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다가 스토아 철학자에게 팩트치료를
친구와 카톡을 하던 와중에 난데없이 선언을 했다. 난 이제부터 26살이라고. 앞으로는 국제 나이 기준에 의거해 만 나이로 셀 거라고. 나를 가로막지 말라고. 친구는 왜?가 아니라 근거가 뭐냐고 묻는다. 비슷한 말이지만, 논리로 승부하자는 뜻이다. 자잘자잘한 근거들이 넘실대지만, 대한민국 땅에서는 내가 불리한 싸움이니 그냥 그러려니 하라고 밀어붙였다. 매일 같이 서로가 쓰잘데기 없는 소리만 늘어놓으니, 눈치 빠른 친구는 그중 하나라고 생각하나 보다. 소모전을 펼치기 싫은 듯 그는 빠른 인정을 하고, 넘어간다. 아마 다음에 자기가 어려지고 싶을 때, 요긴하게 써먹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무안해진 26살 선언은 물론 헛소리다. 그래도 나름의 이유는 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기어코 28살이 됐다! 공이나 만지던 초등학생 때는 26살이면 혼인신고를 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벌써 2년 전이다. 수능사관학교에 입학할 때만 해도, 10년 후면 영그는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일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다. 패배감이나 허무감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는 건 아니다. 그런데 뭐랄까. 쪼끔 억울하다. 시간이 쏜살같은 느낌이다. 겨우(?) 8년 전인데, 대학 새내기 시절 사진은 대통령이 다섯 번은 더 바뀌어야만 할 것 같은 차림새다. 이 정도 시간의 빠르기라면 일주일 후에 30대가 되고, 일 년 후에 반백살이라 해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이 훌쩍 풀쩍 지나간다고 느끼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아마 코로나가 힘 좀 보탰을 것이다. 요망한 놈으로 인해 옴짝달싹 못하는 시간이 아깝긴 한데, 뜨듯한 온수매트에 누워만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이제 팩트치료를 받아야 한다. 언제까지고 흘러가는 시간을 두고 곡소리만 얹어 놓을 수 없으니 말이다. 아쉽게도 이번에 모시려고 했던 분이 이미 시간의 차원을 초월해버려서, 대신 그의 글을 참고했다. 스토아 철학자이자 네로의 스승으로도 활동했던 루키우스 세네카의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다.
글을 보아하니, 로마 시대에도 나처럼 아쉬운 소리에 장단을 맞추는 한량들이 왕왕 있었나 보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게 시간이라지만, 그렇게 느끼는 게 어디 쉬운가. 그런 느긋한 한숨소리에 세네카 형은 결국 멱살을 붙잡는다.
기억을 더듬어보시오. 언제 그대에게 확고한 계획이 있었는지, 얼마나 적은 날들만이 그대의 의도대로 지나갔는지, 언제 그대가 자신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지, 언제 그대의 얼굴이 자연스런 표정을 지었는지, 언제 그대의 마음에 두려움이 없었는지, 그토록 긴 세월 동안 그대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대가 무엇을 잃었는지도 모르는 사이 그대의 인생을 뺴앗아갔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근거 없는 괴로움과 어리석은 즐거움과 탐욕스런 욕망과 매력적인 교제가 앗아갔으며, 그대의 것 중에서 얼마나 적은 것이 남아 있는지 말이오. 그러면 그대는 때가 되기도 전에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오. (p. 14)
형이 들이 내미는 잣대 하나하나가 부정할 수 없는 것들 뿐이라 괜스레 위축된다. 대단한 잘못을 한 것 같다. 그러면서, 그는 굉장히 의미 있는 삶을 산 엄친아를 떠올리듯, 한 구절을 읊조린다.
순간순간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쓰고, 하루하루를 자신의 전 인생인 양 꾸려나가는 사람은 내일을 바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지요. (p.28)
그렇다면 한량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시간을 소중히 그리고 신중히 써야 한다는 건 알겠지만, 그것이 쉬운가. 이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현재는 과거가 된다. 과거가 됐다는 것을 인식한 순간, 그 순간도 다시 과거가 돼버리고 만다. 옳다쿠나!하고 줄줄 새어나가는 시간들. 넋 놓고 있을 땐 몰랐는데 주목받으면 이성을 잃는 타입인 듯, 시선을 집중하니 콸콸콸 쏟아지는 것만 같다. 다행히 세네카 형은 페르마 형처럼 난해한 문제를 펼쳐놓고 "난 알지롱"하고 유유히 퇴장하는 갑분싸를 만들지는 않는다.
철학을 위해 시간을 내는 사람들만이 여가를 즐기지요. 그들만이 살아 있어요. 그들은 인생의 시간을 잘 건사할 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을 자신의 인생의 시간에 덧붙일 줄도 알지요. 많은 세월이 그들 앞을 흘러갔지만 그들은 그 세월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어요. (p.47)
세네카 형은 자신의 철학 에세이가 2000년 후에도 팔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우리에게 철학할 것을 종용한다. 소크라테스랑 말도 섞고, 에피쿠로스랑도 안부도 좀 나누고. 괜찮다면 자신과 같은 스토아 철학자들과도 티타임 좀 가지라고 한다. 이는 그들이 평생을 거쳐 고민했던 생각을 내 것이라도 된 듯 흡수하란 뜻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그들이 투자했던 세월은 나의 것이 되어 시간을 번 셈이 된다. 백발과 주름살은 오래 산 게 아니라 오래 생존한 것을 인증할 뿐, 세네카 형피셜로는 철학하면 누구보다도 더 오래 살 수 있다.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알고 싶으면 인생에서 얼마나 적은 부분이 자신의 것인지 생각해보라고 하시오. (p. 62)
무수히 책을 읽고 또 읽으면 나는 오래 살았다고 정신승리를 할 수 있는 것인가. 내가 대답하기 쉬우려고 일부러 순진한 질문을 가져왔다.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그건 정답이 아니다. 책을 읽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은 일방통행이다. 철학자들과의 소통이 아니며, 나를 위해 책을 읽는 게 아니다. 내 마음대로 판단하자면, 세네카 형이 우리 보고 철학하라는 건, 내 인생에서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갖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이미 시간을 왕창 쓴 철학자들에게서 1:1 상담을 받으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시간 코인을 다 써버렸지만, 고맙게도 그들만의 목소리가 담긴 상담실들을 남겼으니 말이다.
포부로 찬 26살 선언을 뒤로하고, 세네카 형과 1:1 상담을 나누니 머쓱하다. 28살이 되기까지 나는 시간을 얼마나 낭비해 왔는지. 이런 낭비벽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왜 이렇게 시간은 빨리 가느냐고 친구 멱살이나 붙잡았는지. 뒤늦게나마 팩트치료를 받으니 추레한 지난날을 반성하게 된다. 이러다간 겉만 늙고 속은 설익은 사람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다. 잘 익은 듯한 수박을 철철철 흐르는 계곡물을 벗 삼아 쫙- 갈랐는데 덜 익은 상태면 어떠한가. 그렇다, 참 별로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차근차근 성장한 끝에 얻은 타이틀이 겨우 별로인 사람이라니 얼마나 끔찍한가. 같잖은 상상만 해도 당장 철학해야만 할 것 같다.
여담으로, 존경하는 천병희 선생님께서 번역한 루키우스 세네카의 <인생이 왜 짧은가>는 총 4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 마음의 평정에 관하여, 섭리에 관하여, 행복한 삶에 관하여. 모조리 소개하고 싶지만, 아껴두겠다. 아무리 지지고 볶고 난리를 쳐도 얻기 힘든 게 사람 마음인데, 고작 글 조금으로 사람 마음을 뒤흔들어 놓으니 재미있다. 깊은 문장에 형광칠을 하다 보면, 어느샌가 형광펜이 메말라 버릴 정도. 말라 붙은 형광펜을 새로이 채우고 다른 철학자를 만날 생각을 하니 슬쩍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