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존재한 이래인간의 모든 신들이 수 없이 죽어도 천국은 언제나 살아남았다. 계속해서 새로운 신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천국의 미카엘.
20.
육십 대 중반의 여자와 삼십 대 후반의 여자가 카페 창가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둘이 나란히 앉아 앞자리를 비워 놓은 것으로 보아 그 누군가와는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만약 가까운 관계라면 옆 자리를 비워 놓았을 것이다. 핏줄로 따지자면, 그 누군가는 한 사람에게 딸이고, 한 사람에게는 언니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들 혈족 간의 거리는 너무 멀다. 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랬다.
어미는 뱃속에 아이가 들어섰을 때부터 이상한 생명체가 자신의 뱃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느꼈던 기쁨과 달랐다. 끔찍한 악몽을 수시로 꿨다. 믿음이 강한 어미는 제발 그런 무서운 꿈은 꾸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전지전능한 신은 항상 그렇듯 저 높은 곳에서 듣고만 있었다. 사실 신은 창조물들의 고통을 해결해 줄 필요가 없다. 좋든 나쁘든 그 어떤 결과에 이르던, 영광을 돌리고 감사를 바칠 테니까 말이다. 기도라는 것은 원래 세속적인 소원을 들어달라는 징징거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어미의 기도는 이어졌고 악몽 또한 계속됐다.
빽빽하게 치솟은 거대한 나무와굵은 넝쿨로 둘러싸인 호숫가에 있는 꿈이었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짙게 그늘졌고, 검은빛을 띠는 투명한 수면은 잔물결조차 없었고, 숲은 나뭇잎새 하나 흔들리 않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동면에 빠진 듯 그대로 멈춰있었다. 마치 그림 속에 들어온 듯했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숲 속 어딘가에 이질적이고 낯선 끔찍한 존재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간간히 아픈 여자가 내는 신음처럼 미약한 소리가 났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랫배에 위치한 자궁에서 내는 소리가 척추 신경을 타고 올리와 뇌에서 울렸다.
'바람이 불어와야 해...'
적막을 깨뜨리지 않고 들려오는 소리에 등골이 찌릿해지며 소름 돋았다. 너무나 무서워 한쪽 손으로 배를 누르고 다른 손으로는 옆에 있은 교회 목사의 팔에 매달리듯 꽉 움켜잡았다. 들키면 안 될 관계가 돼버린 그 목사는 신의 은총이란 은총은 모조리 받아낸 남자였다. 시아버지와 함께 건축 공구상을 하는 남편과 대비되는 남자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어느새 남편이 등장해 솟구치는 분노를 주체 못 하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몹시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신경이 날카로워져 허구한 날 부부싸움을 했다. 그러나 주말 교회에 나갈 때면 보통의 행복한 부부처럼 보였다.
'어머나, 벌써 배가 많이 불렀네요.'
'출산일은 언제예요?'
어미는 축복의 인사를 받으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배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때가 되어 태어난 아기는 예상했던 대로 정말 이상했다. 햇볕에 약간 그을린 듯한 피부에 붉은 기가 감도는 풍성한 머리칼을 한 여자 아기에게서 이상한 향기가 났다. 향기를 맡으면 그 소름 끼치던 무서운 꿈이 저절로 떠올랐다. 특히 유난히 푸르스름한 흰자위에 일렁이는 새까만 눈동자는 더더욱 기묘했다. 어미가 감추고 있는 부끄러움이 뭔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투명한 눈빛이었다. 아이가 커가면서 피부색은 옅어지고, 붉은 머리칼은 검게 변하고, 향기도 사라졌다. 평범한 한국인 핏줄 여자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잊히지 않았다. 여전히 마주치기 힘들었다. 아버지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본능은 아이를 불길하게 여겼고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교회의 힘을 빌어 두려움을 물리치려고 노력했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아이는 교회만 데려가면 숨이 넘어갈 듯 자지러졌다. 이러한 경우에 어떤 사람들은 절이나 점집을 찾아가기도 한다. 세상에 진실처럼 소름 끼치는것도 없다.
그녀는생물학적 가족과 한 공간에서 지냈지만 늘 혼자였다. 무리에 끼지 못한 미운 오리 새끼처럼겉돌았다. 부모는 그녀의 흠집에만 집중했고 매사에 비판적이었다. 형제들에겐 감정 배출구에 불과했다. 특히 연년생으로 태어난 여동생은 그녀를 심하게 쪼아댔다. 맹금류 둥지에서 잘 먹고 잘 자란 새끼가 나약한 형제를 둥지에서 밀어내듯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괴롭힘에 지쳐버린 나약한 형제가 스스로 포기하고 둥지에서 떨어져 나가야 직성이 풀린다. 그녀는 자신의 불길한 종족들처럼 질식할 것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그녀를 부당하게 취급했다는 것이 큰 죄악이라 여겼으나. 겉으론 아무 일 없다는 듯 태현 했다. 하지만 어디 속마음까지 그럴까. 항상마음속에서는죄의식이 꿈틀거렸다. 교회에 나가 뭉뚱그려 자신도 모르게 저지른 죄를 사하여 달라고기도해도 소용없었다. 결국 그녀를 원인 제공자로 만드는 편이 쉬웠다. 네가 아무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랬기에 그랬다는 기괴한 방식이다.암묵적으로 합의된 공동범죄의 장점은 죄의식이 1/n로 쪼개져 먼지처럼 흩어지는 데 있다. 이곳 행성의 인간과 짐승의 경계는 모호하다.
유년기에 정서적 학대를 받은 사람은, 뇌가 조끄라들어 지능이 낮다. 성인이 돼서도 조울증, 대인기피, 인지장애등 다양한 정신병을 앓는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영혼이 있었다. 사람들이 흔히 떠들어대는 그 영혼이고, 그녀의 가족들이 본능적으로 느꼈던 두려움의 원천다. 브리지트의 영혼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다른 형제들에 비해 한참 모자라 보였으나 그녀의 정신과 육체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단지 드러나지 않았을 뿐 오히려 뛰어났다. 언젠가 그녀의 빛나는 영혼이 드러날 때 세상은 파멸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이혼이란 결혼만큼이나 난리법석을 떨어야 할 중대한 사건이다. 보험 설계사인 여동생은 그녀가 가입한 보험을 전부 해약한 사실을 알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했으나 신호음만 울렸다. 문자를 남겨도 답이 없었다. 대신 형부인 태형과 통화하고서야 알았다.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어떤 남자에게 미쳐 가정을 파탄내고 안정된 직장까지 그만뒀다고 한다. 그 남자는 월세 내기도 빠듯해 보이는 작은 꽃가게를 했고, 낡은 승합차를 타고, 다 큰 여자 조카와 전셋집에서 살고 있다. 두 사람은 전부터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 여기까지는 여동생이 그녀의 전 남편 태형으로부터 전해 들은 내용이다. 태형은 평소 부드럽고 차분한 성격을 가진 사람 답지 않게 뱉어냈다. 그를 감싸고 있던 고상한 겉포장이 뜯긴 거친 상태였다. 하지만 하찮은 남자라는 것에는 동의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사회가 원하는 규칙에 딱 맞는 단정한 여자였다. 안정된 직장인 공립학교 교사였고, 남편과도 잘 지냈다. 얼마 전에는 넓은 평수의 신축 아파트에 입주해 부러움을 샀다. 부족함이 없는 이상적인 삶이었다. 물론 남들 보기에 그랬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 그녀로부터 짧은 문자가 왔다. 가끔 보험을 가입할 때 만난 그 카페에서 보자고 했다. 그녀의 여동생과 어머니는 먼저 도착해서 기다렸다. 두 모녀는 그녀의 뻔한 미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결국 남자에게 버림받고 가진돈 다 잃은 비참한 여자가 되어 부모 형제를 찾을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주변에 소문이라도 나면 어쩔까 싶었다. 그들의 관계는 가깝지 않았으나 '우리 사위가 본사 팀장으로 진급했어, 이번에 넓은 평수의 새 아파트를 샀어, 연봉이 얼마야.'라며 은근히 자랑했다. 여동생은 달랐다. 어려서부터 연년생 못난 언니에게 이상할 정도로 질투심이 들었다. 자신에게 없는 중요한 뭔가를 가진 느낌이 극단적인 질투심으로 표출됐다. 이후에도 그녀는 금융계에서 잘 나가는 남자를 만났다. 모든 면에서 그녀의 삶은 품격 있어 보였다. 보험을 가입해 달라고 할 때마다 열등감을 억지로 삼켜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이제 그녀의 멍청한 선택으로 인해 자신보다 못한 여자가 될 것이라 여겼다.
여동생은 어머니가 창밖을 바라보며 왠지 불안해하는 거었다는 생각에 시선을 따라갔다. 창밖에는 한 젊은 여자가 카페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헐렁한 검은색 원피스 안에 대리석처럼 매끈한몸매를 숨긴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원피스 자락이 펄럭이고 붉은 머리칼이 나풀거렸다. 이상하게도 그녀만 빼고 주변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춰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유일하게 그녀만 살아 숨 쉬는 느낌.
그녀가 카페로 들어오자 독특한 페르몬 향기가 빠르게 퍼졌다. 어미는 오래전에 맡았던 그 냄새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카페 안에 사람들은 처음 맡아보는 페르몬 향에 이끌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녀가 카운터와 연결된 진열장 앞에 멈췄다. 검정 선글라스로 가려져 있었으나 그녀가 진열장안에 삼각 케이크 조각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다고 남자 직원은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어미의 불안한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붙잡혀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의 새빨간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엇을 먹을지 결정한 듯 보였다.
"스트로 베리 프라테와 바닐라 밀크티 한 잔 주세요."
남자 직원은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로 인해 '키오스크에서 주문해 주세요.'라는 카페 규정을 순간 잊어버렸다. "영수증 들릴까요? 주차는 하셨나요? '포인트 적립하나요?" 그녀는 몇 가지 간단한 심문을 받는 내내 "아니요"라고 짧게대답했다. 그리고는 어깨에 맨 검은색 가방을 뒤적거려 카드를 꺼내 단말기에 꼽았다.
잠시 후 직원이 쟁반에 올려주자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는 테이블로 쪽으로 걸어갔다.
"잘 지내셨어요?"
그녀가 쭉 다가와 허리를 숙여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고 앉으며 말했다. 두 모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두 모녀가 몰라보자 그녀가 손을 올려 선글라스를 벋었다. 잠시 방황하던 생각들이 한 곳으로 모이자 어머니와 여동생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맙소사, 오, 하나님. 기껏해야 이십 대 후반쯤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이 여자는 자신의 큰 딸이자 언니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녀의 아기적에 기묘한 눈빛, 까무잡잡한 피부, 붉은 머리칼, 향기가 머릿속을 강타하 듯 떠올랐다. 더불어 꽁꽁 감춰둔 부끄러움들이 한 번에 폭발했다. 치밀어 오르는 수치감으로 인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기묘한 눈빛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격렬한 반응에 그녀는 상황을 짐작하고 선글라스를 들어 눈을 다시 가렸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어머니의 이상반응과 달리 전혀 가치 없는 것을 탐닉하고 있었다. 카린이 사준 원피스를 입고 그의 카드로 지불한 4,500원짜리 달콤한 딸기 프라테 조각 케이크를 맛보는 커다란 즐거움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 우리라는 공동의 돈으로 소비할 수 있는화려한 사치다.
혜림에서 브리지트로 돌아온 그녀는 불길한 자신의 종족인 헬렌, 마날, 레오가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은 것처럼 편안했다. 지난 과거에 억메어 현재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짓이다.그녀에게 과거란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이는 그저그런 광경에 불과했다. 그녀가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은 꼭 처리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뭐 하는 사람이냐?"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어머니가 물었다.
"다 알고 오지 않았나요? 꽃 가게를... 아, 지금은 문 닫고, 다 큰 조카와 살고, 하여간 썩 괜찮은 남자죠."
"어쩌다 그런 놈에게 빠져 가정을 박살 냈니. 남보기 부끄럽지도 않니? 남들이 뭐라 하겠니?"
"그게 부끄러워할 일인가요?"
"성형했니?"
"아뇨."
"사업한다고 돈을 달라고 하지 않던?"
'무슨 대화가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감출게 많은 사람일수록 엄격한 도덕률을 바닥에 깔고 말한다.그래야만 상대방이 움추러들어 본인들의 부끄러움을 들춰내지 않을 테니까. 이러한 행동은 짐승들이 몸집을 크게 부풀리거나 울부짖는 것처럼 일종의 방어적 허세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아름답고 부정한 여자는 몹시 뻔뻔했다. 듣는 둥 마는 둥 가볍게 대꾸했다.
여동생은 어머니가 던져대는 돌멩이를 막아내기보다 삼각 케이크를 먹는데 집중하는 그녀를 바라봤다. 접시에 올려진 케이크가 조금씩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가 줄어들더니 사라졌다. 새빨간 입술에 묻는 하얀 크림이 아까운 듯 혀를 내밀어 살짝 훔치고 밀크티를 마시고 티슈로 마무리했다. 그리고는 가방을 뒤적거려 뭔가 꺼내더니 테이블 위로 밀었다.
"비밀번호는 통장에 적혀있고, 도장과 신분증도 있어요."
어머니 그녀가 내민 통장을 펴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긴엔 숫자가 나열 돠 있었다. 그녀가 이혼 재산분할로 받는 금액과 퇴직금을 전부 합친 숫자였다.
"뭐 하는 사람이냐?"
어머니가 다급하게 물었다.
"좀 전에 말했잖아요."
언어란 참 이상하다. 똑같은 질문도 원하는 답이 다르다. 앞 전엔 그 남자가 별 볼 일 없는 남자라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면, 방금 질문은 대단한 뒷 배경을 묻는 것이다. 숫자는 정말이지 위대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물질의 량을 가늠하는 숫자였다. 별 볼 일 없는 사람도 단번에 유능한 존재로 바꿔놓는다. 하지만 물질의 량으로 인간의 등급을 매기는 기괴한 세상 사람들에게는 정당한편견이기도 하다.
통장에 적힌 426,321,510이란 숫자를 바라보는 두 모녀의 표정은신을 영접이라도 한 듯 놀라움과 경건함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녀가 보기엔 지금 이들의 머릿속은 썩은 사체의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파리떼처럼 수많은 생각들로윙윙거릴 뿐이었다. 파리떼가 사체 속에 알을 깐다. 곧이어 눈이 없어 보지 못하고, 귀가 없어 듣지 못하는 작은 것들이 바글바글 깨어나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일용할 양식이 떨어지면 극심한 허기와 불안감에 시달린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면 서로를 물어뜯기 시작한다. 절대 끊어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한 관계조차 허망하게 무너진다. 신종 미약보다 강한 중독성을 가진 이 역겨운 음식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을뿐더러 포만감조차 느낄 수 없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둘이 함께 교회에 나와라! 사랑이 충만하신 그분께서 너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영혼을 구원해 주시고, 천국으로 데려가 주실 것이다."
"그래 언니, 우리 함께 교회에 나가자."
한동안 숫자에 빠져있던 어머니가 말하자 여동생이 거들었다.
'이들은 미쳤다.'
영혼을 되찾은 그녀는 완전히 다른 종족의 관점에서 바라봤다.
이들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구전 동화 같은 이야기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본인들 스스로 종이 됐으니 천국으로 데려가 달라는 집단 망상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났을까?. '그 희망을 버리세요. 영혼이 없는 당신들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라고 말했나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매정한 사실을 알려준다 한들 믿지 않을 것이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처럼 그에 따른 기괴한 상상력도 허용돼야 한다.
하지만 이들이 원하는 진정한 목적은 본신들의 죄의식을 없애 줄 잔인한 화해였다. 신을 믿는 자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용서를 받아왔다. 십자군이 이교도에게 그랬고, 청교도가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그랬다. 이렇듯 본인들에게 유리한 화해 방식은 힘 있는 가해자가 약자인 피해자에게 가하는 손쉬운 해결방식으로 널리 쓰여왔다. 과거는 덮어두고 학대하던 부모와 따돌림시키던 형제와 함께 교회에 나와 절절히 기도하는 모습. 모든 것을 용서하고 하나가 된 거룩한 가족. 경제력을 쥐고 있는 폭력적 성향의 남자가 부부싸움 후 아내에게 화해의 섹스를 요구하고, 학대를 일삼던 부모가 자식에게 맛있는 요리를 해주고, 따돌림시키던 형제가 다정한 말을 건넨다. 그들은 거실에 한가운데 걸려있는 화목한 가족사진처럼 외형적 평화에 집착한다. 일가친척이 다들 모이는 명절, 매주 나가는 교회, 매일 출근하는 직장도 다르지 않다. 이 세상에서 용서와 화해란 약하고 외로운 사람들이 마지못해 선택하는 비참한 결정이다. 그러나 외롭지 않은 사람에겐 통하지 않는다.
이천 년 전 십자가에 매달린 그 남자가 일으킨 기적은 물 위를 걷고, 빵과 생선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의 마지막 말 '저들은 자신들의 죄를 모르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이 한마디에 인류는열광했다. 같은 종족 간의 살육도 서슴지 않았다. 그 피비린내 나는 광기는 DNA에 각인되어 대대로 이어졌다. 작은 숫자라도 얻을 수 있다면 짐승을 자신들의 대표로 뽑는데 망설이지 않는다.
그녀는 짜증스러울 정도로 귀찮게 달라붙는 숫자를 이렇게 털어버렸다. 혜림이란 나약한 여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녀의 모든 인간관계도 사라질 것이다. 이제 그만 끝낼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브리지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즐거웠다. 카린이 저녁에 김치찌개를 해준다고 했다. 로운과 수다를 떨며 오늘 본 사람들의 기괴한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밤이 되면 그와 함께 잠이 들것이다. 마음속에 생겨난 미소가 그녀의 까무잡잡한 얼굴을 비집고 나왔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