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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경 Jan 08. 2020

감독 그레타 거윅에 대해

레이디버드와 리틀 위민, 그리고 거윅

나는 그레타 거윅이 누군지도, 시얼샤 로넌이 어떤 배우인지도, 그리고 내가 레이디버드와 너무 깊은 사랑에 빠질지에 대한 것도, 정말 단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레이디버드는 그저 '밤을 시끄럽게 만들지 않는 영화가 보고 싶음'과 '여성 감독의 영화가 보고 싶음'의 교집합에 있었을 뿐이다.


레이디버드는 그레타 거윅을 내 삶 아주 깊은 곳에 자리잡도록 해 버렸고, 시얼샤 로넌이 나오는 모든 필모그래피를 챙겨 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으며 처음 보자마자 바로 연달아 다시 재생을 시키고 마는 골수팬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단 하나, 레이디버드는 밤을 시끄럽게 만들지 않는 영화가 아니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레이디버드는 맥퍼슨 가족과 레이디버드를 조명할 뿐이다. 거윅은 그저 레이디버드를 따라갈 뿐이다. 갑자기 시얼샤 로넌이 한나가 되어서 인간 병기로 활동한다거나, 거윅이 알고 보니 재클린의 절친한 친구라는 플롯 트위스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는 다만, 누군가를 소모하지 않으면서, 레이디버드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 줄 뿐인데도, 나는 그날 밤 엉엉 울 수밖에 없었다.


어떤 영화는 영혼을 건든다고 하고, 어떤 영화는 영혼을 조각낸다고 하며, 또 다른 어떤 영화는 영혼이 신경을 쓰게 하고 싶지도 않다고 한다. 레이디버드는 영혼을 건들지도, 영혼을 조각내지도, 그리고 영혼이 보지 않았으면 싶기도 한 영화는 단연코 아니다. 다만, 그래 다만, 레이디버드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킬 뿐이다.


레이디버드 속 크리스틴 맥퍼슨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몸과 마음과 영혼 모두 있는, 그래서 살아 있는 누구나 그렇듯 입체적이고 능동적이다. 어떤 일이 생기면 반응하며 싫어하거나 좋아하고 기대하고 또 실망한다. 모든 영화가 그렇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니다. 레이디버드 속 맥퍼슨은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관객이 저 등장인물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도록 만들어졌구나, 가 아닌, 당연히 사람이기 때문에 살아 있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라고 납득하게 만든다.


모든 감독과 작가는 등장인물에 애정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창조해 낼 수 없으니까. 하지만 거윅의 영화가 내게 주는 감상은 좀 다르다. 레이디버드를 보고서는 구체화시킬 수 없었던 이 감상에 대해, 리틀 위민을 본 지금 다시 말해 본다.


원작이 있는 창작물의 시나리오를 써서 다른 형태의 예술로 표현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감, 그리고 또 기대를 안고 시작하는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먼저 고백하고 가자면 나는 작은 아씨들, 그러니까 리틀 위민을 좋아해 본 적이 없다. 조 마치를 사랑해마지않을 수 있는 여성이 있겠느냐만은, 조 마치의 존재를 아는 것이 전부였다. 다시 말해, 나는 리틀 위민에 대한 기대감이 아닌 그레타가 펴는 리틀 위민의 책장 속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영화는


말도 안 되게


좋았다.


그것이 원작을 얼마나 반영했든 반영하지 않았든 이미 내 알 바 아니었다. 나는 그레타 거윅의 영화를 봤고, 울고 웃었으며, 자기 직전까지 머릿속에서 떠나보낼 수 없었다. 그리고 생각이 흐트러지기 전에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가 영화를 두 번만 더 보고서 다시 정리해 보자는 결론에 이르렀을 뿐이다. 하루 종일, 그리고 글로 소회를 남기는 지금까지도, 리틀 위민과 사랑에 빠지고 있다.


그레타 거윅은 창조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모든 캐릭터에게 숨을 불어넣는 것을 즐기고, 좋아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창조하는 스스로에게 취해 있다기보다 캐릭터에 흠뻑 빠져서 다만 그 캐릭터가 되어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럴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까지 완벽할 수 없다.


거윅은 모든 캐릭터에게 서사가 있고, 모든 캐릭터에게 마음과 생각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일깨워 준다. 등장인물들은 창작자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며, 다만 관객인 우리는 인물들의 일상을 조금 엿볼 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죽어 있는 존재가 아니고, 스스로 기능하며 또 우리가 보고 있지 않더라도 각자의 삶을 살아갈 것임을. 우리가 영화관 밖을 나가는 발걸음을 내딛을 때, 그들은 또 스스로의 발자국을 찍어 나가며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을 것임을.


끝을 끝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사람은 얼마나 대단한가.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잠깐의 만남으로 표현하는 감독이란, 대체 얼마나 많은 재능과 캐릭터에 대한 애정, 그리고 또 영화를 잘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을까. 


나는 거윅이 스스로의 시나리오와 감독이라는 직업에 대해 자부심이나 자신감을 가졌다고 단언할 수 없다. 거윅과 개인적으로 얘기를 나눈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나면 꼭 묻겠다.) 하지만 거윅은 그가 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스스로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방법으로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연기로든 감독으로든, 그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오래 생각하고 잘 만들어 본인이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이용해 사람들을 설득시킬 줄 아는 사람이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항상 생각해 왔다.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영화를 이용해 전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잘 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잠시의 고민도 없이 그레타 거윅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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