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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곰 Apr 08. 2020

식민사관이라는 유령

식민주의 너머 역사읽기 - Part 1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의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자 귀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천황은 떨리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조건 항복……. 


이제까지 천황의 신민이기를 요구받았던 식민지 조선은 더 이상 식민지로 불리지 않아도 되었다. 한반도에서는 그간 억눌렸던 구호가 터져 나왔다. ‘대한독립만세!’ 꿈만 같았던 독립이 현실이 된 것이다. 비록 남과 북에 각기 다른 정부가 수립되어 서로 전쟁까지 치루기도 했지만, 다시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겠다는 각오와 관련해서는 남과 북이 서로 다르지 않았다. 그만큼 힘들게 얻어낸 독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1945년에 일본이 항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다면 어땠을까? 시인 고은이 지금의 이름 대신에 어린 시절 창씨개명 했던 이름인 다카바야시 도라스케(高林虎助)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고 상상해보자.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서기 3세기경에 일본의 전설 속 인물인 진구황후에게 정벌당한 이래로 천황의 신민으로 살아왔다고 믿고 있고, 조선인들은 일본인에 비해 열등하기 때문에 차별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어떨까?

1987년 나온 소설 『비명을 찾아서』는 이처럼 불편한 상상을 생생하게 그려내면서 베스트셀러로 주목 받았다. 이 소설은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 시도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일본이 미국과 전쟁까지 가지 않도록 이끌었다는 가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자연히 태평양 전쟁이나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폭발 같은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고, 일본이 제국으로 남아서 한반도를 계속 지배하고 있었다. 배경이 되는 장소도 ‘1987년 서울’이 아니라 ‘쇼우와(昭和) 62년 경성’이다. 주인공 기노시다 히데요(木下英世) 역시 자신의 성이 조선식으로 하면 ‘박(朴)’씨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이다.


기노시다는 조선인이었지만 만주에서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한도우(半島) 경금속이라는 대기업에서 과장으로 근무하던 월급쟁이다. 그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순전히 현실적인 욕망 때문이었다. 직장에서 충분한 성과를 내고 있지만 승진은 일본인들에게 밀리고, 마음이 끌리는 일본인 여사원 앞에만 서면 자신이 조선인 남성이라는 사실에 자꾸만 주눅이 드는 것이었다. 그는 평소에 존경하던 일본인 상사가 조선인을 무시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것을 보고 혼자서 이렇게 말한다.

내지인에겐 조선인에 대한 편견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인가? 조선은 일본이 진 십자가라고?…조선인에겐 군인들이 득세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나라고 해서 지금처럼 군부가 권력을 독점하는 것이 걱정이 되고 분하지 않겠냐만, 그것보다도 조선 사람들이 이등 신민(臣民) 취급을 받는 것이 내겐 훨씬 더 심각한 문제다……조선인들이 내지인들보다 못한 것은 사실이다. 내가 조선인이라고 해서 그런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이 일본 제국의 변두리에 자리 잡은 데 근본적 원인이 있는 것이다. 사회 구조가 모든 면에서 중심지인 내지 위주로 되어 있고, 모든 제도가 내지인에게 편리하고 유리하도록 되어 있으니, 원체 특출하지 않으면 조선인이 이 사회에서는 클 수가 없는 것이다.


기노시다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유지시키는 배경에 도사린 사회적 구조를 일상적으로 마주치면서 점차 민족의식을 키워간다. 그는 첫 시집을 발표한 아마추어 시인이기도 했던 만큼 자신의 잃어버린 ‘모어(母語)’로 시를 써보겠다는 열망을 품는다. 하지만 그는 이내 흔들린다. 


‘내가 조선인이니, 조선어가 나의 정당한 언어긴 하지만…… 일본어는 나를 키워준, 고마운, 은혜가 깊은, 양모(養母)인데…… 이제 와서 내가 일본어를 훌쩍 버린다면, 나는 그 은혜를 모르는 폐륜아가 되는 것은 아닌가?’ 


소설의 주인공이 내비치는 고뇌는 대체역사가 아니라 ‘진짜’ 역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너무도 낯설지 모른다. 조선어와 일본어 사이에서 갈등을 한다니, 한국인도 아니라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한국어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고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흔 가까이까지 일본어만을 써왔던 어느 시인의 입장에서 언어를 선택하는 일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였다.

“가슴이 답답해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어로 시를 쓴다면, 내가 과연 지금 일본어로 시를 쓰듯 시를 쓸 수 있을까? 그토록 힘든 수업을 거쳐서 얻어진 기술인데, 매체를 바꾸어도 그대로 쓰일 수가 있을까? 만일 다시 배워야 한다면?’ 시를 쓰는 데 바친 스무 해를 되돌아보면서, 그는 가슴이 막막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소설이 가장 탁월한 면모를 뽐내는 장면이 바로 이 대목이다. 자기 이름으로 나온 시집 한 권을 가지고 싶었던 아마추어 시인에게 언어는 세상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같은 조선인들조차 더 이상 쓰지 않는 민족어를 새로 배우기 위해 그간 익숙했던 언어를 버리려면 세상을 등질 정도의 결단이 필요했다. 당국의 검열과 처벌도 두렵지만, 본 적도 마주친 적도 없는 세상을 위해서 자신의 존재를 걸어야 하는 모험 앞에 고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명을 찾아서』는 제국 일본 바깥을 결코 상상해보지 못했던 식민지 중산층 남성의 복잡한 내면세계를 섬세하게 그려내면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제국 일본 치하에서 벗어나지 못한 식민지 한국이라는 설정은 21세기에 들어서도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 <2009 로스트메모리즈>를 통해 다시 반복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누구나 알다시피 역사는 소설과 달리 흘러왔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전으로 끝이 났고, 한국인들은 한국어를 선택하기 위해서 자신의 운명을 걸어야 할 정도의 실존적 결단을 내릴 필요를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 한국이 아직도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다는 식의 대체역사물이 대중들의 관심을 끄는 건 식민지였던 역사를 청산하려는 열망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도 3.1운동부터 언급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다시는 식민지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식민지와 해방된 조국이라는, 극적으로 다르게 느껴지는 두 현실 사이를 자세히 들여 보면 구분을 어렵게 만들만큼 경계가 모호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비명을 찾아서』를 썼던 소설가 복거일이 그로부터 10년 뒤에 ‘영어공용화론’을 들고 나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민족어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던 그였다. 하지만 작가가 '변절'했다고 말하기도 멋쩍다. 작가는『비명을 찾아서』에서도 주인공의 독백을 통해서 민족어의 소중함만큼이나 국제어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이야기했다. 



‘설령 조선어로 시를 쓸 수가 있다고 해도, 나는 잊혀진 언어로 시를 쓰는 시인이 되는데……’


식민지에서나 해방된 한국에서나, 힘을 키워가는 제국의 언어냐 소수가 되어가는 민족어냐를 선택해야 하는 현실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다만, 소설 속 주인공 기노시다 히데요(木下英世)가 식민지배 아래에서 잃어버린 민족어를 살리는 쪽을 선택해서 박영세(朴英世)가 되어가는 동안 소설 밖 소설가는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정도가 차이였다. 작가에게 소설 속 식민지와 소설 밖 해방된 조국이 처해있는 양자택일의 구도는 다르지 않았다.


현재뿐만 아니라 해방 당시를 봐도 변화의 경계를 구분 짓기가 모호한 지점이 많다. 해방 전후를 겪은 세대가 들려주는 회고담을 듣고 있으면 흔히 생각하던 해방과 거리가 적잖이 느껴지기도 한다.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의 회고록 『나의 해방 전후』에 나타난 해방의 풍경이 그렇다.

해방은 그가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서울에 B29가 날아왔다는 소식을 듣던 평범한 날들 중에 불쑥 찾아왔다. 또래 친구들 중에 조숙한 아이는 만주에서 김일성이 활약하고 있다는 소문도 전하곤 했지만 조선인들만 다니는 학교에서 조선 사람이란 자각을 할 기회는 많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에 친척집에 들렀다가 일본이 항복했다며 사람들이 수군댄다는 말을 전해 들었고, 다음날 학교에 갔을 때 평소보다 늦게 시작된 아침조회에서 일본인 교장이 일본의 항복소식을 전했다. 


해방은 분명 큰 변화를 가져왔다. 담임인 니시하라(西原) 선생은 칠판에 크게 이종환(李鍾煥)이라고 적더니 자기를 앞으로 그렇게 부르라고 말했고, 곧이어 학생들도 한국식 성명을 출석부에 적었다.


그러나 해방이 왔지만 변하지 않는 것들도 많았다. 해방이 된 지 이틀이 지난 17일부터 학생들은 대오를 지어 시가행진에 나섰다. “만세! 만세!” 아이들은 시가행진에 익숙했다. 해방 전부터 일본 말로 “반자이! 반자이!”라고 외치며 해왔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다음날만 해도 새로운 나라에선 행진을 하면서 구호를 뭐라고 할지 몰라 그저 “좋다! 좋다!”라고만 했지만 이내 익숙한 형식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색함은 교실에서도 이어졌다. 출석을 부르면 학생들은 무심코 “하이!”라고 답했다가 급히 “하이, 네!”라고 정정해서 웃음을 자아냈다고 한다. 해방 후에도 욕설이나 ‘너’ 같은 말은 일본어로 튀어나왔고, ‘차렷’ 같은 구령도 아직 없어서 일본어를 직역한 ‘기착(氣)’이란 말을 한동안 임시방편으로 썼다.

이처럼 해방 이후에도 식민지 흔적이 오랫동안 남았다. 오늘날 법정용어들에서도 ‘부작위(不作爲)’나 ‘개전(改悛)’처럼 일상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일본식 개념들을 찾아볼 수 있다. ‘쓰메끼리’를 손톱깎이라고 부를 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생각해보자. 그래서 한국에서 식민 청산이라는 과제는 항상 현재진행형이었다.
 

김영삼 정부가 밀어붙인 조선총독부 철거는 식민 청산을 정책으로 추진한 가장 극적인 사례였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역사 바로 세우기’를 내세워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총독부 건물은 이 당시까지만 해도 경복궁 앞에 우뚝 서있었다. 조선 왕실에서 가장 중요했던 궁궐 앞을 떡하니 가로 막고 서있으니 아무래도 못마땅한 건물일 수밖에 없었다. 독립을 한 지도 반세기가 다 지났지만 아직도 식민 지배가 이어지고 있는 것 같은 불편함도 있을 법했다.

총독부 건물은 식민지배의 대표적인 잔재로 손가락질 받았다. 김영삼 대통령의 남다른 정치적 감각이 이러한 사정을 잡아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경복궁 앞에 70년 가까이 서 있다가 비로소 철거됐다. 조선총독의 관저로 쓰였던 청와대 건물 일부도 역시 이때 함께 철거했다.


철거 발표를 두고 반대하는 이들 역시 목소리가 컸다. 사실, 김영삼 대통령 말고도 이전부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네 마네를 두고 논란이 일곤 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보여주는 의미에서 이 건물을 철거하자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추진하지는 못했다. 반대로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전쟁 중에 불탔던 내부를 수리해서 정부청사로 사용했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1986년부터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였는데, 이 건물을 오랜 시간 철거하지 않고 둔 것은 커다란 상징성 때문이었다. 철거에 반대하는 이들은 자랑스러운 기억뿐만 아니라 오욕의 시간을 떠올리게 만드는 건물 역시도 어쨌거나 보존 가치가 있는 문화재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옛 총독부 건물은 해방 이후에도 미군청이나 중앙청으로 쓰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역사가 어느 정도는 담겨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오랜 논란을 개의치 않고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아예 국민적인 대규모 ‘쇼‘로 만들었다. 1995년 광복 50주년 행사에서 조선총독부 건물 첨탑을 해체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날 첨탑 해체를 구경하기 위해 광화문 앞에만 5만여 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TV 시청률은 역대 광복절 행사 중 가장 높은 28.5%를 기록했다. 식민 청산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이만큼이나 컸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경복궁 앞에 70년 가까이 서있지만 하루아침에 폐기물이 되어 김포매립지로 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한 철거 같은 식민 청산 방식은 문제가 있다는 반성의 목소리가 커졌다. 어느 건축물이 치욕스러운 과거를 떠올리게 하더라도 그것이 보여주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에 보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10년 정도가 지나서 서울시청 건물 역시 철거하자는 주장이 나왔을 때는 이미 식민 청산 ’쇼‘에 대한 반성이 지지를 받게 된 뒤였다. 시청 건물은 일부 보존하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이처럼 식민 청산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일제가 지은 건물은 차라리 눈에 확 드러나기 때문에 청산 대상이 무언지가 명확한 편이다. 반면에 사람들의 머릿속에 담겨 있는 역사관, 즉 ‘식민사관’을 청산하기란 너무나 복잡하다. 역사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지식에 남아있는 식민지배의 흔적을 청산하려면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좋을지 난감해진다.

지식이라는 걸 대체 어디까지 청산할 수가 있을까? 총독부가 만든 단체에서 일한 역사학자들의 명부를 만들어서 그들과 교류하는 학자들까지 싹 다 잡아들이면 청산될까? 아니면 식민사관을 퍼뜨리는 책을 금서로 만들어서 불태우면 어떨까? 만약 이런 식으로 식민사관을 청산한다면 우리는 식민지보다 더 암울한 전체주의 국가를 향하게 될 것이다. 지식은 추상적인 것이라 건물을 철거할 때처럼 다이너마이트를 넣어서 폭파시켜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구름처럼 떠도는 지식은 아무리 강력한 권력자가 잡으려고 움켜잡아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와 흘러버리고 만다. 그래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지식은 더욱 위험하게 느껴진다.

지식의 실체를 원체 파악하기 어렵다 보니 식민 교육에 관한 일본인의 예언 하나가 SNS상에서 급속히 퍼지고 있다. 


"일본이 오늘 패했으나 조선이 이긴 것은 아니다. 일본은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지 교육을 심어 놓았다. 조선이 제대로 일어서려면 백 년이 걸릴 것이다."


이 말을 퍼나르는 사람들은 조선의 마지막 총독을 역임했던 아베 노부유키의 말이라고 전한다. 일제가 공식적으로는 떠났지만, 저들이 심어놓은 식민사관이 우리가 받는 교육 속에 아직도 남아있다고 경고할 때면 이 예언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예언의 출처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발 없는 말이 인터넷 세계를 달려 나가고 있을 뿐이다. 유명한 정치인이나 지식인들도 식민사관이 위험하다며 이 예언을 공공연히 인용할 만큼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아베 노부유키가 이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그는 패전을 앞두고서는 일본인들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정신없이 조선인 엘리트들을 접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괜히 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세다가 패전 직후에는 전범재판에서 자신에게 불리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공공연히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만일 식민지 교육이라는 것을 심어놓았다면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떠나는 편이 더 현명하다. 이처럼 비합리적인 음모론이 유행하는 사실은 한국인들이 식민사관을 얼마나 위험하게 느끼고 있는지 보여줄 뿐이다.


음모론이 한동안 잠잠해지나 싶었다. 그런데 2014년 박근혜 정부에서 총리로 지명된 사람이 식민지 경험을 '하느님이 내린 시련'이라고 말한 발언이 알려지면서 ‘아베 노부유키의 예언’을 수면 위로 다시 불러 냈다. 총리로 지명된 문창극 후보자가 대형교회에서 했던 강연이 크게 문제가 됐다.

후보자 검증 과정에서 공개된 이 발언은 가관도 아니었다. "조선 민족은 5백년을 허송세월 보냈으니, 일제 식민지배는 하느님이 내린 시련이다", "조선인은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지는 DNA로 남아 있다" 등등……. 여당 국회의원이나 KBS 이사장 등이 문후보자의 애국심(?)에 감동을 받았다고 거들고 나서면서 식민사관이 널리 퍼져있다는 확신을 불러일으켰다. 논란이 커지자 결국 문창극 총리후보자는 낙마했다. 인터넷에는 문창극의 ‘허송세월’ 발언을 비판하는 패러디들이 수없이 떠돌아다녔다. 진보적인 입장을 가진 언론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역사 바로 세우기’가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식민 청산을 하자며 우리 안의 식민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 역시 음모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사IN>과 같은 진보언론에서도 ‘금주의 저자’로 주목을 받았던 이덕일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역사 바로 세우기’에는 동의하는 사람들조차 자신들도 모르게 식민사관을 받아들이고 있다며 경고했다.

문창극 후보자 같은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식민 지배를 하느님이 내린 것이라고 말했으니 아예 일리 없는 주장은 아니다. 하지만 이덕일이나 그와 비슷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의 주장을 좀 더 들어보면 도무지 동의하기가 어려워진다. 조선 후기에 권력을 잡았던 노론들이 식민사관의 뿌리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조선을 지배하던 노론 출신 유학자들이 식민지에서도 총독부의 식민사관 만들기에 적극 협력했고, 광복이 되고 나서도 한국의 역사학계를 주름잡는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앉아있다는 이야기다. 이 과정에서 조선총독부의 식민사관이 지금까지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내려오고 있으며, 심지어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이 현재의 동북아역사재단 등 국가기관을 장악하고 있다…….

이쯤 되면 한국은 아직도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당파가 총독부와 짬짜미를 해서 현재의 한국 역사학계까지 지배하고 있다는 주장은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조선인 역사학자 이병도의 조상이 노론이었고, 친일파 중에 노론이 많았다는 것인데, 같은 논리로 전주 이씨나 안동 김씨가 식민사관의 뿌리라고도 주장할 수 있다. 혹은 노론의 범위를 확장해서 양반 계급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노론뿐만 아니라 소론이나 남인 출신 중에도 친일파가 있으니까.

노론이 식민사관의 뿌리라는 주장은 조선판 프리메이슨 음모론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프리메이슨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역시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 중 3분의 1이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고 주장한다. 프리메이슨이 미국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식의 주장이나 노론 출신 역사학자들이 한국의 역사학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주장 모두 그렇고 그런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간의 한국사가 노론의 음모대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음모론에서 벗어나면 한국 역사학계가 그간 식민사관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며 주고받은 논의들을 비로소 살펴볼 수 있게 된다. 다른 모든 지식들처럼 한국의 역사학 또한 당대의 상황을 반영해서 탄생했다. 예컨대 1960년대 초반 미국의 대외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케네디가 프리메이슨인지 아닌지 뒷조사를 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냉전구도를 살펴보는 편이 훨씬 적절하다. 마찬가지로 역사학의 역사를 이해할 때도 그 시대의 정치·사회적 상황들부터 따져봐야 한다.

역사학자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적 조건 속에서 자신이 진리로 믿고 있는 역사적 지식이 타당한지 따져 묻는다. 그래서 한국사를 다루는 학자들이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했던 그간의 노력은 곧 자신이 서있던 시대와 대화하며 진행되어온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간 역사학자들이 자신의 시대와 나누었던 대화를 살펴봄으로써 지금을 살아가기 위한 더 나은 역사의식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part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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