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시어머니의 산후조리원을 나온 수경 앞에는 밀린 숙제처럼 집안일이 잔뜩 쌓여있었다. 육아는 기본이고, 시부모님과 남편 그리고 시누이까지 식구들의 삼시 세 끼를 책임져야 했으며, 하룻밤만 자고 나면 수북하게 쌓이는 아기 기저귀(당시는 일회용 아기 기저귀가 보편화되기 전이라 모두 천기저귀를 썼다.)와 식구들 빨래를 하고 돌아서면 하루에 두 번씩 해야 하는 집안 청소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일이 서툰 초보 주부 수경에게는 집안일보다 육아가 더 고달팠다. 돌이 지나고 기적처럼 순둥순둥 해졌지만 그녀의 아들은 세상에 둘도 없을 정도로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아이였다. 밤이면 두 시간 간격으로 깨서 배고프다고 빽빽 울어댔고, 빛의 속도로 분유를 타서 젖병을 입에 물려도 제 성에 차지 않으면 혀로 젖병을 밀어내며 얼굴이 빨개져라 울어댔다. 태어날 때부터 아들은 먹는 것도 시원찮았다. 애써 타 준 분유의 반도 못 먹으며 이런저런 까탈만 부렸다. 낮에도 까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들은 깨어있는 시간에는 늘 안아달라고 보챘다. 그래도 아들은 안아만 주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는 듯 까르르르 웃으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과 이렇게 놀고만 싶었지만, 수경에겐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수경이 집안일을 하는 동안에 아기는 할아버지 손에서 할머니 손으로 옮겨 다녔고, 퇴근한 아빠와 고모도 부지런히 아기를 안아주며 사랑을 쏟았다. 그나마 아기를 돌봐줄 식구들이 많아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세상 참 좋아졌다. 나는 누가 애 봐줄 사람이 없어서 아기를 업고 밥을 했는데... 우리 새아기는 시댁 식구들이 이렇게 아기를 봐주니 얼마나 편하고 좋아!"
시부모님 아침을 준비하는 수경의 뒤통수에 대고 시어머니 강 여사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독박 육아는 면했지만, 독박 시집살이를 해야 하는 수경은 시어머니의 말이 왠지 서운하게 다가왔다. 밤새 아이와 씨름하느라 쓰러질 것처럼 힘든데, 아침 일찍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기 무섭게 시부모님 아침을 해야 하는 그녀가 과연 편한 팔자인가 자문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기를 업고 밥을 하지는 않아도 되니 편한 걸로 해야 하나?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수경은 체념하듯 강 여사를 향해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네. 어머니,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몰라요."
아침식사가 끝나면 시어머니는 잠든 아기 옆에서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셨다. 물론 시어머니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같이 커피 마시고 천천히 일하라"라고 하시지만, 잠든 아기가 깨기 전에 집안일을 마쳐야 하는 수경에게 커피 한잔의 여유는 없었다. 운 좋은 날이나 아기가 깨기 전에 집안일을 끝내고 커피를 마시며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날따라 할 일이 많았다. 평소보다 기저귀도 많이 나왔고, 아기가 토해놓은 이불도 빨아야 했다. 수경의 마음이 급했다. 동동걸음으로 세탁실과 부엌을 오가며 일을 하는데 "으아아앙"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나, 일어났으니까 얼른 봐달라는 신호다. 아기가 울기 시작하면 엄마 마음이 조급해진다. 시어머니가 아기를 잘 봐주실 거라 생각하면서도 더 동동거리게 된다. 그런데 수경이 급한 마음을 억누르며 젖병을 씻고 소독을 하는 동안에도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평소라면 아기가 울음을 터트리기 무섭게 시어머니가 아이를 안아주며 달래주실 텐데, 이상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안방으로 향하는 수경의 발걸음이 불안해졌다.
방문을 열자 아기에게 등을 돌린 채 신문을 읽고 있는 시어머니가 보였다. 얼마나 집중해서 신문을 읽으시는지, 수경이 들어서는 것도 모르고 계셨다.
"어머니! 윤재 깼어요."
"아이고, 내가 신문 보느라 우리 윤재 깬 것도 몰랐구나. 우리 손주, 깼어요? 어이구구"
강 여사는 그제야 놀란 듯 우는 아기를 품에 안고 도닥거리기 시작했다. 윤재는 내가 알아서 볼 테니, 며느리 너는 나가서 집안일이나 하라는 신호였다. 안방을 나가며 수경은 저절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신문을 얼마나 열심히 읽으셨길래 아기 울음소리도 못 들으셨을까?
그날의 작은 해프닝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후로도 가끔, 수경은 집안일을 하다가 그치지 않는 아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안방으로 뛰어들곤 했었다. 그때마다, 시어머니는 태평한 얼굴로 신문을 읽고 계셨다. 어떤 날은 수경이 아들을 안아줄 때까지도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다. 그녀는 시어머니의 놀라운 집중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릴 때부터 1등을 놓치지 않았고, 늘 반장을 도맡아 했다는 강 여사는 결혼 전까지 선생님이셨다. 당시 풍습에 따라 결혼과 함께 퇴직했지만, 여자도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복직을 준비하다가 시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쳐 교사의 꿈을 내려놓은 그 시절의 안타까운 인재였다.
"우리 어머니 집중력은 진짜 끝내주셔. 특히 신문 보실 때, 옆에서 아기가 울어도 못 들을 정도로 집중해서 신문을 보신다니까."
시어머니의 놀라운 집중력이 부러웠던 수경은 친정식구들은 물론이고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진심으로 시어머니를 칭찬했다. 그런 시어머니를 닮아서 남편과 시누이들이 모두 공부를 잘한 것 같다며 은근히 지적인 시어머니에게 자부심까지 느꼈다. 아들 윤재도 시어머니의 총명함과 집중력을 닮아서 똑똑한 아이로 자랄 거라는 기대까지 했었다.
시간이 흘러 흘러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시어머니의 놀라운 집중력의 비밀이 벗겨졌다. 수경이 처음 시어머니를 만났을 때, 59세였던 시어머니는 80세를 앞두고 심각한 청력장애 증상을 보이셨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레 진실이 드러났다. 셋째 시누이를 낳고 중이염을 앓았던 시어머니의 귀에 문제가 있었단다. 특히 오른쪽 귀는 상태가 너무 나빠서 오른쪽에서 나는 소리는 거의 못 들었단다. 그러니까, 신문을 읽던 시어머니의 오른쪽에 윤재를 눕혀둔 날은 아기가 깨서 우는 소리를 못 들으셨던 거다.
시어머니의 놀라운 집중력을 예찬했던 수경은 허망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시들해진 눈빛으로 시어머니를 바라보며 아, 보청기를해드려야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앞으로 닥쳐올 시련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시어머니의 난청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야기할지.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갈등과 분쟁이 생길지, 그때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