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곰곰 Apr 09. 2020

식민사관 극복 프로젝트

식민주의 너머 역사읽기 - Part 2

해방은 조선인 엘리트들에게도 도둑처럼 찾아왔다. 이들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감격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새로운 주권국가를 만들어야 할 임무를 떠맡았다.

역사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식민치하에서 조선의 역사는 일본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세계는 일본이라는 제국의 범위 안에 속한 하위 범주로 존재해왔다. 그러니 36년간의 식민지배가 끝나고 일본군이 물러갔다고 바로 역사학자들이 한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써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해방은 ‘오늘부터 식민지 끝, 독립 시작!’이 아니었다. 한국 역사학계에서 독립은 기나긴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해방 공간에서 역사학자들에게 남겨진 가장 큰 숙제는 역사를 일본사의 일부로 봐왔던 이제까지의 관점을 거꾸로 확 돌려서 한국민족을 중심으로 역사를 써야한다는 것이었다. 역사학자들은 제각기 부랴부랴 한국사 개설서를 써내기 시작했다. 1945년에만 해도 황의돈의 『중등국사』, 권덕규의 『조선사』, 신정언의 『상식국사』, 신태화의 『조선역사』, 함돈익의 『조선역사』, 이주홍의 『초등국사』 등이 출간되었다.

대부분 식민지기에 이미 써두었던 원고들을 적당히 손봐서 내놓은 것들이었다. 해방 후에 집필을 시작한 책들 역시 사정이 비슷했다. 미군정이 1945년 12월에 진단학회에 의뢰해서 만든 『국사교본』은 이듬해 1월에 초고가 나왔으며, 1946년에 나와 대중적 한국통사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김성칠의 『조선역사』 같은 경우 한 달 만에 탈고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두 달 만에 한국사를 통째로 써내려갔으니 새로운 관점을 모색해볼 여유는커녕 편집에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이병도와 김상기는 『국사교본』의 서문에 “본서의 편찬이 창졸간에 되어 삽화와 지도를 넣지 못한 것을 매우 유감으로 여김”이라고 미리 밝혀두기까지 했다.


여러 사정이 따라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역사학계가 민족사를 쓰고자 했던 의지는 컸다. 어렵게 얻어낸 독립인데, 다시금 식민지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미군정 기간에도 중학교 국사교육의 목표로 ‘민족의 자주정신과 도의 관념의 함양 및 문화의 전승 발전에 깊이 유의하는 동시에 생도들에게 이를 고조하여 완전자주독립에 이바지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라고 명시한 규정에서 볼 수 있듯이 해방 공간에서 민족사는 역사를 공부하는 제일의 목표가 되었다. 다만, 새로운 민족사를 위해서 벗어나야할 식민사관의 정체라는 것이 막연할 따름이었다. 일제가 왜곡한 한민족의 본질성이 대체 무엇인지 따져 묻기엔 모든 것이 너무나 급박했던 시기였다. 그리고 곧 한국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몰고 온 반공주의라는 소용돌이가 거셌던 1950년대 내내 학계 역시 얼어붙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학문적 토대 역시 마련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의견을 주고받을 학계라는 것이 형성되기도 어려웠던 때였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식민사관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식민 청산에 소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목을 겨눌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었다.


1949년 국회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일제에 협력한 자들을 수사하려고 시도했지만 이승만 정부의 조직적인 방해로 무엇 하나 해보지 못하고 해산했다. 반민족행위로 수사를 받게 될 대상 중에는 식민지 시기부터 경찰 고위직에 있었던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이승만 정권의 권력을 떠받치는 핵심 세력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직접 담화까지 발표해 남북이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경찰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대통령이 나서서 수사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해버린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평화통일조차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반공주의가 드세졌다.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조봉암은 득표율 30%나 얻은 거물 정치인이었지만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몰려 결국 사형을 당한 것이 대표적이다. 유력 대통령 후보도 국가보안법으로 목숨을 잃는 판에서 학문의 자유가 보장될 수 없었다.


식민지 시기의 독립운동을 다루다보면 사회주의 계열 운동 역시 연관될 수밖에 없으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1963년까지 한국 역사학계에서 독립운동과 관련해 제출된 논문은 고작 세 편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이 시기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1960년 4.19 혁명을 계기로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학계에도 드디어 해방구가 열렸다. 4.19 혁명의 중심이라고 자부했던 학생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부패하고 무능했던 정권을 무너뜨렸다는 자부심에 가득 찼다.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라는 낙담에서 벗어나니, 역사가 살아 숨 쉬며 항상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다는 자각이 생겼다. 또한, 그간 억눌려있던 평화통일에 대한 요구도 자유롭게 광장으로 나왔다.

4.19세대에게 휴전선은 태어날 때부터 항상 거기 있던 자연적인 경계선이 아니었다. 3.1운동 이후 점차 커져갔던 민족의식이 4.19세대에 이르러서는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란 구호로 터져 나왔다. 이들에게 이제부터 만들어갈 국가는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새로운 운명공동체였다.


4.19 혁명의 영향은 단지 한반도 남쪽에만 머물지 않았다. 1960년대 들어서 동아시아 차원에서 진보진영 네트워크가 열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던 것도 혁명이 가져온 변화였다.



때마침 그 즈음에 일본의 진보적인 역사학자들도 미국의 패권에 저항하기 위해서 아시아의 민족주의 운동에 연대하고자 노력했다. 1959년 ‘조선사연구회’를 조직하고, 1961년 일본공산당 계열의 일본조선연구소에서 잡지 『조선연구』를 발행하면서 일본의 조선사 학계는 남북한과 중국을 아우르는 동아시아 차원의 진보진영이 만나는 장이 될 수 있었다. 일본의 조선사 학계는 남북한에서 발표한 최신 연구를 소개하고 검토했으며, 이에 대한 결과물을 남북한과 중국의 학계가 다시 참고하는 식이었다.


한편, 한국에서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는 동안 미국의 냉전질서도 변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소련과 힘겨루기를 하면서도 국방비를 아껴보고자 꾀를 냈다. 1950년대 중반부터 미국은 자신에게 우호적인 제3세계 국가들에게 지급하던 원조를 줄이는 대신에 경제개발을 독려하는 방식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특히 케네디 정부에서 정책계획위원회 의장으로 있던 경제학자 로스토우(W. W. Rostow)가 내놓은 ‘근대화론’은 한국과 같은 제3세계를 단순히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 저개발 상태에서 개발로 나아가고 있는 ‘개발도상국’으로 보도록 이끌었다. ‘근대화론’은 미국이 원조예산을 줄이기 위한 도구이자 공산주의 블록이 제3세계의 민족주의 운동에 보내는 유혹에 대항하기 위한 이론적 무기이기도 했다. 로스토우의 이론은 어느 국가에나 적용될 수 있는 다섯 가지 경제발전단계를 제시하며, 근대화 과정이 단순히 경제적인 규모뿐만 아니라 사회의 총체적인 성장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의 젊은 지식인들은 ‘근대화론’에 자극받았다. 한국이 그간 만성적인 가난에 허덕이며 미국의 원조물자에 의존해왔지만 경제개발만 한다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가 생긴 것이다. 이즈음 한국을 비롯해서 동아시아에서는 경제성장을 포함한 근대화를 민족적 사명으로 이야기하는 학자들이 많아졌다.


새로운 민족국가에 대한 요구, 동아시아 차원의 학문 네트워크, 그리고 로스토우의 ‘근대화론’은 한국의 역사학계에도 큰 영향을 줬다. 1961년 젊은 신진학자였던 이기백은 『국사신론』을 통해 식민사관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을 시작했다. 식민사관을 비판하고 청산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식민사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었다.

이기백은 자신이 비판하려는 적의 실체를 분명하게 만들기 위해 식민사관을 ‘한국사의 올바른 인식에 장애가 되는 그릇된 모든 선입관과 이론’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그는 『국사신론』의 서론에서 식민사관의 성격을 반도적 성격론, 사대주의론, 당파성의 문제, 문화적 독창성의 문제, 정체성의 이론으로 나누어서 이들을 하나하나 뒤집고자 했다. 그중에서도 한국 민족의 역사가 스스로는 결코 발전하지 못해왔다는 식민사관의 주장은 무엇보다 우선해서 반박할 필요가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한국의 근대화가 싹도 피워보기 전에 뿌리부터 잘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기백은 여태까지 한민족이 가난했던 것이 운명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는 한민족의 가난과 전근대성을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있는 민족성(‘정체성’)이 아니라 문명사회에 비해 잠시 뒤쳐진 상태(‘후진성’)로 설명했다. 정체성과 후진성은 한민족 스스로 근대화가 가능한지 아닌지를 결정적으로 가른다는 점에서 상당히 다른 관점이다. 정체성은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고여 있는 상태지만, 후진성이라고 말하면 발전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언제든 뒤따라갈 수 있게 된다.

이기백은 과거를 새롭게 볼 수 있을 관점을 제시했지만, 그의 과거는 미래를 향해있었다. 한민족은 비록 뒤쳐졌지만 노력하면 충분히 발전을 따라잡을 수 있을 미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4.19 혁명 성공으로 얻은 자신감과 근대화에 대한 열망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관점이었다.


4.19 혁명이 열어둔 해방구는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로 인해 짧은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정권 역시도 당시 유행하고 있던 ‘근대화론’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부패했던 이승만 정권과 뚜렷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야만 했고, 따라서 민족 발전과 근대화를 새로운 국가의 목표로 내세웠다.

박정희 정권이 반포한 국민교육헌장이 새삼스럽게 ‘민족’의 발전을 내세우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이 당시 박정희 정권 역시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공포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역사학계가 식민지기 독립운동과 관련해서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을 다루기는 어려웠다.

4.19 혁명이 만들어냈던 해방구는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이승만 정권과 결정적으로 다른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근대화’라는 목표였다. 근대화를 민족적 사명으로 분명히 내세우기 위해서는 학문적 뒷받침이 필요했다. 역사학계도 식민사관이 주장한 정체성론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사에서 심어진 근대화의 싹을 찾고자 했다. 정권과 학계의 관심이 근대화라는 목표에서 일치했던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다른 국가에서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16~18세기 역사에서 근대화의 싹이 될 만한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외세의 개입과 관련 없이 한민족의 역사에 내재한 근대화의 싹으로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이나 화폐거래 같은 것들이 후보에 언급됐다. 이때부터 역사학계에서 이른바 ‘내재적 발전론’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기백을 비롯해서 홍이섭, 김용섭 등의 신진학자들은 학계의 선배들이 그간 남긴 연구들을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하나하나 비판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기백은 해방 후 신민족주의사학을 내세웠던 이인영의 『국사요론』이 민족주의를 내세웠음에도 식민사관을 벗어나지 못했다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식민지 시기 일본인 학자들의 조선사 연구에서 충분히 참고할 만한 ‘객관적 견해’가 있다고 인정했던 부분이 문제였다.

이인영은 일본인 학자들이 ‘조선사의 타율성’ 운운했던 것은 문제가 있지만, 이러한 견해는 일본인 학자들의 특이한 왜곡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헤겔이나 마르크스가 ‘동양 세계의 정체성’ 혹은 ‘아시아적 생산양식’ 같은 개념으로 설명했던 관점의 연장선 위에 일본인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기백이 보기에는 이인영이 일본인 학자들의 ‘객관적 견해’를 인정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한 것 자체가 일제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증거였다.

아무리 민족을 역사의 중심으로 내세우더라도 정체성이나 타율성을 받아들이면 식민사관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이기백의 논리였다. 이제부터는 한국 민족의 주체적인 발전을 그려내지 못한 한국사 서술은 식민사관으로 비판받게 되었다.


한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목표 역시 이즈음부터 분명해졌다. ‘한민족이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와 근대사회를 만들 능력, 곧 근대적 발전을 이룰 수 있을 잠재력이 충분히 있었음을 입증하라!’ 이러한 방식의 식민사관 극복 작업이 바로 ‘내재적 발전론’이었다.

그런데 한민족이 자신의 힘으로 근대적 발전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주장하려면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발전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만 했다. 근대 역사철학의 두 축이라고 할 수 있을 헤겔과 마르크스 모두 한 국가의 발전에 있어서 자본주의가 필수적인 단계라고 분석했기 때문이다. 헤겔은 인간사회의 역사가 결국은 국가이성으로 수렴된다고 말했던 반면, 마르크스는 인간사회가 반드시 자본주의를 거쳐야만 공산주의 사회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내재적 발전론’ 입장에 선 한국사 연구는 하나의 질문으로 모였다. ‘한국 민족이 자생적으로 자본주의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가?’


식민사관을 극복하겠다는 학자들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한국 민족의 역사에 심어져 움텄던 자본주의의 싹을 발굴하고자 애썼다. 이른바 ‘자본주의 맹아론’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사에서 자본주의의 맹아를 찾고자 노력했던 학자들은 자본주의 이행에 대한 서구의 논의를 적극적으로 참고했다. 특히 영국의 경제사 전공자 모리스 돕(Morris Dobb)이 1946년 내놓은 『자본주의 발전연구(Studies in the Development of Capitalism)』에 의해 촉발된 ‘돕-스위지 논쟁’을 주로 참조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인 돕과 스위지는 어느 사회든 돈의 흐름(자본)과 노동력(임노동)이 공장(생산시설)에서 만나서 상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자본주의로 이행한다고 봤다. 자본주의는 봉건사회처럼 농민들이 신분제에 묶여 강제로 농사를 짓는 사회와 질적으로 다른 사회였다.


두 사람의 논쟁은 자본주의로 질적인 도약을 할 때 어떤 요소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냐는 질문을 두고 오갔다. 돕은 수공업의 발전에서부터 형성된 임노동이 자본주의 이행에서 결정적이라고 분석했지만, 폴 스위지(Paul Sweezy)가 돕의 주장을 반박하며 상업의 발달에서 축적된 자본에서 자본주의의 맹아를 찾았다.

한국의 역사학자들도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벌인 논쟁을 참고해가면서 저마다의 자본주의 맹아를 찾아 내놓았다. 수공업과 상업을 비롯해서 농업과 광업이 자본주의의 싹을 품고 있는 맹아로 주목받았다. 강만길은 상업에 주목해서 상인들이 왕실에 도자기를 공납하면서 자본을 축적하는 과정을 연구했고, 김영호는 수공업에 주목해서 안성유기를 생산하던 장인들에게서 자본주의적 분업이 시작될 단초를 발견했다. 김용섭은 농업에 주목해서 토지대장인 양안을 분석하였고, 조선 후기에 이르면 농사를 짓는 기술이 개선되면서 자급자족 수준을 넘어서 농작물을 내다팔 목적으로 가진 경영형부농이 등장할 가능성을 열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연구에는 ‘정체론 극복이 바로 맹아론 문제’라는 신념이 밑바탕에 깔려있었다. 자본주의 맹아를 찾기 위한 노력은 이때부터 시작해서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한국사를 정체되고 타율적인 성격으로 그렸던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역사학자들의 시각은 1969년 당시 문교부에 제출한 「중·고등학교 국사 교육 개선을 위한 기본방향」에 집약되어있었다. 이기백, 김용섭 등 내재적 발전론을 이끌고 있던 역사학자들은 국사 교육의 기본 원칙으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항목을 제시했다.


"㉠ 국사의 전 기간을 통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살린다. ㉡ 민족사의 각 시대의 성격을 세계사적 시야에서 제시한다. ㉢ 민족사의 전 과정을 내재적 발전 방향으로 파악한다. ㉣ 제도사적 나열을 피하고 인간 중심으로 생동하는 역사를 서술한다. ㉤ 각 시대에 있어서의 민중의 활동과 참여를 부각시킨다."


이러한 원칙은 이 당시의 역사학계가 역사서술의 목표를 내재적 발전론에 두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역사학자들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하는 민족사를 그려내기 위해서 조선 후기의 자본주의 맹아뿐만 아니라 수천 년 전에 사용한 청동기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한민족이 고대국가를 일찍부터 만들어왔다고 증명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 기술이 오래 전부터 발달했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한국사 연구의 목표에 대한 김용섭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 당시 식민사관의 극복이라는 기획이 지향하는 바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의 역사학이 지향하는 세계사의 발전 과정이라고 하는 일반성 위에 한국사의 특수성이 살려진 그러한 역사관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여태까지 한민족의 발전가능성을 입증하지 못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내재적 발전론자들은 식민사관의 불온한 의도에서 그 답을 찾았다. 식민권력에 빌붙은 학자들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정체성 같은 왜곡된 지표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내재적 발전론을 통해 정체성론을 부정했듯이 식민사관의 나머지 지표들을 하나하나 반박하는 방식으로 식민사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면 식민사관이 한민족은 사대주의에 젖어 자율성이 없다고 주장했던 것을 뒤집어서 한민족이 타문화를 받아들이는 소화력이야말로 내재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라고 고쳐 말하는 식이다.


내재적 발전론자들은 이처럼 식민사관의 지표들을 하나하나 거꾸로 뒤집어서 민족사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이들에게 식민사관은 민족사의 뒤집힌 거울 같은 것이었다. 내재적 발전론자들은 식민사관의 지표를 타율성과 정체성론으로 나누거나, 더 세밀하게는 대여섯 가지 정도로 나누어서 공략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지표 하나하나를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역설적으로 각각의 지표들이 새로운 역사학에 더욱 깊게 스며들었다. 마치 어느 식민지배자가 조선인들은 지적 능력이 떨어져서 경성제대에 입학하지 못한다고 비난하자, 이를 부정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는 어느 조선인 학생이 처한 딜레마와 비슷하다. 어느 조선인 학생이 우수한 성적으로 경성제대에 입학을 한다면 조선인도 지적 능력이 높다고 반박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게다가 많은 조선인 학생들이 경성제대에 입학했다는 통계를 보여준다면 조선인이 높은 지적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반박하면 반박할수록 경성제대 입학이 지적 능력을 측정하는 지표로 더더욱 공고하게 자리 잡게 된다. 일본인들에 비해 조선인들이 뒤떨어지지 않는다며 경쟁하는 동안 ‘학벌’이라는 기준이 인간의 수준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지표로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식민사관을 극복하려던 내재적 발전론의 기획이 처한 딜레마도 비슷했다. 일제 관학자들의 의도를 반박하는 데에만 집중하다보니 정작 식민사관이 기반으로 삼고 있던 근대역사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여력이 없었다.

인간의 역사를 서술하기 위한 가장 주요한 과제가 자본주의 맹아를 발견하는 것이 되어야만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2~300년 전 유럽에서 발생한 자본주의적 발전이 유럽사의 특수한 역사가 아니라 세계사의 보편적인 발전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진 배경은 무엇일까?

식민사관 극복을 바랐던 내재적 발전론자들은 한일 간의 관계에만 몰입하다보니 정작 근대역사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마치 조선인들의 경성제대 입학률이 높다고 주장하는 데에만 집중한 나머지 학벌사회라는 근대사회의 병폐를 성찰하지 못한 문제와 같다. 식민사관 청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개를 들어 더 넓게 봐야한다.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의 불온한 의도 탓으로 돌려버리고 끝내기엔 아직 해결하지 못한 질문들이 많다.


(Part 3에서 계속)

작가의 이전글 식민사관이라는 유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