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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호 Jul 02. 2021

영화 <배드 지니어스> 커닝보다 나쁜 것

<배드 지니어스>(2017)

<배드 지니어스>(나타우트 폰피리야, 2017)는 태국 고등학생 일당이 학교에서 저지르는 시험 부정행위를 유쾌한 케이퍼 무비 장르로 풀어낸 영화다. 주인공 린(추티몬 추엥차로엔수키잉)과 친구들은 온갖 재치를 동원해 부정행위를 도모하는데 규모가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미국 대학 입학시험인 STIC 커닝에 도전장을 내민다. <배드 지니어스>는 매끄러운 연출과 무해한 캐릭터, 케이퍼 무비 장르 특유의 통통 튀는 리듬감이 적절히 배합된 작품이다. 2017년 국내 개봉 당시 1만 8천명을 살짝 밑도는 관객을 동원했는데 가진 매력에 비해 아쉬운 관객 스코어를 기록했다.


숫자로 매겨지는 값어치

영화의 주된 재미는 기발한 방식의 커닝이지만 이외에 숫자로 가치를 매기는 다양한 협상 장면도 눈여겨 볼만하다. 린은 영화에서 두 차례에 걸쳐 등장한다. 그중 두 번째 등장 장면, 중학교 3학년의 린은 초장부터 복잡한 셈을 해가며 원하는 바를 얻는다. 우수한 성적의 린을 탐내는 명문고 교장 앞에서 린은 당돌한 자세로 협상에 나선다. "여건에 비해 돈이 많이 드니 학교가 알아서 방법을 제시하라" 식으로 전술을 펼친다. 수학 경시대회 1등인 린은 고등학교 1년 치 등록금 12만바트(약 422만원)에 각종 부대 비용을 단숨에 암기로 계산하며 교장을 압박한다. 결과는 대성공. 교장은 등록금에 점심 비용까지 지원하겠다고 약속한다. 물론 린의 명석함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협상이다. 린은 우수한 중학교 성적과 수학 경시대회 1등으로 증명된 자신의 능력을 현란한 말 놀림으로 다시 한번 입증하며 12만바트+a에 달하는 장학금과 취득한다. 이때 린의 능력은 12만바트+a 상당의 가치로 환산되는 것이다.


극 중 린은 자신의 능력과 거액의 돈을 맞바꾸려는 협상 테이블에 종종 앉게 된다. 금수저 급우 팟(티라돈 수파펀핀요)이 린에게 학교 시험 한 과목당 3천바트(약 11만원)의 값을 책정한 거래를 제시한다. 검은 제안에 쉽게 응할 것 같지 않던 린의 도덕률을 무너뜨리는 것 역시 숫자다. 린은 팟과 대화하며 학교가 학부모로부터 뒷돈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린의 가족 역시 다르지 않았다. 린의 아버지는 입학금 명목으로 린 몰래 학교에 20만바트(약 704만원)를 납부했다. 린이 교장과 협상에서 취한 1년 치 장학금을 크게 웃도는 금액이다. 입학 전 협상에서 이긴 줄만 알았던 린은 이 손해를 메꾸기 위해 집단 부정행위 공모에 뛰어든다. 시험 한 번에 예상 수익 23만 4천바트(약 823만원). 린의 몸값 아니, 두뇌값은 거듭 고점을 갱신한다. 여기서 변하지 않는 것은 린의 능력을 계량하는 단위가 숫자(돈)라는 점이다.


가르쳐주지 않는 가족과 학교

몇 번의 커닝 성공에 힘입어 린과 팟의 부정한 사업은 확장을 계속한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린의 사기행각은 결국 덜미가 잡힌다. 학교는 린에게 징계를 내린다. 원칙은 퇴학이지만 교내 장학금 취소와 교외 장학금이 걸린 퀴즈 프로그램 출전권을 박탈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된다. 뒤이어 린의 아버지가 딸을 야단 낸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거냐”고 힐문하는데 영화 속에서 ‘진짜 무엇을 잘못했는지’ 가르쳐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아버지와 교장으로 표상된 가족과 학교는 린에게 무엇이 잘못이고 그것이 왜 잘못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교장은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라는 매정하게 선을 긋는다. 교장이 린의 아버지에게 “집에서 기본적인 예의도 안 가르쳤냐”고 질책하는 대목과 아버지가 린을 혼내며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내 탓”이라고 자책하는 대사는 가정과 학교가 윤리 교육을 서로에게 미뤘음을 짐작하게 한다. 1, 2차 사회화 기관이 마땅한 도리를 방기하는 동안 린은 능력껏 자신의 가치를 활용하는 게 좋은 선택이라 스스로 판단한다. 린은 우수한 성적을 유지해 학비를 버는 것, 부당하더라도 똑똑하게 이익을 얻어 아버지에게 값비싼 옷을 선물하는 것 모두 좋은 선택이라고 여긴다. 린에겐 커닝했다는 사실보다 가계에 부담을 지우는 게 더 나쁘다. 다시 말해, 린에겐 커닝보다 무능력이 더 나쁘다.


무엇이 정말 나쁜지 모르는 세상

프레임 바깥으로 나와보자. 지난 6월을 장식한 키워드는 '능력주의'였다.  가지 과정을 생략하고 6 11, 국민의힘 대표로 이준석 후보가 선출되었다. 각종 할당제에 반대하고 '공직후보자 자격시험' 공언하는 이준석 대표의 당선에 능력주의 역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흘이 지나 6 21 박성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청와대 청년비서관으로 발탁되었다. 20 대학생을 청와대 비서관에 앉히는 깜짝 발탁은 후폭풍을 몰고 왔다. 이번에는 공정과 능력주의가 결합되어 인사의 타당성을 공격했다. "행정고시를 통과한 5 사무관이 수십  일해도 오르기 힘든 1 공무원직을 시험도 치르지 않은 대학생에게 주는 것이 공정하냐" 것이다. 많은 언론이 들불같이 번지는 분노에 우려를 표했다. 예컨대  일간지 논설위원은 이번 이슈와  가지 사례를 들며 "학력주의와 합격주의로 차별을 정당화하는, 뒤틀린 정”이라고 진단했다.


글쎄, 뒤틀린 공정과 시험만능주의가 어떻게  사회의 기본의식으로 자리 잡았는지는 아무도 거론하지 않는 듯하다. 의무교육 진입과 동시에 각종 증명과 성취의 굴레로 내몰리는   나라 미성년의 현주소다. 증명에 수반하는 과정은 대부분 시험이다. 교육 현장에서 시험 점수는 학생의 유망함을 판별하는 척도로 자리매김했다. 높은 성적은 학교와 교사의 지원이 뒤따랐지만 낮은 성적은 때때로 체벌로 이어지기도 했다.(체벌 금지 항목이 포함된 학생인권조례가 신설되기  이야기다) 학생들은 독려와 엄벌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머리 빼앗기 경쟁을 반복했다. 높은 성적이  ‘상위권 대학 입학' 이루게 하고 나아가 ‘성공한 직업' 갖기 위한 발판이 되리라는 신화가 교실 안팎에 뿌리내린  오래다. 2000년대 "공부에 매진하라" 메시지를 다양하게 변형한 급훈이 유행을   있었다. 과도한 입시 경쟁이 학급 지도이념까지 침투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성인이 된다고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취업을 위한 기본 요건으로 스펙 n종을 말하는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경쟁과 시험은 도무지 피할  없다. 능력주의를 맹신하는 반응은 ‘한국에서 살아남기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던 경험에서 기인한다. 최고의 생존법은 성과를 눈에 보이는 지표로 보여주는 것이다.(지표의 모양은 대개 숫자다)


이제껏 각종 지표를 요구하길래 그 기준에 맞추어 살았더니 갑자기 능력주의가 나쁘다고만 한다. 능력주의가 왜 나쁜지 설명하지도 않고 능력주의 만연을 기른 현교육의 병폐를 지적하지도 않는다. 구린내 나는 원인을 고치려는 노력도 없고 모범적인 변화의 의지도 없이 앞선 목소리를 낸다면 또 하나의 위선으로 전락할 뿐이다. 린은 학비 부담을 덜고 싶어했다. 팟과 그레이스(에이샤 호수완)는 원하는 것(교내 연극 참여, 유학)을 하기 위해 높은 성적이 필요했다. 이들의 욕망은 결코 나쁘지 않았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방식은 삐뚤어졌다. <배드 지니어스>에서 학교는 린을 지도하지 않는다. 교칙 위반이라며 혼내는 데 그친다. 린과 일당의 검은 술수가 만들어진 가장 큰 배경엔 고득점 경쟁을 강요하는 학교가 있다. 대체 왜인지 모르겠으나 교내 연극에 참여하려면 일정 학점을 충족해야 한다는 학교의 지침은 각종 기회를 인질 삼아 성취와 입증을 요구하는 구조를 풍자한다. 능력주의가 뒤틀린 공정이라면 이토록 망가진 가치로 사람들을 내모는 곳부터 손을 봐야 한다. 아직 탄착점을 제대로 맞추려는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감독: 나타우트 폰피리야

출연: 추티몬 추엥차로엔수키잉, 차논산티네톤쿤

쿠키: 없음

수상: 제58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편집상, 신인상(추티몬 충차로엔수킹), 제21회 판타지아국제영화제 슈발누아 경쟁부문 감독상, 아시아영화 관객상 금상 등

이용가능플랫폼: 왓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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