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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하는 몸 Feb 22. 2019

댓글 하나에서 시작한 팟캐스트

01. CBS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시작하면서

'헝거' 프로젝트의 처음을 기록해보기로 한다. 박근혜 정권이 한창 시들해질 무렵,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대중에 공개됐다.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블랙리스트 딱지를 붙이고 창작 활동을 이어나가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블랙리스트 예술인들이 블랙리스트 버스 데모단을 조직해 버스를 타고 서울에서 세종시로 향했다. 2016년 1월이었다. 


이날 1박 2일 버스를 타고 세종시로 향한 취재진 중에는 나와 CBS 박선영 피디가 있었다. 선영님을 처음 만났던 건 서울 광화문에서 세종 정부청사로 가는 버스 안에서였다. 둘 다 갓 수습을 뗀 초년생이었다. 취재거리를 위해 능숙하게 돌아다니는 기자들 사이를 비집고 둘 다 간신히 취재원을 잡아 그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핸드폰이 곧 얼어서 터질 것 같았다.


다른 취재진이 모두 일찍 취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간 뒤 두 사람만이 마지막까지 세종시에 남았다. 초조했지만 동지가 있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조금은 편했다. 제대로 자지도 씻지도 못한 채 눈곱만 겨우 떼고 꾀죄죄한 몰골로 앉아 졸면서 서울로 왔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선영님과 인사했다. 언제 볼지 알 수 없다만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


2년 뒤 여름, 책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쓴 백세희 작가를 인터뷰 차 만났다. 작가님은 록산 게이의 <헝거>라는 책을 내게 선물로 주었다. 


<헝거>는 어린 시절 성폭력을 겪은 후 '안전해지기 위해' 스스로 몸집을 불린 록산 게이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하지만 몸집을 불린 뒤에도 록산 게이의 삶은 결코 편하지 않았다. 누구나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읽히고 싶은, 선물하고 싶은 책이었다. 작가님이 이 책을 선물해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처음으로 낭독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인스타그램을 켜고 <헝거>의 독서일기를 몇 마디 남겼다. 박선영 피디님이 그 밑에 댓글을 남긴 걸 보자마자 카톡을 했다. 


"문득 각자 다른 목소리로 이 책 오디오북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뭐야, 느낌표가 네 개나 되잖아! 느낌표 개수에 의미를 잔뜩 부여한 나는 선영님에게 얼른 만나자고 말했다.


우리는 합정 '콘하스'에서 만나 빵을 뜯어먹으면서 회의를 빙자한 수다를 떨었다. 우리 둘 중 누군가 <헝거>의 88 챕터에 맞춰 88명의 여성들을 섭외하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이들이 각자 조금씩 <헝거>를 읽는 형태의 라디오 콘텐츠를 구상했다.


아이디어를 내는 족족 상대방의 열렬한 동의를 얻으면서 '헝거' 프로젝트는 구체화됐다. 각자 섭외하고 싶은 여성들을 생각해냈고 모두 섭외에 응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헤어졌다. 내리던 비는 그쳐있었다. 예감이 좋았다.


-유지영 



1박 2일의 취재를 마치고 온 나에게 선배는 말했다. “어딜 가나 그 조직의 심장 같은, 영혼을 담당하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에게로 바로 갔어야지. 옆에 꼭 붙어 그 이야기를 들었어야지.”

박근혜 정권 시절 블랙리스트에 올라 불이익을 당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모여 세종시의 문화체육관광부 청사 앞에서 텐트를 치고 시위를 하던 날이었다. 볼이 빨갛고 눈빛이 부드러운 나는 제대로 취재를 하지 못했다. 가두시위 행렬에서도 앞자리 대신 꼬리 부분에 머무르며 무명의 예술가들에게 간신히 말을 걸었고, 기자들이 필요한 멘트를 재빠르게 따고 서울로 돌아갈 때 홀로 미련이 남아 버스에서 잠까지 잔 터였다. 언제나처럼 나는 주변부를 맴돈다.

비록 그 조직의 심장에 닿지는 못했지만, 그 심장에서 뿜어낸 그 무엇의 영향이었을까. 맴돌던 가장자리에서 나는 오마이뉴스 유지영 기자를 만났다. 어쩌다 보니 기자님도 나처럼 1박 2일을 머무르며 텐트에서 두부김치도 먹고, 버스에서 앉은 채로 잠도 잤다. 어쩐지 이 사람에게 마음이 자꾸 가 그 후로도 이따금씩 연락을 나누며 밥도 먹고 차도 마셨다. 나중에는 인스타그램 친구까지 되었는데, 기자님이 올리는 짧은 글들을 보며 그동안 왜 인연을 이어가고 싶었는지, 이해도 되었다. 무명씨들의 작은 이야기들을 사랑하고, 그것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서글픔을 갖고 있으며, 그래서 어딘가에 이 이야기를 전하고픈 마음. 그런 것들이 나와 비슷하다 느꼈다.

CBS 팟캐스트 <말하는 몸> 은 그런 유지영 기자님과 내가 우연히 같은 책, 록산 게이의 <헝거>를 읽고 비슷한 크기의 감명을 받아 만들어지게 된 프로젝트다. 유복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행복했던 한 소녀가 어떻게 자신의 몸을 망가뜨리며 자신을 혐오하게 됐는지, 또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이 어떻게 망가졌는지까지도 돌아본다. 몸이 먼저 망가졌는지, 내 삶이 먼저 망가졌는지 순서는 중요치 않을 것이다. 내 삶을 담은 그릇은 태어날 때부터 서서히 금이 가 있었고, 그 안에 담긴 삶도 언제든 넘칠 준비를 하며 끓고 있었을 테니까. 우린 늘 어딘가 망가져 있는 몸과 삶의 결정체인 것이다.

우린 이 모든 과정이 록산 게이만의 것이 아님을 확신했다. 나도, 기자님도, 우리 곁의 사람들도, 우리가 모르는 어느 곳의 사람들도. <헝거>에서 비롯된 이 이야기들은 지금은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그 몸에 얽힌 삶의 이야기를 한다’는 콘셉트로 차곡차곡 기록되고 있지만 역시 여성들만의 것은 아니리라.

다만 조금 덜 들려지고, 덜 주목받던 여성의 삶, 심하게는 아예 잊히고 은폐되고, 심지어는 강제로 망가뜨려지기도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들이 많기에 기자님과 나는 당분간 이 변두리의 삶에 맴돌아보기로 한다.


-박선영 


http://www.podbbang.com/ch/1769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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