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 Dec 20. 2020

뜨겁게 나이 들어가는 사람의 비밀




"**은 그때보다 지금이 정말 아름다워."

"어...? 나는 그때가 더 예뻤다 생각했는데..."


젊은 연인 간의 대화가 아니다. 얼마 전, 그와 동갑인 64년생 그녀와의 대화다. 아름답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중년 남자나 듣는 여자나 참 이상한 관계다. 둘은 14년 전, 농부와 산골 보건소장으로 만났다. 그녀는 30대 후반에 사별하고 어린아이를 돌보며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당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간호사가 되는 것뿐이었다. 그가 아내와 어린 두 남매를 데리고 산골로 들어왔을 때, 그녀도 그 지역으로 발령받았다. 며칠 간격으로 한마을에 살게 됐다. 세련미 풍기는 여자가 산골 보건소에 붙어 있는 사택에서 지내야 했다. 다음에 일어날 상황은 불 보듯 뻔했다.


 

인성이 사라지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으로 불린다. 수컷들은 오로지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온종일 보건소 앞마당에서 소주 마시며 진 치고 있는 수컷, 사무실과 연결된 사택 거실문을 벌컥 열고 고백하는 수컷, 혼자 살면 욕정은 어떻게 해결하냐고 파렴치한 걱정을 해주는 공무원 수컷 등 종류와 직업도 다양했다. 과부도 선호하는 타입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어디 짐승들뿐일까. 같은 여자도 마찬가지다. 사무실에 남자만 잠깐 머물러도 이야기가 꾸며져 퍼져나갔다. 억울해도 맞대응은커녕 악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어렵게 구한 자리였다. 그릇 된 남성주의 사회에선 성별에 따라 가치가 다르다. 남자는 그럴 수 있고 여자는 행실이 바라야 한다. 그런데도 끈적하게 치근덕거리는 수컷들과 꾸며대는 여자들에게 친절히 응대해야 했다. 짐승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엉뚱한 민원이라도 넣는다면 인사평가 감점 요인으로 작용한다. 실제 그런 경우도 있었다. 요즘처럼 미투 운동이라도 있었다면 좀 나았으려나.



그래도 그녀에겐 믿고 의지할 친구가 하나 있었다. 커다란 덩치에 새까만 얼굴, 이마에 불거진 상처, 어깨까지 내려온 치렁치렁 헝클어진 머리, 까칠한 수염을 한 불한당 같은 사내다. 사람들은 그가 아내가 함께 다니면 '미녀와 야수'라 했다. 그는 타인의 시선엔 관심 없었다. 나이 지긋한 수컷들과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꾸며내는 여자들도 그의 앞에선 얌전해야 했다. 욕설은 하지 않지만 돌려 말하지도 않았다. 본인들 맘속에 품고 있는 야릇한 욕망을 콕 집어내는 듯 노골적으로 말했다. 아니, 무심하고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말투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타인이 자신의 추잡한 맘을 속속들이 파헤쳐 본다는 것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일이다. 서둘러 바쁜 척하며 자리를 피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 방법이다. 사람들은, 젊은 놈이 예의 없다는 핑계를 만들었으나 내색하지 못했고, 그는 사람들 속에서 여유로웠다. 착한 척도, 잘 보이려고도, 자신이 정의롭다는 착각도 하지 않았다. 그때 그의 나이 40대 중반이었다.



처음엔 그녀도 그의 거침없는 말투와 외모로 인해 적응하기 힘들었다. 세상에, 저렇게 생긴 대로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시간이 지나며, 비밀의 문을 하나씩 열어보듯 그에 대해 조금씩 알아갔다.


첫 번째 비밀은, 그는 겉모습과 달리 의외로 다정하다는 것이다. 옆에 누가 있던 없든 자신의 가족에게  '아름답다' '사랑한다' '예쁘다' '멋지다' 등을 아무렇지 않게 썼다. 아내에게 꼼짝 못 했고 딸에게는 천생 바보처럼 절절맸다. 게다가 장난기도 많고 유머스러웠다.


두 번째 비밀은, 가족과 그녀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성적 농담을 하며 웃고 떠드는 외설적 남성주의 문화, 줄곧 부동산 이야기만 하는 천박한 자본주의 문화 그리고 대학만 중요한 것처럼 떠드는 교육문화를 혐오했다. 하긴, 그 세 가지 주제를 빼고 나면 사람과 만날 일도 없다.


세 번째 비밀은, 대나무 숲 같은 사람이었다. 형제들에게조차 못하는 속 이야기를 그에게 하기 시작했다. 그는 관습적 도덕률에 얽매이거나 대충 얼버무리지 않았다. 쉽고 단순 명쾌했으나 감히 시도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주변과 부모·형제 눈치 보지 말고 욕을 먹더라도 본인 행복을 위해서 살라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입장에서 말해주는 사람 앞에서 그녀는 많이 울었다. 그때 그의 나이 50대 초반이었다.



그리고 아직 열어보지 못한 비밀의 문이 또 있었다. 알면 알수록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오래도록 마주하다 보니 서로 편안하게 이야기할 상대가 됐다. 대화 중에 '별' '해' '바다' '바람' 등 너무 유치해서 나이 들어가며 잊힌 단어가 자연스럽게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네 번째 비밀이었다. 거칠고 단단한 마음을 가졌다고 여겼는데 의외로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별은 무심하고,

태양은 뜨겁고,

바다는 깊고 거칠고,

바람은 잡히지 않는다.


욕심은 왜 그리 많은지, 그 모든 것들로 자신의 영혼을 채우려 했다. 그녀가 그동안 그의 눈빛에서 느낀 이성으로서의 무심함, 아닌 것에 대한 거칠고 뜨거운 반응, 머무르지 않으려는 몸짓의 이유였다. 그 후로 그녀는 맘에 드는 시를 그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그때 그의 나이 50대 중반이었다.



시간은 원치 않아도 흐른다. 그녀는 이대로 나이 들어가는 것이 허무했다. 가끔 자신의 심정을 비출 때면, 그는 "나이 든다는 것은 꽤 멋진 일이고, 진정한 아름다움은 머리칼이 회색으로 물들 때 나와"라고 꼭 글 쓰는 작가처럼 말했다. 얼굴에 주름 가고 여자의 상징인 생리도 끝날 텐데, 뭐가 아름답다는 것인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위로의 언어라 여겼다. 시간은 더 흘렀다. 그녀의 아이도 그의 아이들도 불쑥 커서 도시로 나갔다. 이제 부모의 역할은 제한적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만 봐야 한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세간살이를 버리고 나눠주더니 작은 농막을 짓고 거처를 옮겼다. 그의 아내는 아이들을 따라 서울 집으로 갔다. 그녀도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았다. 한동안 찾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 고물 화물차가 아닌 낯선 승용차가 보건소 앞마당에 멈췄다. 그녀는 창을 통해 바라보다 흠칫 놀랐다. 저 사람이 그 사람인가 하며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치렁치렁 헝클어진 머리는 싹둑 자르고, 깔끔하게 면도를 하고, 진 바지에 하늘색 남방을 입었다. 언제나 낡고 엉덩이 부분이 헤져 팬티가 살짝 보이는 작업복 바지에 장화를 신은 모습만 봤다. 무척 낯설면서도 어울리고 심플해 보였다. 그날, 그는 다섯 번째 비밀을 말해주었다. 천연덕스럽게, 앞으로 글을 쓰며 지낼 거라고 했다.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 그의 나이 56세 때 일이다.



그는 서울 집과 산골을 오가며 지낸다. 코로나로 인해 근 일 년 동안 그녀가 근무하는 보건소에 들르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떠올렸다. 그는 연애 방해꾼이었다. 소개팅을 받고 만날 때마다 저절로 그와 비교됐다. 다들 지적으로 행동하고 매너 있게 보이려고 했다. 멋진 곳에서 식사하고 차를 마셨다. 하지만 허름한 거친 농부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식사한 것은 단 한 번, 그것도 읍내에서 동료와 함께 짜장면 한 그릇 먹은 것이 전부였다. 교수, CEO, 고위 공무원들도 그처럼 영혼이 또렷하지 않았다. 거기다 대놓고 별이 어쩌니 시가 어쩌니 할 분위기도 아니었다. 흡사 대충 뭉그적거리며 살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우연히 한 사람을 만났다. 해외에서 봉사활동으로 세월을 보낸 사람이다. 가진 것은 없으나 영혼이 또렷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아이도 그 사람을 좋아했다. 사람은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는다. 14년 전, 그 친구와 인연이 닿지 않았다면 그런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어쩜, 그것이 그녀가 열어 볼 수 있는 그의 마지막 비밀의 문일 수도 있다.



얼마 전, 그가 왔다. 그녀의 폰에 저장된 그 사람의 사진을 보고 엄청 웃었다. 사진 속의 인물은 까칠한 턱수염에 머리가 치렁치렁했다. 그가 말했다.


"**은 그때보다 지금이 정말 아름다워."


그땐 그 의미를 잘 몰랐다. 퇴직도 몇 년 남겨두지 않아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사회에서 만났던 주변 사람들도 알아서 멀어졌다. 돌이켜보면, 자기 계발한다고 인문학을 배우고, 책을 읽고, 헬스를 다니고, 골프를 치면서 그에게 했던 말들은 모두가 거품이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머리칼이 회색으로 물들 때 나온다는 의미를 지금에야 알았다. 그녀가 물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옆에 있어 줄 거지?" 그는 그런다고 했다.



인간은 두 부류만 있을 뿐이다. 늙어 가는 자와 나이 들어가는 자다. 그는 버둥거리며 늙어가기보다 뜨겁게 나이 들어가는 것을 선택했다. 나이 듦이란 영혼을 키우고 인간화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혼이 오그라들다 못해 사라져 버리면, 데려갈 영혼이 없는데 천국은 고사하고 지옥인들 갈까 싶다. 




타이틀 이미지/ 프랑스 화가 프라노이즈 닐리(Franoise Nielly)는 팔레트 나이프를 사용하여 색상이 튀어나오는 거친 초상화를 만든다. 또한 거친 스트로크의 원시성은 각각의 조각처럼 열정적인 에로티시즘을 표현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