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적 삶을 떠나 능동적 삶으로 가는 길
자주 가던 카페가 어느 날 갑자기 식상해졌다.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것일까? 이왕이면 아예 동네를 바꿔 새로운 장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평소에 잘 가지 않던 강북의 한 동네를 탐방하던 중에 여유로워 보이는 한옥카페가 눈에 띄었다.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카페는 이미 만석이였지만, 마당에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테이블이 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찬찬히 인테리어를 살펴보니 원래 모습을 보존해 한옥의 멋을 최대한 살리려는 노력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건축물을 음미하며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곧 테이블이 생겼고 시원한 아이스라테를 마시며 하늘을 바라보면서, 자유함은 작은 행위를 통해서도 느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어 옆 테이블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는가 싶더니, 앞 테이블, 뒷 테이블의 조금 과하다 싶은 정도의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분명 공공장소인데, 모두들 소통의 방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듯했다. 소곤소곤 대화하는 사람들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멋진 한옥카페가 왁자지껄 시장판처럼 느껴졌다. 조용히 담소를 나누며 기둥 하나에서도 느껴지는 지난 시간의 흔적을 상상해보려는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우리의 소통방식은 왜 이렇게 점점 요란하고 부산 해지는 걸까?
대화하는 사람들에게서는 해소되지 않은 각자의 욕구와 불안 (ANXIETY)이 묻어난다. 내면에서 솟구치는 욕구가 채워지고 불안이 어루만져지는 과정이 있어야 우리는 다음 단계의 성취를 위한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욕구와 불안이 외부로 표출되고 채워지면서 내면이 단단해지는 순환과정이 필요하다. 예술활동이나, 운동, 취미생활 등은 긍정적인 순환과정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대화를 통한 소통도 그러한 순환과정의 하나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적절히 이뤄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Face to face로 서로 마주하고 대화하는 자연스러운 소통방식이 줄어들고 SNS 같은 기술과 기계를 통한 방식의 소통이 늘어나면서 해소되지 못하는 내면의 욕구(특히 관계 욕구)는 늘어난다. 그렇다 보니 누군가 이야기 대상이 생기면 폭풍처럼 이야기를 토해내는 경향이 있다. 해결되지 않은 자신의 욕구가 존재하다 보니 상대방은 아랑곳하지 않고 속사포처럼 언어의 폭격을 퍼붓는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행복감을 느끼는 기반을 안전한 공간,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신체가 보호받을 수 있는 상황, 안정된 정서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예컨대 지금의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슬프다면, 우울하다면, 내 안에 자리 잡은 뿌리 깊은 관념이나 생각의 패턴을 돌아보는 것에서 시작하면 어떨까? 이런 노력이 없이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위로받고 치유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자신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이 부족해서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자신이 어떤 패턴으로 살고 있는지, 그 패턴이 생긴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욕구가 이뤄지지 않아서 그 패턴이 반복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남의 손에 쥐어줬던 열쇠를 되돌려 받아서 스스로의 마음을 열고 그 속으로 용기 있게 들어가야 한다.
수동적인 삶을 떠나 능동적 삶을 살고 싶다면 먼저 내 안의 좌절된 욕구를 찾아내야 한다. 그러면 대화를 하더라도 바람직한 형태의 대화가 가능하다. 대화의 상대방이 하나의 독립적 인간임을 인정하지 않을 때에는 반대의 의견을 비난으로 받아들이고 방어에 나선다. 그 결과로, 대화가 부정적으로 흐르고 감정이 실린 채 목소리의 데시벨은 올라간다. 반면, 내 안의 좌절된 욕구가 무엇인지를 파악한 사람은 이에 기반한 대화를 한다. 즉, 자신의 욕구를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욕구를 인정해준다. 이때, 상대방은 내 의사에 동의하지 않을 욕구와 자유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러므로 나는 나의 욕구에만 집중하면 된다.
상대방에게 듣고 싶은 한 마디가 무엇인가? 그 한마디를 왜 그 사람에게 듣고 싶은가?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다. 잘했다고, 사랑한다고, 보호해주겠다고, 안심하라고. 그리고 그것을 위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