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와서
세계인들이 뽑은 가장 걸어보고 싶은 길,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어느 TV 프로그램에 나온 풍경의 여유로움에 반한 후로 가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결심을 하기까지 11개월이 걸렸고, 준비는 한 달 밖에 걸리지 않았다. SNS에 올린 여행 사진 아래 댓글은 대부분 결심을 하기 전의 나처럼 ‘가보고 싶다’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부러움과 깨달음 좀 얻었냐는 농담 섞인 질문이었다. 그 질문은 나에게 짧고도 길었던 그 길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길의 시작, 사회 진출과 닮았다
우리는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고 교육을 받는다. 이 기간을 길에 비유하면 패키지 여행길이다. 조금 빡(?) 세지만 여행 가이드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되니까 말이다. 우리는 이 기간이 지나면 이제 스스로 사회로 나가야 한다. 물론 요즘 취업이 쉽지는 않지만 결국 어느 분야에서, 언제 시작하느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찾아야 한다. 길도 그렇다. 순례길을 예로 들어보면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많은 순례길 중 자신이 걸을 길을 선택해야 하며, 그 시점을 선택하는 것도 나 자신이다. 또한 우리가 사회진출을 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스펙을 준비하듯 길의 시작점까지 가기 위해 우리는 책과 지인들을 통해 비행기, 기차, 버스를 선택하고 루트를 짠다. 사실 시작점에 서면 준비를 했던 하지 않았던 모든 것이 새롭고 어색하기에 많은 실수를 할 수 밖에는 없지만 말이다.
나의 순례길 첫날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어느 블로거의 말만 믿고 숙소 예약을 하지 않았는데 내가 머물고자 했던 숙소는 인기 숙소라 빈 방이 없었고 결국 나는 다음 숙소가 있는 도시까지 물도 살 수 없는 땡볕을, 깜깜한 타국의 시골길을 걸어야만 했다. 만만하게 보았던 길이 길어지고 힘이 들자 등에 멘 배낭을 버리고 싶기까지 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여행이라 준비를 많이 한다고 했는데 첫날부터 벽에 부딪친 느낌이었고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러나 며칠 뒤 걷는 거리를 조절하고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 첫날 배낭을 버렸다면 끝까지 완주하지 못했을 거란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지금도 그 첫날의 아찔함이 가장 강렬한 추억으로 남았다.
걷는 조건, 속도를 바꿀 수 있지만 방향은 바꿀 수 없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정말 다채로웠다. 작은 도시를 지나기도 하고 시골의 한적한 벌판을 걸을 때도 있었다. 비포장도로도 있고 포장된 도로도 있으며 숲길도 있고 땡볕이 내려 째는 길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의 걷는 속도가 달라졌다. 쉬운 길에서는 빨라지고 어려운 길에서는 느려졌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모든 내 삶이 힘들기만 한 오르막길이 아니라 운이 좋아서 뜻하지 않게 일이 잘 풀렸을 때도 있다. 우린 걷기 편한 길을 만났을 때 빠르게 걸어 놔야 나중에 힘든 길을 만났을 때 천천히 걸어도 마음이 조급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 조금 걸었다면 내일 더 걸어야 하듯 말이다.
또한 길 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에 따라서도 달랐다. 다들 나처럼 큰 배낭에 등산복 차림으로 천천히 걷지는 않았다. 짐 없이 걷는 사람 (매일 아침 숙소에서 다음 숙소로 짐을 보낼 수 있다), 지팡이가 있거나 없는 사람, 나이가 어리거나 많은 사람, 체력이 좋은 사람 없는 사람 등 많은 유형이 존재하고 그 속도도 달라진다. 어릴 때의 나와 짐이 많아진 지금의 나의 인생을 걷는 속도가 다르듯 말이다. 이렇게 속도가 다 다른 순례자들은 다른 사람을 지나쳐 앞서 나갈 때 이렇게 인사한다. ‘부엔 까미노 (좋은 길)’. 속도는 다르지만 모든 사람들의 길을 응원한다는 뜻이다. 모든 순례자들은 산티아고 한 곳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길의 동반자, 진정한 삶의 의미에 대해 묻다
이제 고백하자면 나는 40대 중년이다. 며칠 동안 걷기만 하는 여정이 걱정되어 출발 전 트레킹에 필요한 장비들을 많이 준비해왔다. 조금 더 편하게 걷기 위해서,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행복했던 건 아니었다. 내가 진정 부러웠던 건 다정하게 걷고 있는 가족이었다. 순례자의 길은 혼자인 사람, 또는 친구, 부부, 가족 등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걷는 사람들이 있다. 같은 방향을 보고 함께 걸어갈 동행자, 동반자가 있다는 느낌은 어떨까, 또는 정말 싫은 사람과 이 길을 걷는다면 행복할까 하고 자문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난 혼자만 걸었던 건 아니다. 나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함께 걷다 헤어지고 그러다 다시 만나기도 했다. 내가 가는 숙소마다 마주쳤던 한 스페인 할머니와 8살 정도 된 손자가 있었다. 처음에는 말 한마디 안 했지만 자꾸 마주치다 보니 반가워 인사를 하고 나중에는 번역기로 꽤 재미있는 대화까지 했다. 어느 날은 숙소에서 같은 방을 쓰게 된 가족과(6인실 기숙사형태인 숙소였다) 식사를 같이 했는데 그 날 난 처음으로 스페인 전통 수프를 주문해 먹을 수 있었다. 뜻하지 않은 인연들로 내 길은 더 풍요로워지고 있었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혼자 걸을 때도 있지만 친구, 연인, 가족과 걷기도 하고 길에서 만난 사람과 동행자가 되어서 걷기도 한다. 같은 방향을 보고 함께 걸어갈 동행자, 동반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 길이 끝났을 때 의미가 다르게 다가오는 것 같다.
사실 이 길을 처음 걸을 때 의욕에 넘쳐 걷는 것에만 열중한 채 어디서 식사를 해결하나, 어디서 잘 것인가가만을 생각했다. 길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나는 잠시 쉴 때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가령 이 길에서 부, 즉 돈은 단지 더 좋은 음식, 좋은 숙소를 의미하지 길의 시작점을 결정짓거나 속도를 바꾸거나 동반자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생각들 말이다. 우리는 내 앞에 놓인 삶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살아간다. 걷다가 잠시 쉰다는 것은 길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배낭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고 마시는 물 한 모금과 에너지바는 더 멀리 갈 수 있는 힘을 준다. 길이 너무 힘들거나 반대로 너무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는 잠시 배낭을 내리고 다른 생각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 여러분의 인생길이 그렇다면 여행길을 떠나길 추천한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 생 장 피드포트에서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의 800Km의 길.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인 성야고보의 스페인어식의 이름이 산티아고일 정도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로 전 세계 순례길 중 가장 인기 있는 코스다. 지금은 종교와 상관없이 각자의 이유로도 많은 세계인들이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