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한 달 살기로 책이 출판되고, 아는 이는 서울에서 제주로 이사하여 자연과 벗 삼아 아이를 키우고, 그곳에 없는 우리는 효리네 민박을 보며 아름다웠던 제주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찬란했던 제주, 우리는 왜 이제야 그곳을 알게 됐을까요? 최근에서야 알려진 제주 4.3 사건, 그리고 역사에 유배지로 기록되었던 이 삭막한 제주는 언제부터 광활하게 펼쳐진 평원과 말이 유유히 걸어 다니는 초원이 생겼을까요?
필자는 제주에서 만났던 책 한 권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성이시돌 목장, 한림 수직, 한림 신협, 이시돌 병원, 개척 농가, 교육시설, 양로원, 요양원, 호스피스, 마을 공동목장 이 모든 것을 이루고 자신을 우상화하지 말라고 하며, 공적인 상을 마다하셨던 분, 결코 자신의 힘이 아니라고 하며 제주를 살리셨던 분, 우리는 제주의 천사, 맥그린치 신부를 기억해야 합니다.
작년 9월, 늦은 여름휴가로 제주도를 다녀왔습니다. 제주를 관광하며 다녔던 그곳이 맥그린치 신부에 노력의 흔적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제주에서의 순간을 그리 쉬이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장소 중에 필자는 성이시돌 목장을 방문했습니다. 초록으로 뒤덮인 초원을 보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유유자적 걸어 다니는 말을 사진에 담기도 하고, 난간에 올라 하늘을 바라보며 다녔던 그곳에는 삼위일체 성당이 있었습니다. 왜 목장에 성당이 있을까 라는 쉬운 의문 조차 품지 않은 채 향한 발걸음에는 큰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삼위일체 내부는 다른 성당과 별 다를 것이 없었지만 십자가 모양으로 된 옥상을 보러 올라간 자리에는 사람 형상으로 만들어진 십자가의 길이 있었고, 길이 끝날 무렵에는 거대한 호수 하나가 있었습니다. “천국이 있다면 여기일 거야.”라고 생각할 만큼 공간에서 감명을 받았던 것은 처음이었기에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순간이었습니다.
제주 = 자연이라는 공식이 당연하게 성립되기까지 그곳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우리나라 지도에서 유배지를 찾아 검색하면 총 17곳의 유배지가 나오고, 그중에 10곳이 바로 제주에 있습니다. 꿈의 터전인 지금과 달리 유배지로 쓰였던 제주, 절망과 불행이 공존했던 척박한 삶의 공간이었습니다. 지금에서야 알려진 제주 4.3 사건, 일제 강점기의 해방을 맛보기도 전에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5.10 총선거를 반대했던 제주도민들이 무고하게 희생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서북청년단 등의 극우단체와 군경토벌대의 의해 2만 5천 명~3만 명이 희생되었던 제주도민들의 상처가 사라지기도 전에 발발된 6.25 전쟁, 상처에 상처를 거듭하고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이 땅에 1952년 6월 한국으로 가라는 임시 배정을 받았던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그 신부가 바로 맥그린치 신부입니다. 순천 성당의 보좌신부를 맡아 미사를 집전했고, 1954년 4월에 제주중앙성당 공소인 한림성당에 초대 주임신부를 맡게 되었습니다. 열악한 땅이었기에 성당이라는 건물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신자들의 집을 빌려 겨우 미사를 들인 시기였습니다.
이런 제주가 어떻게 지금의 찬란한 제주로 변할 수 있었을까요?
[아래의 정보는 책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그때의 모습은 아프리카 국가 중 가장 후진국 수준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인구 28만 명에 지역 총생산량은 고작 23억 원이었고, 1인당 소득은 약 8천 원이었습니다. 식량 부족으로 매년 굶주리는 인구가 3~4만 명에 이르렀으나 대책은 없었고, 4.3 사건의 비극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6.25 전쟁으로 약 15만 명이 피난민이 제주에 밀려와있었습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육지로 나가 암퇘지 한 마리를 사들여 도민들에게 나눠주고 주민들과 함께 척박한 땅을 일궜습니다. 이는 아시아 최대의 양동 목장인 성 이시돌 목장이 탄생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4H클럽을 만들어 청년 교육을 교육했고, 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해 경제적 자립의 토대가 되도록 했습니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해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설립했고, 수익금으로 소외계층을 위해 경로당, 요양원, 유치원, 노인대학 등을 설립해 운영했습니다. 2002년에는 저소득층 사람들도 존엄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무료 간병 시설인 호스피스 병원 설립을 추진했고, 이시돌 농촌산업 개발협회를 만들어 각종 사회복지사업을 벌였습니다. 맥그린치 신부의 경험은 농. 축 분야를 귀동냥 삼아 살펴본 것이 다였고, 초등학교 시절 수의사였던 아버지가 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구경한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고작 이런 경험이 지금의 제주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신부님의 희생도 있었지만 제주도민들의 협동심과 성실성이 뛰어났기에 일구어낼 수 있었습니다. 매 순간 위험천만한 일들이 있었지만 기도를 통해 이겨냈다고 말씀하시는 신부님,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에게 자연스레 그분의 존재를 심어주는 역할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주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성이시돌 목장에 삼위일체 대성당이 있는 것은 신부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이 도왔다는 깊은 뜻으로 다가옵니다. 천주교 신자이기에 거리낌 없이 신부님에 대한 책을 샀지만 비 신앙인들도 신부님의 존재와 희생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이렇게 글을 써내러 갔습니다.
내생적 지역개발로 성공한 세계문화유산 제주특별자치도의 현주소는 생태도시, 관광 휴양도시, 국제 자유도시, 평화의 도시, 다양한 수식어를 가진 특별함을 지닌 땅이 되었습니다. 버려진 땅, 척박한 땅, 황폐한 땅에서 이런 찬란한 제주가 되기까지의 그 이면을 우리 모두가 알고 기억해야 합니다. 맥그린치 신부님 그리고 제주도민들, 제주에 발자국을 찍을 때면 우리는 그분들의 숨결을 느끼며 감사해야 하는 마음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