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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고 Mar 08. 2021

인생 그림

다들 하나쯤은 있잖아요(?)

미술관 문턱이 거대하게 보였던 적이 있다. 나와 맞지 않는 공간이란 생각에서였다. 정규 교육과정에서 12년에 걸친 미술 교육을 받아도 깨우친 바는 전무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그려진 거대한 그림이나 반 고흐, 피카소 등 유명한 이름이 붙은 그림들에도 무미건조했다. 감성 부족인가. 공교육은 대단한 그림이라 설명했지만, 감흥은 없었다. 대신 미술관에서 근사한 그림을 봐도 아무 감정이 없을까 두려웠다. 무지한 사람처럼 말이다. 무지한 건 맞지만, 그 무지함을 실제로 마주하는 건 하나의 두려움을 깨는 행위다. 그 용기가 나지 않았던 나는 미술관이라면 질색부터 했다.


그러던 2014년 겨울, 영국을 방문할 일이 있었다. 런던-에든버러-글래스고에 걸친 2주 일정이었다. 런던 필수코스에는 빅벤, 런던아이, 대영박물관 그리고 내셔널 갤러리가 있었다. 남들 다 간다니깐 나와 친구들도 자연스레 일정에 넣었다. 내가 이런 곳을 와도 되나 싶었지만, 모른 척했다. 인생에서 영국 갈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렇게 일종의 의무감에 갤러리에 입장했다. 생각보다 별 건 없었다. 누군가는 그림 앞에서 몇 시간이곤 머무를 수 있다고 하지만, 관광객의 성지라 불리는 그곳엔 그래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눈대중으로 그림을 넘기기 바빴다. 당시 내셔널 갤러리에서 유명한 그림 중 하나는 반 고흐의 <해바라기>였다. 나는 눈으로 이쁜 그림, 안 이쁜 그림 판결을 내리다 휴대폰 세례를 받고 있는 해바라기를 발견했다.


반 고흐, <해바라기> 1888년.

충격적이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명작을 실제로 봐도 나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림에게도 나에게도 실망이었다. 주구장창 이쁨과 안 이쁨 판결을 내리던 나는 실망감에 판결 내리는 것조차 잊었다. 온갖 미사여구가 덧붙여진 혹은 그렇게 기억되고 있는 그림은 어떠한 아름다움도 내뿜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의 사진 욕구를 풀어주는 존재로 전락해 있을 뿐이었다. 한편, 사람들이 찬사를 보내는 그림에 환호할 수 없는 나 자신에 분했다. 큰 기대는 말라는 네이버 블로거들의 말이 맞았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나와 친구들은 고흐의 <해바라기>가 생각보다 별로라며 뒷담화를 깠다. 우리가 정말 미술을 모른다는 자책과 함께. 물론, 인생에서 "그 그림 저는 쌩눈으로 봤어요"란 타이틀을 얻은 자부심이 생겼지만 말이다. 즉, 나는 앞으로 도도한 한 마디가 가능하다. "그거 별로던데?" 어쨌거나 저쨌거나 미술은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은 한껏 부풀었다.


르누아르, <두 자매> 1881년.

이후에도 어색한 미술과 친해지려는 은근한 수작 혹은 "나 그거 눈으로 봤어요!" 타이틀을 따기 위한 움직임은 가끔씩 있었다. 어느새 요령을 갖춰 미리 배경지식을 찾아보거나 설명을 자세히 읽는 게 도움은 됐다. 덕분에 내가 이쁜 그림과 안 이쁜 그림 판결을 내릴 때, 그 뒤에 휘황찬란한 근거를 댈 수 있었다. 표면상으로 내가 좋아했던 스타일은 모네나 르누아르 같은 인상주의 그림들이었다. 그래서 "어떤 그림 좋아해?"라는 물음이 오면 인상주의 그림 애호가처럼 나를 소개한 뒤 겉만 번지르르한 이유를 덧붙였다. "인상주의는 말이야, 사물이 빛에 따라 달리 보이는 걸 활용하기 시작했어. 그렇게 흐려진 윤곽은..." 입은 아름다움을 말했고, 실제로 그런 스타일을 선호하긴 했지만, 뭐랄까. 흔들리는 감정선(?)의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렇게 수박 겉만 엄청나게 할짝거리던 나에게도 그림 앞에서 멈춰버리는 순간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나는 감히 그 그림을 내 인생 그림이라 칭했다. 희대의 명작을 찾아 외국으로 떠날 것도 없이 덕수궁 석조전에서 펼쳐졌던 조그만 전시에서 말이다.


이쾌대,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1948년?


내 인생 그림은 20세기 중반 활동했던 우리나라 화가인 이쾌대(1913~1965)가 그렸다. 이름은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역사적으로 엄청나게 의미 있는 그림은 아직 아니다. 화가는 6.25 전쟁에서 서울에 있다가 인민군 편에 들었고, 곧 포로로 잡혔다. 남북 포로교환 당시 북한을 선택한 그는 전후 우리나라 미술계에서 금기처럼 여겨졌다 슬슬 해금됐다. 위 그림은 1948년 전후로 그려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마저도 확실치 않다. 


그림 밑에 담긴 설명문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작가는 배경과 복장, 소품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냄과 동시에 정면을 바라보는 당당한 자세와 굳게 다문 입술, 부릅뜬 눈으로 엄격하고 자신감 넘치는 기운을 내뿜고 있다. 여기에는 시대와 민족에 뿌리를 둔 서양화가로서, 현실과 자신을 직면하여 그려내겠다는 선언이 담겨있다.

전시에선 조금 다르게 표현했던 것 같다. 자화상의 당찬 기운을 일제강점기, 남과 북으로 갈린 현실 등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이상향을 추구하겠다는 작가의 의지로 말했던 것 같다.


작가의 당찬 의지. 짤따란 설명을 읽자 무언가 짜릿하면서 그림과 내가 통하는 게 느껴졌다. 이런 게 교감인가. 하이데거의 표현처럼 그림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상을 추구하겠다는 의지. 푸른 두루마기에는 우리나라의 민족성이 담겨 있고, 중절모는 인텔리의 상징이다. 배경으론 여러 차례 풍파가 왔다 갔음에도 포근한 정감을 풍기는 우리나라 땅이 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이쾌대의 눈빛. 닥쳐올 미래를 자신의 선택과 이상으로 풀어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이것들이 한 데 어우러져 나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특별함을 느꼈던 이유를 구태여 말하자면, 나 역시 비슷한 상황에 있었다. 누구나 겪을 방황의 시간이다. 혼란과 혼란이 가득한 순간, 나는 여러 선택지들 사이에서 고민해야 했다. 어떤 선택이 옳은지 가늠하기 어려웠던 나는 방학숙제 마냥 판단을 미루고 있었다. 그때 마주했던 게 이 그림이다. 그림은 당당하게 "난 이럴 건데?"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설명란은 이 작가가 6.25 중에 월북했다고 말한다. 그 당참은 북한에서도 유지됐을까. 그는 이상을 추구했던 걸 후회했을까. 죽기 직전 그린 자화상이 있다면, 그 눈빛엔 무엇이 담겨 있을까. 물음과 물음이 이어져 그림 앞에 오래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북한에서 고통을 겪었을지 알 리는 없지만 혹은 높은 확률로 그럴 것만 같지만, 그림 속 화가는 당당했고 당당하다. 그리고 화폭 너머 나에게도 말하는 듯하다. "언제까지 우물쭈물할 거냐, 어깨 펴 임마." 그 당돌한 인상은 전시를 둘러보고 나서도 잊히지 않았다. 처음 느낀 여운이 사라질까 두려웠던 나는 그것이 담긴 엽서로 시간을 간직하고자 했다. 


나만의 프라이빗 컬렉숀

인생 그림을 만난 이후, 나는 미술관 문턱이 전보다 뭉툭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문턱이 한없이 높아 보였던 건 내가 무지해서가 아니었다. 즐길 줄 몰라서였다. 전에는 유명한 그림이라면 무작정 감동을 느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이 때문에 전시를 무감각한 채로 빠져나올 때면 실패감만 맛봤다. 그러나 이제는 그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친구 사귀러 가는 자리처럼 여긴다. 모든 사람들이 나와 맞지는 않듯이 그림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전시는 그런 전시도 있는 것일 뿐이다. 예쁜 사람이 있듯 예쁜 그림이 있고, 나와 잘 맞는 사람이 있듯 나와 잘 맞는 그림이 있다. 대신 정말 예쁘거나 조금이라도 말이 통하는 그림이 있으면 이제는 사수하려 한다. 그날의 만남을 엽서에나마 두고두고 간직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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