 닫았다. 남대문 시장 아동복 상가에서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네 개 사와 손주들을 입혔다. 그 옷들은 제대로 포장된 적이 없었다. 대체로 까만 비닐봉지에서 나왔다.
할머니와 나는 내가 아홉 살 열 살이 될 무렵 1년 넘게 같이 살았다. 그전까지 우리는 데면데면한 사이였다가 사이가 꽤 나빠졌다.
할머니는 남자아이를 예뻐했다. 동생을 자주 부르고 “우리 장손” “우리 장손” 했다. 생선이든 고기든 제일 맛있는 부분은 남동생을 먹였다. 말 잘 듣고 글씨를 반듯하게 써서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아이였던 나는, 집에만 오면 할머니의 2등 손주가 됐다.
나는 누가 나를 덜 예뻐하는 걸 견디지 못했다. 겨우 초등학교 2학년 3학년이던 나는 할머니가 명백하게 나를 차별한다는 증거를 잡은 날엔 아빠한테 가서 일렀다. 대개 아주 사소하고 치사한 일들이었다.
동생이랑 나랑 둘다 월드콘을 먹는데, 할머니가 동생한테만 아이스크림 밑 과자와 초콜릿 부분을 먹지 말라고 했다. 이유는 “그런 건 몸에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난 초콜릿을 좋아하면서도 할머니가 동생만 챙기는 게 억울하다고 또 울며불며 고자질했다. 퇴근한 아빠는 “어머니 애가 서운해요. 똑같이 대해주세요.”하고 늘 내 편을 들어주었다.
할머니는 나를 예민한 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할머니에겐 남자가 더 중요한 게 당연했다. 가리봉동에서 연탄을 때던 1970년대에, 아들들이 자던 방에 연탄가스가 새어들었다. 아들들은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다. 그 다음날부터 할머니는 딸들에게 방을 바꿔 가스 새는 방을 쓰라고 했다. 아들 목숨의 무게는 딸 목숨의 무게보다 무거웠다. 할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고작 아이스크림 속 초콜릿 같은 거에 눈물콧물 빼는 꼬맹이를 할머니가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할머니와 내가 유일하게 함께 하던 일은 수요일마다 작은 언덕을 넘어 교회에 가는 일이었다. 엄마아빠가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시내 교회에 간 사이, 할머니와 나는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교회에 갔다. 갔다 와서는 할머니랑 텔레비전을 같이 봤다. 할머니는 신문에 실린 TV편성표를 읽기 귀찮을 때 나에게 물었다. 예나 지금이나 TV를 사랑하는 나는 무슨 요일 몇 시에 무슨 프로그램을 하는지 줄줄 읊었다. 할머니는 나를 크게 기특해하며 칭찬해주었다.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12월의 수요일 저녁이었다. 엄마아빠는 교회에 갔고, 할머니와 나는 집에 있었다. “에그머니나”하고 갑자기 큰 소리가 났다. 달려가니 할머니가 화장실에 쓰러져있었다. 겁이 덜컥 났다. 할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할머니는 말이 없고, 너무 무거웠다. 나는 잠깐 멈칫거리다가, 앞집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주머니가 119를 불렀고 아래층 아저씨가 할머니를 구급차에 태우는 것을 도와주었다. 아주 길게 느껴진 순식간이었다.
할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구급차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다. 뇌출혈이었다. 할머니는 원래 혈압이 높았다. 날씨가 추워지면 늦은 밤이나 이른 아침 어르신들의 부고가 많이 날아온다는 것을 나는 20년 뒤쯤에야 알게 되었다. 당시의 내가 머뭇거린 시간은 몇 초에 불과했겠으나, 나는 그 후로 오랫동안 내가 놓쳐버린 시간 때문에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는지를 곱씹었다.
크리스마스가 코앞이었다. 장례를 치르느라 집에 세웠던 트리를 치울 때 나는 울었다. 아빠의 엄마가 내 잘못 때문에 돌아가신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하기도 미안해서 울었다. 할머니가 인형놀이를 하던 나에게 떠준 작은 뜨개품은 할머니의 유품이 되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교자상들은 오랫동안 남았다. 할머니의 추도예배를 드릴 때, 설과 추석 때, 손님이 많이 올 때 어김없이 쌍둥이 교자상이 나와 거실에 자리를 만들었다. 엄마는 상의 모서리가 닳고 나서도 화려한 테이블보를 덮어 한동안 상을 썼다. 그 상들이 한참 낡은 다음에야 엄마아빠는 비슷한 모양의 상을 새로 샀다. 할머니와 투탁거릴 때 열 살이었던 손녀가 함을 들인 날, 할머니 교자상의 후계자들이 손님을 치러 주었다.
할머니는 자녀들에게 절대로 장사를 해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따박따박 월급이 나오는 회사에 다니길 바랐다. 작은 아들이 대기업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을 때 할머니는 크게 상심했다. 뒤늦게 듣기로 할머니 가게에는 불이 두 번 났었다고 한다. 첫 번째 불은 쓰라렸으나 할머니는 다시 일어섰다. 모질게 버텨 가게를 키웠다. 두 번째 불은 이겨내지 못했다. 수십 년 함께했던 가게는 빚더미로 남았다.
할머니가 고향에서 살았으면 그 삶이 덜 신산했을까. 충남 예산 과수원 집 딸은 서산 남자와 결혼해 서울서 고되게 살았다. 억세야 살아남는 곳에서 오래 버티면서 할머니는 사랑하는 손주들에게도 다정하기가 쑥스러운 사람이 되었다.
할머니가 나도 좋아했던 걸 안다. 난 이제 할머니를 이해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됐는데, 직접 들려드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