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쟁취 과정에서 일어나는 왜곡 현상
정치는 내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모이고, 그 힘으로 권력을 쟁취하고, 그 권력을 통해 합법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 영향력을 발휘하여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왜곡이 생긴다면? 우리가 던진 표가 그 만큼 반영되지 않는다면? 이건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이런 일이 아주 오랫동안 대한민국에서 일어나왔다.
민주화 이후 우리나라 표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한 가지 단어를 꼽으라면 누구든 '지역주의'라고 말할 것이다. 경상도에서는 한나라당, 전라도에서는 민주당은 아직까지도 쉽게 깨지지 않는 공식이다. 저 반쪽짜리 지도를 보고 있으면 참, 한숨이 나온다. 왜 부산 사람들은 생각도 없이 맨날 자유한국당만 뽑고, 전라도 사람들은 덮어놓고 민주당만 뽑는지. 도대체 그 오랜 세월 동안 뭘 배웠나 싶다. 그런데 만약 이런 우리의 생각이 사실이 아니라면???
2012년 부산에선 18명의 국회의원이 당선되었다. 그중 16명은 새누리당이었고, 민주통합당은 2명 뿐이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지."
민주당의 완패다. 2016년에도 부산에선 18명의 국회의원이 당선되었다. 이 중 새누리당은 13명(무소속으로 당선된 후 새누리당으로 들어간 장제원 포함), 더불어민주당은 5명이었다. "오, 조금 늘었군." 시간이 갈수록 지역주의가 깨지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 결과를 보고 "아직까지도 부산 사람들은 대부분 새누리당을 뽑는군"하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에 투표한 부산 시민은 49.88%(783,326명, 유효 투표수 기준)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50.12%는 새누리당이 아닌 다른 당에 투표했다. 그중 민주당에 투표한 사람이 39.28%(616,785명, 유효 투표수 기준)나 된다. 새누리당이 압도적 지지를 받았을 것이라는 우리의 예상은 빗나간다. 20대 총선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에 투표한 부산 시민은 47.83%였고, 민주당에 투표한 부산 시민은 38.42%였다. 생각보다 많은 부산 사람들이 이미 민주당에 투표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40% 가까이 민주당에 투표하는 부산 시민들을 아직도 지역주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로 취급할 수 있을까.
그런데 왜 실제 당선된 국회의원은 대부분 새누리당일까? 40%에 가까운 부산 시민들이 민주당에 투표를 했으면, 상식적으로 부산에 있는 18명의 국회의원 중 7-8명 정도는 민주당이어야 되는데, 이런 표심의 왜곡은 어디서 생기는 걸까?
문제는 우리나라의 선거제도에 있다. 우리나라는 각기 다른 국정 철학을 가진 정당 득표에 따라 의석이 나눠지는 것(비례대표제)이 아니라, 각 선거구에서 1등한 사람이 국회에 입성(소선거구제)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가령 부산의 모든 선거구에서 새누리당 후보가 51%, 민주당 후보가 49%를 득표한다면, 부산 시민 전체의 49%가 민주당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18석 전부를 새누리당이 가져가게 되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봐도 그렇다.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이 정당득표에서 얻은 표심은 합쳐서 59.04%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두 당이 가져간 의석 수는 245석으로 총 300석 중 81.6%에 해당한다. 반면, 정의당 같은 소수정당은 7.23%를 얻어 21석 정도는 가져가야 마땅하지만 실제 의석은 6석에 불과하다.
물론, 이런 현상을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아니, 각 지역구에서 1등을 했으면 그 사람이 당선되는 거지. 불만있으면 지역구에서 1등할 인물을 만들어내던가."
충분히 맞는 말이다. 그래서 미국과 영국 같은 나라들도 이런 지역구 선거(소선구제)를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대부분의 북유럽 선진국들은 이런 왜곡이 없는 비례대표제를 채택한다. 정당 득표가 10%면 실제 의석에서도 10%를 보장하고, 20%면 20%의 의석을 보장한다. 그것이 국민의 뜻에 맞는 정치가 이루어지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어느 정당의 지지율이 20%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20%의 영향력을 발휘하라는 취지다.
각 지역구 별로 1등을 뽑는 방식(소선거구제)과 정당의 득표율을 보장해주는 방식(비례대표제), 무엇이 더 좋은 방법일까? 결국 선택의 문제다.
받은 표만큼 의석을 못 받는 것도 억울한데 작은 정당들을 더 힘들게 만드는 제도가 있으니, 바로 교섭단체 제도다.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하며 야당 성향의 정치세력이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활시킨 제도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회에서 20석 이상을 가진 교섭단체가 되지 못하면 사실상 정당 대우, 국회의원 취급을 받지 못한다.
국회의원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상임위 활동이다. 외교통일위원회, 국방위원회, 환경노동위원회, 교육위원회 등 각자의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위원회에 들어가서 활동을 한다. 그런데 비교섭단체 소속 국회의원들은 상임위를 정할 수 없다. 교섭단체들이 가라는 곳으로 무조건 가야 한다. 여기서 거대 정당들의 횡포가 일어나기도 한다. 20대 국회가 시작될 때도 환경노동위원회에 친노동 진보정당인 정의당에 T.O.를 주지 않고, 언론개혁 전문가인 정의당 추혜선 의원을 아무런 연관이 없는 외교통일위원회에 보낸 일이 있었다. 정의당과 여러 시민단체들이 항의를 한 끝에 결국 정의당 심상정 의원을 환경노동위원회에 넣어주고 추혜선 의원은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로 보내주긴 했지만, 비교섭단체 입장에선 서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교섭단체에겐 돈도 없다. 우리나라는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을 의석 비율 대로 나누지 않고, 굉장히 이상한 방식으로 나눈다. 우선 전체 국고보조금의 절반을 교섭단체들이 균등하게 나누어 가진다. 그리고 5석 이상의 정당에는 전체 국고보조금의 5%, 5석 미만의 정당에는 2%를 준다. 그리고 남은 금액을 가지고 절반은 의석수 비율대로 나누고, 나머지 절반은 총선 정당 득표율대로 나누어 가진다. 그렇게 교섭단체들만 월등히 많은 돈을 가져가는 것도 서러운 데, 교섭단체들의 특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교섭단체는 정당의 입법 활동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정책연구위원을 지원 받는(정책연구위원들의 월급을 국가가 내준다는 뜻이다) 반면, 비교섭단체는 그런 혜택을 받지 못한다. 정당도 빈익빈 부익부가 되는 구조인 것이다.
그 외 비교섭단체는 중요한 법안이나 예산안 등 주요 국회 논의에서 배제되고, 교섭단체 대표는 40분간 연설을 하는데, 비교섭단체 대표는 15분 밖에 못하는 등 사소한 부분에서까지 차별 받는다. 국회 안에서 왕따 취급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건 어느 정당이 '대우'를 못 받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거대 정당이 아닌 정당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거대 양당 외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국회에서 사라지게 된다.
다른 나라들을 보면 미국과 영국은 교섭단체라는 제도 자체가 없고, 교섭단체가 있는 나라들의 경우에도 그 기준이 상당히 낮다. 일본은 2명 이상이면 교섭단체가 될 수 있고, 프랑스 하원의회의 경우 15석이 기준인데 전체 의석 수가 우리 국회(300석)보다 훨씬 많은 577석이다. 대체로 해외의 교섭단체 기준은 총의석의 1~5%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에 비에 아무리 효율적인 국회 운영을 위한 것이라 해도 총의석이 300석인 우리나라에서 20석이 기준인 것은 그 벽이 상당히 높은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을 모으고, 권력을 쟁취한다. 그런데 그 힘이 TOP 1, TOP 2에 들지 못한다고 그 영향력을 0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정치판은 '넘사벽'이 되고 세상은 영원토록 바뀌지 않을 것이다. 가장 좋은 정치는 그 사회 구성원들의 정치적 소망이 있는 그대로 반영되는 정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