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FAQ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ck of Spades Mar 10. 2019

FAQ 4 - ‘자신이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

‘소외감’ 이 당신을 삼키고 있을 때 생각해봐야 할 것

"살아오면서 당신 스스로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고, 평가받아왔는가?


(부분적으로만 맞는) 조언들 때문에 상처 받고 있지 않았는가?"




학습봉사동아리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학생들의 가장 주된 고민은 표면적으로는 ‘학습 성취도’였다. 자기소개서에 다들 그렇다고 쓰고, 실제로 그렇게 쓰지 않으면 학교에서 멘티로 선발해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것이 가르치는 걸 시작할 때 성적 이야기를 안 물어볼 수가 없게 되는 이유이기도 했는데, 열에 아홉은 자신이 받아온 4등급, 5등급, 6등급 등등의 과목들을 말하면서 죄지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면 나를 비롯한 멘토들은 거의 반사적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괜찮아. 그런 거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함께 잘해보자.”


이 정도까지만 다독이고 넘어가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신경 쓰지 말아라'는 대답은 너무나 흔한 위로이다.

'Hi how are you?'에 대답하는 'I'm fine thank you!'와 비슷한 무게감을 갖는 발언인 것이다.


뻔히 예상되는 반응, 대답만 주고 끝낸다면 - 물론 아무런 상냥한 대응 하나 안 하는 것보다는 조금 나을지 모르겠으나, 저것은 목적을 이루기 어려운 말이다. 문장 그대로 멘티가 ‘그런 거에 신경 쓰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을 이루게 도와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방법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상대방이 나와 이야기하기 전보다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면, 보다 탄탄한 답을 줄 수 있도록 연습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방금 들은 말 너머의 원래 의도를 파악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번 FAQ에서는 멘티들이 가지고 왔던 고민이 단순하게 ‘학습 성취도’ 에만 국한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단계부터 시작해보도록 하겠다.




무엇이 그 많은 학생들에게 죄지은 표정을 짓도록 하였는가?




중고등학교 시절, 수업 끝나고 학원 없는 날의 운동장을 생각해보자.

알음알음 모인 사람들 수가 얼추 열명만 넘어가면, 숫자가 짝수가 되건 홀수가 되건 상관없이 축구 같은 걸 꽤 오랫동안 하다 집에 가지 않았던가?


3:2 정도로 이기는 날도 있고, 0:0으로 질질 경기를 끌다가 (사장된) 골든골 룰로 마무리하고 가기도 하고,

어떤 날은 유독 잘 안 풀려서 0:4로 대판 깨지고 가는 날도 있다.


0:4


비참한 스코어지만, 승부욕이 심하게 과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일 몇 번 겪었다고 해서 마음에 내내 담아두고 살지는 않는다. 그건 그냥 축구니까.



그런데 이런 승부 상황이 교과과정과 공부에 관련된 것으로 바뀐다면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당신은 학교 안에서 이름, 얼굴 아는 사람들 수백 명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내신이나,

전국단위로 수십만이 되는 또래들을 상대로 전국단위로 싸워야 하는 모의고사의 결과를 받아봐야만 했다.


석차, 등급으로 표시되는 당신의 위치는 - 당신이 매우 적은 수의 고득점자 그룹에 들어가지 못한 상황에서는 크건 작건 좌절감을 심어주는 것이 분명하다.




축구와 공부 성적이 주는 무게감이 다르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둘 모두 또래들과 경쟁해야 하는 일이고, 크게 지는 쪽과 크게 이기는 쪽이 항상 나타나는 게임이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후자 (공부 성적)가 타인들에 의해 평가되는 사실상 유일한 가치이고,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있어 6년 + 3년 + 3년 동안의 인생 경험 직후에 내밀 수 있는 유일한 이력서의 항목이라는 점이다.




당신이 예체능 쪽으로 진로를 택할 수 있어서, 아이스링크에서 피겨 스케이팅 유망주가 되느냐 아니냐의 싸움을 할 수 있었거나, 콩쿠르 결과에 따라 기악전공으로 진로를 이어갈지 아닐지를 결정할 수 있는 경험 등을 갖지 못해 본 이상 - 중고등학생 절대다수가 일반계 혹은 근본적으로 일반계와 큰 차이 없는 특성화고로 진학한다.


당신이나 당신의 자녀는 내가 그랬었듯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자동적으로 공부 리그에 가입된다.

다른 길을 진지하게 따질 겨를이나 기회 같은 거 없이 중간, 기말, 중간, 기말...

규칙적으로 자주 많이 날아오는 일정을 소화하고, 문제들을 풀면서 매번 자신의 성적표를 받아봐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용기 있게 뛰어나가면 안심할 수 있는 길로 빠져나올 수 있는가?

쉽지 않은 문제이다. 살아오면서 굉장히 많은 시도와 대안들이 제시되고 시작된 걸 보았으나, 절대다수가 속해있는 길 이외의 것으로 나가서 잘 풀리는 경우를 장담한다는 것이 결코 만만하지가 않아 보였다.



그 결과 국민의 대부분이 의무교육제도와 수학능력 시험일까지 이어지는 트랙을 따라 계속 달리게 되는데,


까놓고 말해서 빈번히 겪게 되는 결과 발표와 시상식, 이런 자리들에서 '그 상황의 주인공으로서'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



스카이캐슬 같은 드라마에서야 석차 하나하나 세어가면서 천상계의 석차 가지고 아웅다웅하는 상황이 묘사되지만, 이건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고 - 내가 목격한 바로, 전 과목을 2등급 안쪽으로 확보하는 상황이 유지된다면 학생 학부모 모두 (경우에 따라 조금씩 아쉬워하는 경우는 있으나) 적정한 수준 이상의 행복감을 얻는 것으로 느껴졌다. 이들은 자신이 흥미 있어하는 분야에 자신 있게 지원할 수 있는 티켓을 거머쥔 상태이다. 경쟁을 똑같이 겪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강한 과목이 있고 약한 과목이 있을 수 있으니까, '모든 과목을 2등급 이내로 맞는다'를 충족하는 사람들은 어림잡아 전체 표본집단에서 5% - 7% 정도 되는 사람들이 아닐까 예상해본다.



그렇다면 나머지 90% 를 넘는 학생들의 경우에는?



당신은 월요일 혹은 금요일마다, 교장실 근처에 붙어있는 방송실에서 불러주는 이런 멘트를 들어봤을 것이다.


‘#학년 #반 ### 학생은 방송실로 내려오세요.’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교장선생님이나 교감선생님급 되는 사람이 그 학생을 호명하면서 말한다.


‘금상. 위 학생은 평소 품행이 방정하고 ~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기에... 이에 표창합니다.’


담임선생님들은 관중으로 지정된 나머지 학생들에게 박수를 치게 유도한다.



365일 중 52주를 들어보면 거의 모든 경우에 한번 받았던 사람이 계속, 방송실로 내려가고, 다음 주에도 내려가고, 요즘 안 내려간다 싶으면 다음 달에 또 내려가고, 그런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부름을 받는 사람들은 1.0~1.9 등급의 학생들일 것이다.

부름을 받지 못한 학생들은 항상 비슷한 시간에 교실에 앉아 박수를 친다.



멘티들이 어떤 상황에 있었을 것 같은가?

절대적으로 살아오는 내내 박수만 치다 멘토링 받으러 오는 사람들의 수가 많았다.




지정 관객석 _ 주도권을 가진 주인공들 _ 선생님이 기억하는 학생들의 모습




인구가 슬슬 줄어들 조짐이 보인다고 하니까, 내가 배우던 때보다는 좀 나아질지 모르겠다.

교사 1명당 관리하는 학생수를 생각해보면 내 때는 한 교실당 35 - 40명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우리가 디테일하게 기억하면서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수가 지금 얼마나 되는가? 사업적인 부분이든, 순수하게 친분을 위한 부분이든. 10명 정도면 적당히 많은 것 같고, 20명을 넘어가서 유지하는 것은 굉장한 노력이 필수로 들어가야 하는 것 같다. (한 달이 길어야 31일, 짧으면 28일까지 되니까)


교사가 관심을 꾸준히, 충분히 많이 가져줄 수 있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1명당 35 - 40명을 다 같이 잘 기억해달라고 하는 부분은 사실상 투철한 사명감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초인적인 무언가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살면서 필수로 신경 써야 하는 일들이 학생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만큼 그런 일을 실제로 해내고 있는 분들은 존경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교사들이 학생을 관리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얼굴 책보다는 엑셀 시트가 먼저 떠오른다.

불가피한 일이다. 학생 수가 이렇게 많은 상황에서는.

얼굴-이름-번호순으로 배열되어서, 한 반을 전부 확인하려면 페이지를 대여섯 개는 넘겨야 하는 - 졸업앨범 같은 얼굴 책이 아니라, 기준을 잡고 만든 내림차순 표.

한눈에 50명이든 60명이든 파악할 수 있게, 한눈에 잘 들어오는 엑셀 시트 말이다. 아래 그림처럼.


[출처: 삼국지 11 PK] 한 종류의 지표로만 평가하는 경우를 아주 잘 보여준다. 한 번 쓰이는 사람만 계속 쓰게 되는 모습 역시.


수상자의 이름이 중요한가? 어떠한 학생의 개성이 관심을 받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주겠는가?

제갈량의 지력과 간옹의 지력을 평균점수로 바꿔서 생각해보자. 

100점짜리 제갈량과 71점짜리 간옹의 성적이 어느 날부터 바뀌어서 나타난다고 생각해보자.

처음 며칠간은 '잘하던 학생이 왜 떨어졌지?'를 의아해하다가도, 금방 선생님의 기억 가능 메모리에서 간옹의 얼굴은 또렷해지고 제갈량은 옅어질 것이다.



사람의 기억을 또렷하게 할 수 있는 모티베이션을 제갈량이 더 이상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업을 마친 다음 성공하기 (여기서 성공이란, 원하는 지망학과로 지원해서 합격하기) 위한 절차에는 성적표 제출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쭉 살아온 이력이 그것으로밖에 기록되지 않았고, 그것만큼 뚜렷하게 증명해줄 수 있는 대체 아이템이 없는 한 말이다.


학생을 평가하는 방법이 공부, 그것으로 나온 성적 이외에 마땅한 것이 없다. 입학사정관제, 학생부종합전형, 아주 다양한 시도가 제시되어왔고 제시되고 있으나 불완전한 부분과 논란이 되는 부분들 때문에 신뢰도 높은 방법으로 자리 잡을 수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초중고 도합 12년이나 되는 세월이 성적으로 기록되고, 성적으로 평가받는데 - 제갈량의 성적이 확 떨어져 버렸다.



제갈량은 현상황에서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많이 잃어버린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선두그룹을 달리고 있지 못하는 마라톤 선수에게 끌리는 주목이 떨어지는 것은 비정하지만 실제로 자주 나타나는 일이기도 하다.



죄지은 표정의 학생들

표면적인 이유로 성적이 나빠서라고 말한다.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중에는 초등학교 때 높은 위치를 유지하다가 내려앉게 된 경우,

살아오는 내내 한 번도 선두권이라는 느낌을 받아보지 못했던 경우 등 다양한 토로들이 있었다.


여기서, 그들이 침울감에 빠져있는 이유를 더욱 정확히 설명한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평가할 때

가치 없는’ 학생.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주목받는 일 대신에 박수만 치면서 지켜보는 쪽에 앉아있어야 했던 상황이다.

짧게는 7년, 길게는 11년 동안 그런 상황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

열 중 하나만이 행복할 수 있는 상황을 유지하고,

90% 를 넘는 학생들이 스스로를 '가치 없다' 고 생각하게 만드는 상황을 유지하면서 이어지는 이런 상황은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정말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진지하게 해결책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방치한다는 것은, 2019년 한국의 고3 인구수가 40만 명이라고 치면 36만 명이 우울감을 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놔둔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런 참담한 상황이 이어지는데도 성의 없는 방법으로만 대응한다는 것은 납득이 갈 수 없는 일이다.




비교하지 말아라’: 단독으로 쓰일 경우 정말로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되는 조언




"비교는 나쁜 것이다."

"살아보니까 그런 거 다 무의미하더라."



고민이 넘치다 못해 튀어나오는 멘티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반사적으로' '바로' 꺼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좋지 않은 방법이다. 세부적으로 지적해보면:




일단 앞의 문장이 틀렸다.

‘비교는 나쁜 것이다’


오히려 비교를 필요 이상으로 안 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가 많다.

게다가 비교를 하지 말라는 것은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본능적인 욕구를 억누르라는 말과도 같다.




뒤의 문장맞는 말이긴 하지만 지금 바로 나와버리기엔 이르다.

‘살아보니까 그런 거 다 무의미하더라’


비교의 무의미함은 살아오면서 실제로 여러 번의 비교를 거치고, 이기는 일과 지는 일이 모두 적당히 많아진 다음에 생각할 여유가 자리 잡는 개념이라 보는 게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비교를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시작한 지 상대적으로 얼마 안 된 젊은 인격체에게 - 특히 (가장 나쁜 경우이지만, 안타깝게도 실제로 많이 일어나는 상황인) 못된 놈들 몇몇이 그 멘티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학업성취도, 재산, 신장 등등 상상할 수 있는 갖가지 것으로 모욕을 주고 있는 상황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비교라는 행동 때문에 일방적으로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고 있던 학생에게 '무의미한 비교를 하지 말아라' 같은 이야기를 해봐야 얼마나 효과적으로 마음에 와 닿겠는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나라에게 '얼른 휴전협정해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겠다.


‘비교하지 말자’고 하는 말을 하는데, 안 될 것이다.

당연히 비교를 해야 한다.

사실 젊은 시절의 비교많이, 충분히, 솔직하게, 다채롭게 하면 할수록 좋다. 이유를 머지않아 설명하겠다.


길거리에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보면 생김새부터 다르다.

인위적인 방법을 거치지 않는 한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쌍둥이로 태어난 사람끼리도 성격이 조금조금씩 다르다.


사람들이 사는 사회는 모든 면이 다른 객체들이 모여서 구성되는 집단이다.

서로 다른 게 눈에 보이는데 그걸 무시하자고?

비교는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이며,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겉으로 내지 않을지언정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은 절대로 충고 한두 마디로 이룰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비교하고자 하는 마음

그런 생각을 누르는 건 인내심을 기르는 전혀 다른 영역이지. 상황 해결과는 차이가 많이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상황 해결이란 멘티가 겪고 있는 소외감을 극복하는 일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모든 부분이 불리한 사람이 비교를 하려고 한다면, 지는 일 빼고 얻는 게 없을 텐데 당신은 무슨 근거로 자꾸 비교를 하라고 부추기느냐?"


그 말은 내가 생각하건대 당신이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의 본질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행위일 수 있다. 좋은 의도로 이야기를 하는 것일 거라는 것을 알지만, 지나치게 방어적인 방법으로만 세상에 대처하라고 충고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In my walks, every man I meet is my superior in some way, and in that I learn from him.”

― Ralph Waldo Emerson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어떤 점에서는 나보다 앞서 있다.

그 점을 나는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 에머슨




정말 좋은 격언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2019년 한국의 중고등학교 환경에서 이러한 말이 실제로 적용되기가 좋은지 한번 생각해보자.




당신의 수학시험 점수가 97점이고, 80점을 맞는 학생이 당신 옆자리에 앉아있다.

당신이 틀린 3점짜리 문제를 그 학생 역시 같이 틀렸다.

학기가 진행되는 내내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다가, 여름방학 날이 찾아온다.

방학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당신은 옆자리의 학생으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는 생각을 품을 수 있겠는가?

그 학생을 당신이 앞으로 긴 세월 동안 기억하려고 하는 요인을 공부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너무나 많은 학생들종목이 같은 경기들로만 계속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다.

세부적인 과목별로 우열관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그러한 과목들의 수가 굉장히 한정적이라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결국 국어 수학 영어 탐구영역 정도로 대부분이 결판나는 시점이 고3 말에 오기 때문이다.


입시가 인생에서 차지하는 가치와 영향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믿거나, 인정하거나, 체감하거나 - 적어도, 어느 형태로든 완전히 여기서 자유로운 상황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많은 학생들이 너무나 한정적인 종목의 경기만 치르고, 그 결과 레코드를 평생 가지고 남은 인생을 열어나가야 한다. 잘 풀리는 사람이라면 영광이 되겠으나, 돌아볼 때마다 의욕을 꺾는 낙인으로 남는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 분명해 보이지 않는가?


학창 시절 동안 사용한 시간의 3/4 이상이 공교육, 사교육, 야간 자율학습으로 때워지는 상황에서, 10대 시절을 돌이켜보면 제일 또렷이 기억나는 게 독서실의 합성목재 나무판과 1자형 형광등이라 그런 걸 추억의 하나로 들먹이는 모습을 보면 우리 모두가 선수생활을 치르듯이 살다가 어른이 된 셈이다.


스스로의 가치를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당연히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살아있는 동안 내가 무슨 활동을 했고, 이를 통해 얻은 기록이 어느 정도였냐'는 것인데, 삶의 대부분을 묶인 채로 보내면서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만 억지로 쌓고 넘어가는 상황. 게다가 선수로서 참가할 수 있는 종목의 수가 한정되어있고, 바꿀 수도 없는 상황에서 성장해야 한다 - 여기서, 주변 사람의 장점이나 배울 점을 찾아본다고 하면. 너나 나나 서로 시간 투자 제일 많이 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서로들 말로는 잠 푹 자고 공부 안 했다고 하겠지만) 공부 이외의 것으로 자신의 가치존중감을 파악하기가 가능하다고 보는가?



코웃음 칠 일이다. 절대 그렇게 될 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비교는 많이, 충분히, 솔직하게, 다채롭게 하면 할수록 좋다

라고 말했다.


미래의 삶의 질이나 방향에 대해 영향을 미칠 요소들이 굉장히 많고 다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옴의 법칙을 잘 외우고 문제풀이에 적용하는 것만큼이나, 어쩌면 이것보다도 더욱 중요한데도 평가절하되는 것들이 사실 굉장히 많다. 모두가 다방면으로 자신을 비교해보고, 자신이 강한 부분을 찾는 일을 빨리 시작해서 다양하게 겪을 수 있은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상업적인 감각

사람들을 잘 모으는 성향

상당한 스케치 실력 (당장 예고에 도전할 만큼 다듬어지지는 않았더라도) 


굳이 교과목별로 석차를 매기고, 가끔 비공개적으로라도 게시하는 경우가 있다면, 이런 것들은 어째서 공개적으로 게시해주지 않는 것인가. '등수 평가가 애매하기 때문에 게시하기가 어렵다' 라면 모든 사례들을 공개적으로 알려주는 것도 상관이 없다.


중요한 건, 어떤 개인이, 자기가 생각할 때 별거 없이 사소한 재주라고 생각하는 게 있다 해도, 이걸 알리면서 스스로를 남과 비교하고 이겼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활동이 훨씬 다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본인이 그것이 공개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원한다면. 방송실에서 성적우수자가 홍보되듯자 모두가 드라마틱하게 자신을 홍보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제공되어야 한다. 네가 그것을 받는 동안 내가 손뼉 치는 역할을 강제적으로 맡았으니, 내가 상 받고 존중받는 모습에 너 역시 손뼉 치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게 사람끼리 사는 삶이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어떤 점에서는 나보다 앞서 있다.

그 점을 나는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이것이 말 치장일뿐인 것이 되지 않으려면. 다양한 비교의 틀이 그 집단 안에 존재해야 한다.

어차피 공부 석차로 비교되고 비교 평가되는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그 외의 석차나, 석차가 아니더라도 (내가 너보다 이 면은 강하다) 말하는 것이 충분히 홍보되고 공유되어야 한다.


공부 석차로만 학생 개개인의 평가가 발생하고, 이 평가로 정의된 사람 사이에 넘어갈 수 없는 수준의 격차나 계급과도 같은 구조가 생기는 것을 방치하는 환경에서는 - 배워야 한다는 말 같은 건 절대 뿌리내릴 수 없다. 어떻게 봐도 내가 저 사람보다 낫거나,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하다는 생각만 가득 채워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위대해지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자신이 중요하다는 느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결코 건강하게 살 수 없다.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을 어떤 방법으로 확보할 수 있는가?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번 사업가라면, 남들은 어떤 노력을 해도 지불할 수 없을 만큼의 액수를 자선기금으로 내는 방법을 통해서.


산악 등반가라면 아무도 성공해보지 못한 루트를 자신이 고안하고 개척한 방법으로 나아갔다는 사실로부터 느꼈을 수 있다.



자신의 중요감을 충족시키기 위해 택할 수 있는 방법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사람들 각자 하나하나가 적어도 하나 이상씩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을 것이기에, 지금 당장 지구를 바라보면 60억 개보다도 많은 경우의 수들이 달성되거나 좌절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이 ‘방법’ 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어떠한 분야나 활동에서 앞서 나가고 있다는 것자각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칠 것이다. 본질적으로 자신이 하고 있는 활동의 노련함과 성취도를 ‘남들의 것과’ 비교함으로써 완성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중요함을 증명하는 데에 있어 '비교'하는 과정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비교는 나쁜 것이다."

"살아보니까 그런 거 다 무의미하더라."




‘살아보니까 그런 거 다 무의미하더라.’를 학업성적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 앞에서 말했을 때

모두들 이것을 미리 알고 이야기를 할 것이다 - '공부 외의 길로 잘 사는 것이 가능하기에'



이 길을 안심하고 택할 수 있는 길을 진작부터 열어준다면 이상적일 것이다.

내가 교육제도 판을 전부 다 새로 짤 수 있다고 한다면,

초등학교 – 고등학교까지 이어지는 12년 교과과정 중에, 2년은 음악을. 2년은 미술을. 2년은 체육 특화로...

이런 식으로 의무교육과정을 짜고 싶다. [이것은 너무나 투박하게 예를 든 것이긴 하지만]

내 경험상 수능용 4과목 이외의 것이 진지하게 공부되던 시절은 솔직히 초등학교 6년이 전부였다고 생각한다.

들러리화 되는 과목들의 수는 들러리처럼 취급받아야 했던 학생들의 수만큼이나 많았다.



학생들의 교육 수준이 어느 이상 되도록 강제하는 정책이 있다면, 개개인이 택할 수 있는 리그의 종류를 할 수 있는 한 다양하게 늘려야 한다. 다양한 길에서 자신의 존중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줘야 한다. 다른 어떤 사람이 이를 두고 '의미 없는 활동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의미가 있을 정도로 부각되는 기회를 절대다수의 학생들이 잡을 수 있어야 하며, 비교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기억들과 사건들을 독서실 책상과 일자형 형광등 같은 이상한 것 대신 진짜 추억으로 가지고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리그의 수가 한정적이어서, 한 종목 가지고만 우열을 계속 나누고,

위층과 아래층이라는 인식이 깨지지 않은 채로 지속되는 것은 그 사회 안에서 서로를 싫어하는 사람들만 남게 만든다. 지속적으로 깔보는 계층 따로, 지속적으로 열등감을 느끼며 짓눌려서 이를 가는 계층 따로.



비교의 가능한 가짓수가 충분히 다양해지면. 학생 개개인의 프로필이 더 이상 (17/51) 이 (43/51) 보다 항상 나은, 그런 식으로만 단순하게 정의되고 비교되는 상황이 아닌 상황이라면,

만인이 백가지의 리그에 속해있으면서 자신이 강한 부분을 결국 찾아내서 소중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는 사회에서는,

상대방과 비교하는 일들이 훨-씬 많아졌다 할지언정, 드디어 이 말이 현실성을 획득하게 된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어떤 점에서는 나보다 앞서 있다.

그 점을 나는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이것을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개인별로 실현한 경험이 발생한다.

다양한 비교를 통해 서로 배우고 존중할 수 있는 국가라면. 분명히 소외감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수가 확 줄어들 수밖에 없다. 단순히 학생들 사이에서만 통용될 이야기가 아니다.




겉으로만 보기 좋은 이야기들 / 실현하기에 충분한 제반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이야기들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탈출하라.

‘공동체 정신을 함양하라.



“기본적으로 어린아이는 자기중심적인 상태이다.”

“어린아이가 성숙단계를 거치면서 사회성이 길러지고, 타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공동체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죄지은 표정의 멘티들 중 솔직한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쁜 생각이라는 걸 알지만. 질투심이 많이 생긴다.'

'재수 없다고 생각하면 내가 너무 유치해서 그런 게 아닐까...'


멘티들은 복합적인 감정을 가진 채 하루하루를 사는 경우가 많았다.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에서 출발해서, 시간이 흐르면 점차 '나보다 위쪽에서 노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생기는 불편한 감정을 확인한다. ‘내가 어린아이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고민한다.


엇나가지 않은 멘티가 - 자신보다 성적이 좋은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는 등의 일을 벌이는 대신에 - 이렇게 생각하는 쪽으로 가는 것을 보면 너무나 대견했다. 그러면서도 주변 상황을 생각할 때마다 굉장히 답답하기도 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계급의 격차가 없다고 이야기들을 한다.

그런데도 '상류', '하류'가 나뉜다고 딱 잘라 생각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평가기준이 다양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강한 부분을 찾을 수 있는 길이 한정되어있고, 간혹 길을 뚫어서 나왔다 해도 이를 기존의 체제에서 홍보해주는 만큼 서포트해주는 부분이 적기 때문이다.


속해있는 리그가 한 개뿐이고, 여기서 계속 비슷한 룰로 비슷하게 깨지면서 산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 기간이 길면 길어질수록 그 자리가 내 자리다, 생각하게 된다.



“어린아이가 성숙단계를 거치면서 사회성이 길러지고, 타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게 성숙단계라고 했다.

항상 무시당하는 입장에서 버텨야 했던 사람의 입장에서, 항상 이기는 쪽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 그 이기는 쪽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 무시당하는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지 않는데?


계급의 격차가 없는 민주주의 사회라고 하는데, 평등하게 주어지는 투표권 1개씩 말고 이런 박탈감의 부분을 국민들에게 충분히 서포트해준 부분이 있는지 묻고 싶어 질 때가 있다.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존중해주는 태도를 유발할 수 없는 환경에서 저런 마음 편한 성장을 기대하라고?


비교를 다양하게 할 수 있고, 이것이 눈에 띌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당신이 이기는 길에서만 있었다면 다른 부분에서는 현격한 차이로 지고 땅에서 굴러보는 일도 있어야 한다. 그런 과정은 정부의 무리한 개입 없이도, 학생들이 참가하는 리그의 다양성이 늘어나게 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효과를 보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각자가 경험하면서 이해하는 다양한 승리와 패배의 경험들이 섞여있는 상황에서야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탈출하고' '공동체 정신을 가지는' 방향으로 성장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저 사람에게 이 부분은 이겼지만, 다른 부분은 졌었다는 걸 확실하게 알았으니까. 그런 경험이 쌓여야지 서로 존중감이 생기는 것이지.


이겨본 기회는 없이 계속 주눅 들고 지기만 하는 환경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의 그룹이 많은 상황에서, 개인 인격의 문제로만 탓을 잡고 ‘너희가 바뀌어야 사회가 좋아진다’ 이런 맘 편한 말로 빠져나가려 하는 사회가 있다면? 그런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이 살 필요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할 행복감이나 존중감을 기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나라에서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인구가 줄어드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환경의 사회에서 살 수 있다면 - 훨씬 나은 삶을 시작할 수 있다.


타인이 깨어있지 못해 너를 존중하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해도, 너는 먼저 시작해라. 

나도 너에게 시작하고 있다. 상호 존중하는 범위를 계속 넓혀가라.




'내가 중요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고 말하는 멘티들에게, 공통적으로

나는 그들에게 그러한 생각을 참고 그들의 생각을 전적으로 고쳐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 말이 설득력이 있었다면 여러 가지 잣대로 자신과 남을 비교해보는 걸 시작해보라고 했다.

비교 결과로 남을 깔아뭉개는 데 쓰지 말고, 존중하는 태도를 명심하면서 세상에서 살아보라고 말했다.




다음과 같은 태도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1. 나의 강점을 찾고, 이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2. 상대방이 잘하는 부분을 찾으면, 이를 인정하고 존중해준다.

3. 진심으로 서로서로의 중요감을 채워줄 수 있는 관계들을 다양하게 맺고, 가능하다면 이 규모를 넓혀볼 것.




다음과 같은 태도는 배척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1. 자신에게 있지 않은 것을 거짓으로 부풀려 말해서 이득을 취하는 행위. (거짓말)

2. 상대방에게 있는 것을 깎아내리거나 없는 것 취급하면서 무시하는 행위.


예를 들어, '~~ 는 ##치고 별 거 없더라.' 같은 말들.

허세, 열등감, 타인 무시의 3박자가 들어간 말이며,

긴 안목으로 보면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그 누구도 가까이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배척받아야 마땅하다” 고 말하기는 하였으나, 저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왜 저렇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아주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로부터 배워라, 배워라, 배워라' 


같은 이야기를 지겨울 정도로 듣는다면


'본받아라 – 모범생 ~~를'

'본받아라 – 모범생 ~~를'


자신에 대한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칭찬 한 번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계속 듣는다면

~~ 에 대한 나의 생각이 어떻게 변하게 될 것인가? 듣는 쪽의 자아존중감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가 현실적으로 얻기 너무나 불가능하거나, 자신의 강점과 전혀 상관없는 방향의 목표라면?



자아존중감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얻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 무시당한다면, 필연적으로


1. 자신에게 ##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 방향으로 극복 (거짓말)

2. 자신에게 없는 가치인 ## 가 원래부터 무가치한 것이라고 믿는 방법으로 극복 (폄훼)


외에는 택할 수 있는 도피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교육과정이 바로 서려면

만 18세의 모든 고3 졸업생이 미적분과 확률통계를 잘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처럼 위험한 두 가지 해결책에 유혹되도록 방치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인다.

저런 것들을 내버려두면서 '교과과정 중에 도덕윤리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만큼 불건전한 것이 어디 있을까?




지금보다 많은 학생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리그들이 다수 육성되어야 한다.


다양한 경로와 방법으로 성공한 학생들이 주목받을 수 있어야 한다.

객관적인 근거와 함께 서로 칭찬받는 상황이 필요하다.


적은 수의 잣대 위에서만 경쟁하게 하는 상황에서는 존중감이 발생할 수 없다.

공정한 평가방법이 보장되는 상황에서 여러 비교 상황에 처하고,

승리패배를 골고루 느낀 사람 상호 간에서여야 진정한 존중이 이루어질 수 있다.




‘알바를 Respect’ 광고가 난 정말로 좋다.

https://www.youtube.com/watch?v=I5Xu5B2NlUg

'딸기우유 핑크를 골라보세요' 그 광고
매거진의 이전글 FAQ 3 - ‘[오컴의 면도날] 때문에 괴롭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