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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호 Oct 20. 2020

<블루 아워>가 매닉 픽시 드림 걸을 비트는 방법

[영화의 단상] 영화 <블루 아워>(하코타 유코, 2019) 리뷰


이 글은 영화 <블루 아워>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버킷햇을 목에 걸고 목장 젖소에게 해맑게 인사를 건네는 여자. 막대 아이스크림과 콘 아이스크림을 사이에 두고 진심으로 고민하는 여자. 맛이 시원찮은 카페 음료는 “포기하지 않는다”며 단숨에 들이키지만, 친구의 부모님이 주신 맛없는 주전부리는 아무도 모르게 휴지로 뱉어내는 여자. 영화 <블루 아워>(하코타 유코, 2019)에서 배우 심은경이 분한 기요우라는 얼핏 보면 ‘매닉 픽시 드림 걸(Manic Pixie Dream Girl)’의 모습과 유사하다.


2007년 영화 평론가 네이선 라빈이 처음 사용한 매닉 픽시 드림 걸은 주로 할리우드 영화 속 으레 보이는 특정 여성 캐릭터 부류를 지칭한다. 네이선 라빈의 정의에 의하면 매닉 픽시 드림 걸은 “감성적인 작가의 열띤 상상 속에만 존재하며 젊은 남성들이 삶, 모험, 미스터리를 수용하도록 지도하는 여성”을 뜻한다.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오드리 헵번부터 <500일의 썸머>(2009) 주이 디샤넬까지, 멜로 영화의 수많은 여성 등장인물이 이러한 매닉 픽시 드림 걸의 한 지류로 지목되어 왔다.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발랄한 제스처로 남성 주인공에게 콩깍지를 씌우고 영화적 모험의 세계로 인도하는 캐릭터들 말이다. 이러한 캐릭터는 자율적으로 행동하고 의사를 결정한다는 주체적인 여성의 모습을 표현한다. 하지만 동시에 남성 주인공의 구원을 조력하기 위한 장치로서 기능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여성 묘사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보인다.


<블루 아워>의 기요우라는 이러한 타입의 변주형이다. 그녀는 남성 주인공이 아닌 여성 주인공을 비일상으로 인도하고 구원으로 이끈다. 스나다(카호)가 시골 고향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기요우라는 직접 좌측 핸들(영화의 배경인 일본은 우측 핸들 차량 사용이 기본이다) 중고차를 운전하여 스나다를 고향으로 데려간다. 고향의 부모님 집, 주점, 목장, 노인 요양원에서 스나다가 회의감과 우울함에 젖어들 때쯤이면 기요우라는 언제나 천진한 표정과 말투로 스나다의 기운을 북돋워 준다. 출신에 대한 자괴심이 균열을 내고 업무 스트레스가 기어이 무너뜨린 스나다의 자존감을 다시 구축하는 일은 기요우라의 몫이다. 그녀는 스나다의 유년 시절 이야기에 애정 어린 관심을 기울이고 ‘촌스럽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라며 존재 가치를 일깨운다. 두 주인공의 여행은 충동에서 시작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스나다는 본인의 내면을 마주하고 심연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진 셈이다.


기요우라가 매닉 픽시 드림 걸의 변주인 이유는 단순히 그녀가 여성 대 여성 연대 관계 서사의 한 축이어서만은 아니다. 영화의 결말, 기요우라는 사실 스나다의 또 다른 자아였음이 밝혀진다. 노래방에서 회사 동료들에게 “미친 텐션”을 보여준 취중 스나다가 있듯이 기요우라는 스나다 내면에 존재하는 여러 자아 중 한 유형이다. 기요우라가 일관되게 유쾌할 수 있었던 이유는 스나다의 쾌활하고 긍정적인 면만 똑 떼어내어 하나의 인물로 주조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심은경의 연기가 자칫 단편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유도 애초에 기요우라가 단면성이 짙은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 내내 지속한 기요우라의 발랄한 행보는 타인을 위한 맹목적 복무가 아니라 스나다 스스로 무력감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블루 아워>의 기요우라 캐릭터는 그간의 매닉 픽시 드림 걸을 유쾌하면서도 무해한 방향으로 비틀어 접근한다. 영화 속 관습적인 여성 묘사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타인을 위한 인물 희생 없이도 매력적인 캐릭터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충분한 의의를 가진다. 기요우라의 청량함이 기분 좋게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감독: 하코다 유코

출연: 카호, 심은경 등

장르: 여행 영화, 여성 영화

수상: 34회(2020) 다카사키 영화제 최우수 여우주연상(심은경)

쿠키: 쿠키영상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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