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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서 지킨 것, 지면서 잃은 것

by 김필영


결혼 전, 나는 많이도 남자친구들과 싸웠다. 그들이 잘못했을 때도 있었고 그저 싸움자체를 많이 했던 걸 보면 그냥 내가 조금 시비를 잘 거는 성격인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싸우다가 싸우다가 싸우는 가운데 만약 내가 직업적으로라도 잘 풀렸다면 어쩌면, 나는 지금도 자기 확신을 가지면서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음속 깊이 아주 단단한 '내가 맞아'라는 믿음을 가지고서.

그런데 나는 운이 좋게도 일이 지지리도 잘 풀리지 않았고, 명석하지도 않은 덕분에 세상 많은 일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싸움 때문이었는지, 돈이 없어서였는지, 성격이 더러워서였는지 많던 남자친구들은 내 곁을 모두 떠나갔다.





멍하고 화내는 시간 사이를 오가며 나는 자주 우리 집 2층 계단 쪽 창문에 앉아서 버려진 것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굽이 나간 부츠, 생명력이 다한 것들. 결국 버려지는 것들. 그런 것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쩐지 나 역시 그런 존재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지는 것에 대해 조금은 호의적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정말로 누군가의 말처럼 지는 게 이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한 게 틀렸을 수 있다.


그때부터 사람들에게 졌다. 단단한, 내가 맞아라는 것을 계속 없애려고 노력했다. 결국 그것이 진짜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좋은 배우자를 만난 탓인지 몰라도 나는 결혼 10년 차,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과거를 아무리 돌이켜봐도 결혼 이후 내가 싸웠다, 큰 소리로 한참을 누군가와 말을 주고받았다 하는 적은 없었다. 딱 한 번 집 변기가 똥으로 넘쳐났을 때, 방송을 해주지 않았던 경비실 아저씨에게 지금 똥물이 넘친다고요!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그것도 한마디였지, 그 이상 화를 내지는 못했다. 대신 꼭대기층까지 한 층 씩 변기를 쓰지 말아 달라고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는 방향을 택했다. 방송을 해주지 않으려고 하셨기에.






그런데 바로 어제 그 나의 화내지 않음이 과연 올바른 방향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누군가와의 소통 중에서 전혀 소통이 안 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는 통화를 하는 사이, 누군가와 줌미팅을 했고, 아이들을 데리고 왔고, 다이소에 노끈을 사러 갔다. 다이소 노끈을 고르는 사이 계속 10분 뒤 통화, 10분 뒤 통화가 반복되었다.

팽팽하게 의견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던 게 몇 시간쯤 되었던 것 같다. 나는 한발 양보했고 그는 양보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양보 안, 절충안도 먹히지 않았으니 결국 의견 조율은 실패한 셈이다.

고민했다. 계속 내 의견을 밀어붙일 것인가? 내가 얻은 것은? 사실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얻는 거라기보다는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관을 지킬 수 있었기에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때 그냥, 100%의 양보를 선택했다.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거울을 보니 눈에 실핏줄이 터져있었다. 얼마나 신경을 쓴 걸까.



휴대폰을 켜니 이혼숙려캠프라는 프로그램이 나온다. 자신의 바람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서 웃는 남자, 자신은 잘못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여자를 바라보며 품격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품격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사실 정말 할 말이 많지만 노끈도 잘 골랐고, 아이들도 집에 잘 데리고 왔고, 양보도 했고, 화도 내지 않았으니 할 말은 하지 않겠다. 책장을 정리하면서 좋은 관계는 더 돈독해지고, 좋지 않은 관계는 자연스럽게 정리가 된다. 신기하다. 이제 4묶음의 책을 버렸고, 1묶음의 책을 판매했을 뿐인데. 하지만 사실은 오늘 하루동안 중요한 것을 잃었다. 그게 뭔지는 밝힐 수 없지만 아마도, 자연스럽게 밝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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