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의 과정을 정서적으로 버텨나가기
60대 남성 A는 작년 건강검진에서 전립선암을 진단받았다. 정밀 검사 결과, 암이 전립선을 다소 벗어났다고 해서 국소진행형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방사선치료과 호르몬치료를 마쳤다. 다행히 암 치료는 경과가 좋은 편이라고 하는데 여전히 마음은 불편하다. 직장은 퇴직을 했지만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어 풍요로운 것까지는 아니지만 아내와 둘이 지내는데 무리는 없다. 이미 취직을 하고 결혼한 자녀들이 있어 필요한 때는 여러 도움도 받고 있다. 건강 상태도 나쁘지 않아 크게 신경 쓸 일도 없는데 어느 땐가부터 일상생활에서 이전과 다른 느낌이다. 집 안에서 왠지 아내가 이전처럼 자신을 챙겨주지 않는 것 같고 가끔 무시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어 벌컥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자신이 실수를 한 거 같아 뭔가 주눅이 든다. 옛 직장 동료들과의 모임에도 암 진단 이후부터는 이런저런 핑계로 나가지 않고 있다. 가끔 연락이 왔지만 내가 몇 번 불편해서 받지 않으니 이제는 연락도 잘 오지 않는다. 요즘은 낮동안 그저 집에서 신문을 보다가 소파에 앉아 멍하니 TV를 보고 있다. 가끔 산책을 나갈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괜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자신이 눈치가 보여 나가서 걷다가 돌아올 뿐이다. 암 치료 이후 괜히 외롭게 느껴지고 스스로가 보잘것 없이 느껴진다. 자녀들은 취미활동도 하고 친구들도 다시 만나라고 하는데 이런 나를 잘 이해해 줄 것 같지도 않고 잘 어울릴 자신도 없다.
암 영역에서 특히 정서적인 영역을 관리하는 정신종양학의 영역에서 남성암은 일종의 사각지대에 있습니다. 유방암이나 갑상선암 등 연령대가 비교적 젊은 암의 경우에는 여성의 비율도 높고 아직까지 사회적으로도 활동하는 시기이다 보니 사회정신적인 어려움에 대한 연구도 충분히 진행이 되었습니다. 관련해서 여러 지원 단체나 지지모임도 비교적 활발한 편입니다. 환자 분들도 그런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스스로 관리도 하려고 하는 편입니다. 다만 중년 남성암에서는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 진행된 정신사회적 연구가 부족합니다. 어떤 상황에 있는지 자료가 부족하다 보니 관련해서 지지하고 지원하는 모임도 상대적으로 턱없이 모자랍니다.
특히 우리나라 중년 남성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서로 건강한 교류를 나누는데 서툽니다. 직장 내에서 위계관계 중심의 사회생활에 익숙하다 보니 때로는 감정을 숨겨야 하고 가까운 이들과는 통상적인 대화가 아닌 술자리에서의 대화가 익숙합니다. 취미 활동도 개인의 즐거움이라기보다는 일의 연장선상에서 하는 경우도 흔하죠. 그렇다 보니 개인적인 위기 상황인 암을 경험하게 되면 이전의 사회적 대인관계의 대부분이 변화되기 쉽습니다. 암 경험자라는 것을 나약하게 보일까 그간 사회적으로 만났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꺼리게 되고 과거에는 술자리에서 친하게 지내던 관계는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 내에서도 항상 든든한 기둥으로 중심적인 축이었던 자신이 어느 순간 돌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어색합니다.
여러 연구에서는 동일한 연령과 환경에서 암으로 인한 우울이나 불안 등의 정서적인 어려움이 남성보다는 여성에서 더 심하다고 합니다. 실제 암과 관련 없이 우울증의 발병빈도도 남성보다는 여성에서 높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적어도 암 경험자의 환경에서 남성의 정서적 어려움에 대한 정도가 상당히 과소평가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여성보다 남성에서 암으로 인한 정서적인 어려움을 표현하는데 사회적인 장벽이 있어서 주변에서 이를 알아채기 어렵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남성이 그런 표현을 그래도 수월하게 할 수 있는 환경에서는 암으로 인한 정서적 어려움이 여성보다 남성에서 더 심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죠. 결국 남성암은 우리가 간과하고 있을 뿐 그 안에서도 여러 불안과 우울, 염려, 적응의 어려움이 크다는 의미입니다. 남성암의 비애는 간과되어 소외된 괴로움이기도 하고 실제적인 정서적 괴로움이기도 한 셈입니다.
물론 남성암에서의 여러 정보가 부족하다 보니 정리해서 글을 쓰기도 어렵습니다. 게다가 남성암은 다른 어떤 집단보다 사회문화적 영향에 따른 차이도 큽니다. 그만큼 가부장적인 환경에서는 파악도 어렵고 도움을 주기도 어려울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대가 달라지면 바뀌는 부분도 있겠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만큼 남성은 눈물을 보여서도 힘든 티를 내도 안된다는 정서가 아직까지 강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연처럼 확연히 정서적으로 힘들어하는 누군가의 남편과 누군가의 아버지를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환경을 고려한다면 남성의 경우, 가까운 사람이나 비슷한 상황의 누군가와 정서적인 교류를 하면서 속 마음을 털어놓고 해소하기보다는 해당 분야의 권위 있는 전문가에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내가 강한 척을 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도움을 구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 보니 의료진도 최신 의학지식이 많은 젊은 의사보다는 경험 많고 나이도 있는 의사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특히 정신종양학의 영역에서는 더욱 그런 특징이 도드라집니다. 그런데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전문가를 원하지만 동시에 무시당하는 건 싫습니다. 내가 존중할 수 있으면서 나를 존중해 주기를 원하죠. 그렇다 보니 합이 맞는 전문가를 찾기도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마음이 맞지 않으면 어느새 '그 의사 만나봐도 아무짝에 도움도 안 되더라'라고 하며 거부하니까요. 결국 이 부분은 저희 같은 의료진이 남성암을 경험하신 분들의 특성을 잘 이해하면서 일정 부분 조심그럽게 그러면서 실질적인 도움을 드릴 수 있게 다가가는 수 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취미활동을 주축으로 하는 지지모임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다른 집단에 비해 남성암에서는 지지모임이 무척 어렵습니다. 쑥스럽기도 하고 나가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난감해합니다. 한편으로는 암에 대한 정보 교류나 정서적 지지보다는 암 경험자라도 할 수 있는 가벼운 등산모임이나 당구모임, 탁구모임, 독서모임, 외국어모임 등을 표면적으로 가지는 게 현실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 활동을 통해 가까워지다 보면 마음을 나누고 서로 지지하는 게 일정 부분 가능해집니다. 실제적인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내용을 채우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남성암을 경험하시는 분들께는 참여하실 수 있는 명분과 환경을 만드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지금의 아버지 세대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사회가 지금까지 발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추축이 되셨던 세대가 아버지 세대이기 때문이죠. 어느 세대보다 열심히 일하고 시대적인 부침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가장 외로운 아버지 세대가 지금의 아버지 세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 세대가 정서적으로 의미와 가치를 확인해 가는 과정도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암은 우리 삶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나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의미로 살아가야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순간 우리 시대의 중년 남성은 암으로 인해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이 생겼을 때 혼자 그 답을 찾기 어렵기에 정서적으로 더 어려운지도 모릅니다. 실제로는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변의 가족이 남편의, 아버지의 그간 삶의 과정을 되돌아보며 삶에서의 성과와 가치를 확인하고 그런 의미가 지금도 지속되고 있음 확인하는 과정도 필요하겠습니다.
Zakowski SG, Harris C, Krueger N, Laubmeier KK, Garrett S, Flanigan R, Johnson P. Social barriers to emotional expression and their relations to distress in male and female cancer patients. Br J Health Psychol. 2003 Sep;8(Pt 3):271-86. doi: 10.1348/135910703322370851. PMID: 14606973.
https://pubmed.ncbi.nlm.nih.gov/14606973/
Pudrovska T. Why is Cancer More Depressing for Men than Women among Older White Adults? Soc Forces. 2010 Dec;89(2):535-558. doi: 10.1353/sof.2010.0102. PMID: 25187671; PMCID: PMC4150351.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4150351/
남편, 아버지, 아들... 남자로서 암 경험
https://www.youtube.com/live/h60fmg4gyHU?feature=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