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가 말하는 현명한 조언
고민의 무게가 지나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처음 겪어본 일이거나, 홀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하거나.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지 않으면, 주변에 조언을 구하곤 한다. 적당히 두런거리는 테이블로 찬 카페나 오롯이 입과 귀에 집중할 수 있는 전화가 좋겠다. 감정이 담긴 단어들이 한바탕 귓가를 맴돌고 나면, 이제는 조언을 들을 차례다. 누군가의 힘듦이 또 다른 누군가의 힘듦이 되고, 고민과 조언은 무거워지는 공기 속에서 한참을 뒤섞인다. 그 공기가 가벼워질 무렵에 시간은 이미 무자비하게 흘러 있다. 한껏 홀가분해진 기분 속에선 자리를 뜨는 엉덩이도 가볍다.
한때는 이런 시간에 큰 의미를 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고, 내 도움으로 조금이나마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에 적극적이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커질 때면, 시시콜콜한 고민거리를 한 아름 안고 친구를 찾았다.
하지만 늘 주효하진 않았다. 헤어지라는 조언은 그 순간에만 유효했고, 공부하라는 말은 어느새 흩어져 있었다. 한 번은 나에게 자주 손을 내밀면서도 소심함을 떨쳐내지 못하는 친구에게 따지기도 했다. 머쓱함이 얼굴에 비친 그는 "나는 네가 아니지 않냐"라고 쭈뼛하게 답했다. 그렇다고 내가 잘난 것도 아니다. 나 역시 수많은 조언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면 이미 풍운아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무용성을 이미 간파하셨는지 한 교수님은 자신의 조언은 곧 잊힐 것이고 결국 본인이 알아서 한다는 전제를 깔고 나에게 조언을 하셨다. 그의 말마따나 지금 나에게 남은 그의 충고는 결국 내가 알아서 한다는 것뿐, 그 나머지 조언은 애지중지하려 했음에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처럼 조언은 어떤 면에서 비효율적이다. 고민이 빚은 자리에서 서로의 상황을 공유한다는 게 끝인 것만 같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그저 공감만 해주는 감정노동자로 전락해야만 하는 걸까. 혹자는 힘들어하는 사람이 자신의 상황을 알아줄 사람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찾는 것이니 경청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이상의 도움을 주는 건 욕심일까. 언제부턴가 나는 사람 천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되뇌며 조언을 건네는 순간에 집중하지, 그 이후는 상관하지 않으려 한다. 대충은 그 사람의 감정을, 지나친 간섭은 나의 감정을 좀먹기 일쑤다.
나는 어떤 계획이 제안되든 조언자가 그것을 자신의 사업인 것처럼 몰두하지 않고 절제하며, 그의 의견을 중립적으로 말하고 겸허하게 그것을 옹호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로마사논고, p.616)
대충하는 조언과 지나친 조언 사이의 경계. 흐릿한 그것에 구분선을 짓는 건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대신 마키아벨리는 겸허함으로 그 경계들을 구분할 것을 요구한다. '절제'함으로써 상대방에게 강력한 요구를 하지 않고, 그렇다고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른바, 절제 있는 조언이다.
강력한 조언은 선택에 따른 무게추를 조언자에게 쏠리게 만든다. 책임이 커진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주식 종목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에 A를 추천했다고 하자. 손해를 본다면, 온갖 원망과 책망은 조언자에게 몰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해당 종목을 추천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A에 돈을 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득을 본다면 어떨까. 둘의 관계에 무리는 없겠지만, 손해를 감수할 만큼 이득이 돌아오는 건 아니다. 조언자에 대한 신뢰 외에도 그의 마음에는 이득을 얻기 위해 행했던 고민남녀의 눈곱만큼의 노력이 득의양양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경청만이 최선이 되는 것도 아니다. 주식 이야기를 늘려보자. 성장 가능성이 있는 주식 A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가 조언자만 이득을 얻었다면 어떨까. 어쩌다 고민남녀에게 그 소식이 들리면, 왜 그때 조용했냐는 아우성을 들을 것이다. 본인의 이익만 취하려 한다는 시기와 질투를 들을 수도 있다.
따라서, 절제 있는 조언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고민은 포용하고, 진심으로 그에 대한 생각을 말해주자. 그리고 선택의 몫은 본인에게 맡기자. 상대방의 문제에 주인공이 되려 한다면, 그 책임의 몫을 온전히 떠맡는 꼴이 된다. 정답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음에도 망설이는 건 힘들어하는 상대방에게 도리가 아니다. 반면, 절제 있는 조언은 관계를 해칠 위험성을 최소화한다.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조언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건 부당하다. 조언을 구한 사람이 자신의 선택에 따른 책임을 조언자에게 떠넘기는 건, 한편으론 자신이 그런 조언자를 찾은 것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맹목적으로 결과에 따라 조언의 좋고 나쁨을 판단한다
우리는 답을 찾고자 고민을 나누고, 조언을 듣는다. 그 심정을 십분 이해하기에 때론 용을 쓰면서까지 도움을 주려 한다. 그 과정이 아름다울지언정, 결과는 모르는 법이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결과를 논할 때면 흑백논리에 사고를 맞추고, 인생은 늘 좋은 방향으로 흐르진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가는 말들 사이에 적정한 선을 그어 그것을 넘어서지 않기 위해 경계해야 한다. 무수한 관계들 속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절제 있는 조언이 필요한 이유다.
참고,
마이카벨리(2019), 로마사논고 p. 614-617,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