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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 수 Dec 07. 2019

보낼 수 없었던 편지, 윤희에게. (스포 포함)

용기를 낼 수 있었으면, 탓하지 않았으면.


정말 보고 싶었던 ‘윤희에게’를 보고 왔다. 삿포로, 오타루를 배경으로 한 스토리와 포스터, 그리고 퀴어영화라는 점이 (그것도 중년의) 흥미로웠다. 상영관이 정말로 없고 시간도 정말 안 맞아서... 우선 예매가 정말 어려웠다. 대형 극장에선 많이 내려가기도 했었고, 다행히 이런 영화도 꾸준히 상영하는 영화의 전당에서 가끔 상영을 하길래 시간이 맞을 때 보려고 계속 시간을 확인하고 또 했다. 평일은 대부분 낮 시간에만 상영을 했고, 그러다 주말에 딱 좋은 시간에 있길래 얼른 예매했고 영화랑 어울리는 추운 겨울 날씨를 뚫고 다녀왔다.


아래는 온통 스포 포함 글이니  보신 분이나 스포가 싫은 분들은 주의하세요!



윤희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하는 영화는 내내 쓸쓸하다. 찬 바람이 불고 하얀 눈이 화면을 채우고 대사보다 침묵이 더 많이 시간을 채운다. 마치 조용한 눈과 닮은 적막, 차가움이 영화 초반을 가득 채운다. 처음 보고 든 생각은 ‘쓸쓸하다’였다. 마음도 배경도 모두가 쓸쓸하고 지나간 시간이 쓸쓸했다.


어릴 적,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 만난 첫사랑과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만 했던 현실이 쓸쓸했다. 윤희의 삶은 윤희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공부도, 사랑도, 결혼도, 인생 전체가 모두 다. 팍팍하다 못해 퍽퍽하게만 보이던 윤희의 삶. 아침에 일어나고 통근 봉고를 기다리고 출근을 해서 표정도 없이 묵묵하게 일을 하고,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 딸과 밥을 먹을 때도 표정도 생기도 없던 윤희의 얼굴. 누구나 하는 사랑, 누구나가 하는 흔한 이별에 대한 헤어짐을 고한 벌이라기에는 너무 크고 길었다. 심지어 윤희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닌데.


삿포로까지 가서 편지 주소에 적힌 쥰의 집 앞까지 갔다가 인기척에 황급하게 숨어 도망을 치고, 혼자 펍에 앉아서 일본에 와서 친구와 만나서 밥도 먹고 산책도 했다고 씁쓸하게 말하던 쓸쓸하고 슬퍼보이는 얼굴이 나도 슬펐다. 그냥 누구나와 쉽게 할 수 있고 평범하고 사소한 그 일들이 윤희에겐 20년간 허락되지 못했던 시간들이 슬펐고, 쥰을 다시 만나서 하고 싶은 일들이 그런 사소한 거라는 사실이 조금 슬펐다. 그런 쉬운 일조차 그들에겐 어려운 일이었겠지?


하얀 눈 속에서 울고 웃고 조금씩 표정이 생기던 윤희의 변화가 좋았다. 배경은 여전히 눈이 쏟아지는 겨울인데, 조금씩 겨울이 녹는 기분이 들어서 딸의 이름처럼 봄이 오는 기분. 봄이 가져온 봄.


마지막에 서로 스치기만 해도 알아보던 두 사람은 그 길을 함께 걷고 오래 묵히고 참았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나라에 남게 되었을 때 어떻게 됐을지 궁금하다. 둘은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나는 그 둘이 꼭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 그렇게 오랜 시간 누군가를 그리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정말 대단하고 놀라웠으니까. 이젠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으면, 생각했다.


윤희가 쥰에게 보내던 마지막 답장이 기억에 남는다.


“너와 만났던 시절에 나는 진정한 행복을 느꼈어.
그렇게 충만했던 시절은 또 오지 못할 거야.


<중략>


너한테 이 편지를 부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나한테 그런 용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정한 행복을 느꼈던 삶의 시간은 너무나 짧았고 충만하다고 느껴졌던 시절은 너무 금방 지났다. 지난 것은 지난 거라 아름다운 거라고 해도, 둘이 안부를 물으며 지낼 수 있는 정도의 용기는 꼭 냈으면.




너무 아름다운 포스터. 겨울의 삿포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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