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L이라고 모르세요? 옛날부터 혁명 노선으로 유명한데, 지금까지 학생 운동으로 이어지는"
뭐라고?? 난 내 귀를 의심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내가 뉴욕주립대에서 포스터를 보고 찾아간 미국 민주당 동아리의 첫 개강 모임은 '피자 파티'였다. 그날은 한 학기 동안 대충 어떤 활동들을 하는지만 설명한 후 그 어떤 정치적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로 소개하고 인사하며 "넌 전공이 뭐니," "넌 어떻게 여기 왔니," 그냥 수다 떨고, 피자 먹고, 친구 사귀고 왔다.
이 사람들은 정당이 정치적 모임이기 이전에 모임이고, 모임의 기본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모임의 기본은 다름 아닌 '서로 친해지는 것'이다.
처음 본 사람에게 난데없이 자신을 'NL'로 소개하는 정당과 처음 온 신입생들을 피자 파티로 맞이 하는 정당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나는 그때 그 청년 당원과 이야기하고, 뉴욕주립대 민주당 동아리 첫 모임을 보며 왜 대한민국에서 진보가 표를 받지 못하는지 이해가 될 듯했다.
진보의 '운동권 문화' 극복하기
대한민국에선 정치인이 어떻게 길러지는가?
대한민국 정치가 왜 아직도 제 사명을 다한 운동권 문화를 버리지 못하는지를 알기 위해선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에선 어떻게 정치인이 길러지는가? 답은, '길러지지 않는다'이다. 우리나라에는 정치를 직업으로 삼고 싶어 하는 청년들이 정치에 정상적으로 입문할 수 있는 루트가 없다. 그래서 어디를 가냐고? '운동권'이 된다.
서울대에도 "사회변혁노동자당(PD 계열)," "6.15 학생위원회(NL 계열)," "맑음(맑스의 물음, 맑스주의 동아리)" 등 수많은 운동권 모임들이 존재한다. 이름과 양상은 다르지만 다른 대학들도 마찬가지다. 이 운동권 모임을 통해 총학생회를 잡고, 총학생회 경력으로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스카웃되는 것이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정치인이 되는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각각 서울대 사회변혁노동자당, 맑음, 6.15 연석회의의 대자보
그런데, 더 이상 운동권은 보통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 운동권이 총학을 잡아서 정치권에 스카웃이 되네 뭐네도 다 옛날이야기다. 왜냐고? 애초에 운동권이 총학을 잡질 못하니까. 오히려 운동권을 비판하는 일명 '비권' 후보들이 2000년대부터 다수 당선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럴 것이 독재가 끝난 지금의 대한민국에선 민주주의가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다. 사회주의든 뭐든 그 철학과 이념에 자신이 있으면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아서 하면 된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혁명 운운하고, 운동권 놀이를 할 이유가 없다. 21세기에 무슨 NL이며, PD... 대한민국 보통 청년 중에 NL의 뜻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이야기들은 21세기인 지금, 보통 사람들의 삶과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다(나 또한 이후 운동권의 역사에 대해 열심히 공부해보았지만 여기에 그것들을 설명할 가치를 딱히 느끼지 못한다. 궁금하다면 나무위키를 찾아보시길 ㅎㅎ).
그래도 여기까진 괜찮다. 운동권은 충분히 보통의 눈높이에서 벗어나 급진적일 수 있고, 또 어떻게 보면 그래야 한다. 사회 운동의 목표는 목소리를 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외치는 그 자체에 있으니까.
하지만 진짜 문제는 사회 운동을 목적으로 들어갔든 정치 입문을 목적으로 들어갔든, 운동권에서 정치를 배운 사람들이 그들의 문화를 '정당'에 그대로 들여오면서부터 발생한다.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시작부터 평범한 사람들과 한참 동떨어진 문화에 배어있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평범한 시민들은 정당 활동에 참여하기 꺼려지는 정당 문화가 만들어지고, 운동권 출신들이나 옛날이야기하고 자기들끼리 PD니 NL이니 하며 자기들끼리만 재밌는 정치를 하는 것이다.
정당은 절대 운동권 같아서는 안된다. 사회 운동이 특정 이슈에서 다수의 공감을 얻는 데 성공한다면, 정당은 그 안건을 받아서 실천한다. 그게 사회 운동과 정당의 관계다. 하지만 정당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집권하는 것이다. 사람들과 함께 하는 방식에 있어서 정당은 엄연히 운동권과 달라야 한다. 같은 말을 해도 보통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해야 하고, 보통 사람들이 언제든 함께할 수 있는 문화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민주당은 최근까지만 해도 운동권 문화의 끝판왕이었지만 굉장히 많이 극복하고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있는 중이다. 정의당 역시 그 뒤를 따라가고 있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 사실, 내가 정의당 서울대 '동아리'를 만든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학생위원회나 당원 모임이 아닌 '동아리.' 기존의 운동권 모임들을 극복하고, 21세기에 평범한 보통 청년들의 눈높이에 맞는, 정의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NL, PD 이런 거 몰라도 아무나 올 수 있는 그런 정치 모임을 만들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는 정치 토론보다 같이 만나서 밥 먹기를 더 즐겨했고, 파티룸을 빌려 같이 놀기도 했다. 왜? 정치 모임이라고 맨날 발제문이나 써오고, 토론만 할 필요는 없잖아?
공연 보고, 놀면서 실시한 [정의당 서울대 동아리] 개강 모임
보수의 문제는 '6-70대, 보수 기독교 문화'
보수는 운동권 문화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 애초에 운동권 출신들이 많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수 역시 똑같은 맥락의 문제가 있다. 바로 '60대 이상 연령층이 지배하는 문화'와 '보수 기독교 문화'다. 난 자유한국당이 보수 청년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건 박근혜 탄핵보다도 그들이 가진 문화가 더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련된 정치/정당 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은 보수와 진보 모두에서 일어나고 있다.
보수든 진보든 정치는 보통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이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면 보통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운동권들의 "라때는 말이야" 모임이 아니라, 비슷한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의 재밌는 만남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온다. 그리고 그 사람들과 함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