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주의 너머 역사읽기 - Part 3
1974년 봄 <경향신문> 지면에서 갑자기 ‘식민사관’ 논쟁이 붙었다. 논쟁에 불을 댕긴 쪽은 서울대 음악대학 박시인 교수였다. 그가 대학신문에 국사교과서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는데, 이를 <경향신문>에서 보도했다. 요지는 국사교과서가 ‘식민사관’에 물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동학란’이 ‘동학혁명’으로 수정된 점을 근거로 들었다. 다음은 박시인의 비판이다.
“우리나라 왕정 말기에 외세가 집중 내습한 위기에 청나라 홍수전(洪秀全)-필자주: 중국 태평천국의 창시자-의 난리를 모방한 반란을 남도에서 일으켜서 일본군이 침입할 기회를 만들어 나라가 망하게 한 동학란을 동학혁명이라고 찬양하는 것은 부당하며 이런 태도는 일제 때 어용학자들보다 심하다.”
졸지에 ‘일제 어용학자’들이 되어버린 역사학자들도 참지 않고 바로 반박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윤병석 조사실장은 “박씨의 논리는 왕조말기의 부패한 지배계층과 일제 관학자들의 주장과 비슷하다”고 되받아쳤다. 그는 ‘동학혁명’ 대신 ‘동학농민봉기’라고 부르면서, 이 사건이 근대화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강조했다. 중앙대 김용덕 교수 역시 “일제 식민지사학이 부정했던 동학혁명이 재평가된 것은 한국사학계의 발전이었는데 뜻밖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며 반박했다.
‘동학란’이 옳다며 공격하는 쪽이든, ‘동학혁명’이 맞다며 반박하는 쪽이든, 상대를 일제 어용학자로 몰아세우곤 자신들이 식민사관을 극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논쟁이다.
1974년이라면 역사학계에서 식민사관을 청산하겠다고 나선 지 15년 가까이 된 시점이었다. 학계에서 이름을 알리던 학자들이 정부에 「중·고등학교 국사 교육 개선을 위한 기본방향」을 제출한 뒤로도 5년이 지난 때였다. 그만큼 오랫동안 식민사관 청산을 이야기해왔다. 그런데 학계가 내놓은 결과물이 다시 식민사관으로 손가락 받을 것이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동학란’이냐 ‘동학혁명’이냐를 두고 오간 논쟁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상고사 논쟁’의 예고편이었다. 논란은 ‘상고사’라는 개념에서부터 시작했다. 역사학계에서는 삼국시대 이전을 통칭해서 고대사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고조선이 중국본토를 지배했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이들은 고대사 이전을 떼어서 ‘상고사’라고 특별하게 부른다.
1974년 7월 한국고대사학회가 성명을 내고 단군을 신화 속 인물로 설명하는 국사교과서를 비판하면서 논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상고사’측의 주장은 뚜렷했다. 일본인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이 한국 고대사를 왜곡시켰고, 해방 후에도 역사학계는 이들의 식민사관이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이다.
한사군의 위치가 그 근거였다. 이들에 따르면, 한사군은 원래 요동에 있었는데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이 사료를 조작해서 평양에 있었던 것처럼 왜곡시켜버렸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에 그 자리에 한사군을 세웠으니 이들은 결국 고조선이 요동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에겐 주류 역사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믿지 않는 까닭이 간단했다. ‘일본인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이 불순한 의도로 심어놓은 식민사관에 젖어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
1960년대에 이기백 등의 신진학자들이 식민사관 청산을 이야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들 학자들이 역으로 ‘일제 어용학자’라는 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역사학계가 내재적 발전론을 내놓으면서 체계적으로 정리될 것 같았던 식민사관 청산이라는 과제가 오히려 더욱 혼란스럽게 꼬여버린 까닭은 무엇일까?
혼잡한 논란 속에서 정신을 잃기 전에 논쟁을 잠시 정리해보자. 해방 후 등장한 내재적 발전론자들도 식민사관이 한국사를 왜곡시켰다고 비판했다. 일본인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이 한국인들의 역사를 정체되어있고, 순전히 타율적이었던 것으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그처럼 왜곡을 저지른 이유는?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상고사’측의 논리도 같았다. 다만 이들은 지도에 주목했다. 일본인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고조선의 영토를 요동으로부터 한반도로 끌어내렸다는 것이다. 양측 모두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의 ‘불온한 의도’를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대체 일본인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이 품고 있었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정말 ‘불온한 의도’를 품고서 한국사를 일부러 날조해냈던 것일까? 그러한 왜곡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들이 남긴 기록들을 다시 훑어보기로 하자.
일본인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은 일본에서 건너와서 조선의 고고학적 유물들을 마구잡이로 발굴한 뒤 결과를 날조하거나 조선총독부를 등에 업고 『조선사』 편찬 같은 국책사업을 맡아서는 조선의 역사를 통째로 왜곡시켰다는 의심을 받아 왔다. 특히 이병도가 해방 후 식민사관을 계승한 주범으로 지목되다보니, 그의 대학 스승 시라토리 구라키치나 조선사편수회 선배 이마니시 류와 같은 인물들이 식민사관 문제와 관련해서 자주 호출된다.
제국 일본이 예산을 들여가면서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지원을 했던 의도는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그들이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에 도움을 주기 위해 역사연구를 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일본인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이 남긴 글에서 그들의 ‘불온한 의도’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한국사를 날조하겠다는 다짐 같은 건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들의 기록에서 제일 먼저 접하게 되는 말은 의외로 조선사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대표적인 식민주의 역사학자로 꼽히는 이마니시 류의 경우를 보자. 1906년 그는 신라사 연구를 위해서 일본을 떠나서 처음으로 경주에 도착했다. 그는 새로운 탐구 대상을 앞에 둔 자신의 벅찬 느낌을 이처럼 표현했다.
경주여, 경주여. 십자군 병사가 예루살렘을 바라본 심정이 바로 지금 내 마음일 것이다. 나의 로마는 눈앞에 있다. 내 심장이 고동을 치기 시작했다. 열 살 때 산촌 마을의 학교에서 <사략史略>을 읽었을 때부터 바다 건너 서북 구름 안에 가려진 비밀의 나라, 보물의 나라를 보고 싶다, 가고 싶다고 생각해왔는데, 이제 내가 다가간다. 그가 다가온다. 내 심장이 고동을 친다. 전세(前世)를 본 느낌이다. 나는 우리 신라로 다시 돌아왔다.
이마니시의 나이가 이때 갓 서른이 지났으니 젊은 역사학자가 벅찬 감정에 다소 과장이 있더라도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는 경주로 향하는 길 내내 조선사에 대한 사랑, 더 나아가 조선인들에 대한 사랑을 여지없이 표현했다.
나는 한국(韓國)의 아이, 나그네이다. 촛불이 꺼져 창문의 윤곽만 알아볼 수 있고, 닭소리만 앞마당에서 크게 들려온다. 밖을 바라보니 조생종 벼 논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이 몸으로 느껴진다.
그의 사랑은 “한인을 좋아하고 한인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만큼 거침이 없었다.
한국인 입장에서 일제의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이 조선에 보낸 지극히 일방적인 사랑이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집안까지 침입한 스토커를 신고했다가 경찰서 조서를 뒤늦게 읽어봤더니 ‘나는 너무 사랑했을 뿐’이라는 말만 한가득한 것을 본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이 남긴 말들은 그보다 더 애틋해 보인다.
일본인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자신들의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의심하지 않았다.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던 후지타 료사쿠는 식민지 조선에서 진행했던 ‘고적 조사 보전 사업’을 두고 “반도에 남긴 일본인이 가장 자랑스러워해야 할 기념비의 하나”라고 평가했다.
[고적 조사 보전 사업이] 그저 일본인만을 위한 것인지, 조선과 조선인의 영원한 행복이 도외시된 것인지 어떤지, 백 년 후의 역사가가 바른 해석을 내리리라 생각한다.
자신들의 ‘불온한 의도’가 의심 받을 것이라고 예상한 듯이, 자신들은 사심 없이 조선인들의 행복을 빌었노라고 너무도 자신 있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지켜주고 싶었던 마음으로 순수하게 ‘사랑’했을 뿐이라고.
누군가는 이 지점에 ‘불온한 의도’가 분명히 있을 거라며 숨겨진 진실을 파내기 위해 뒤를 캐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일본인 학자들끼리 으슥한 데에서 모여서 작당모의를 하는 장면을 그려볼 수도 있다. 그런 상상 속에서 일본인 역사학자들의 연구는 전략가들의 작전회의나 다를 바 없다. 식민지 조선이 만주대륙을 지배했던 고대 제국의 후예들이라는 사실을 어떻게든 왜곡하고 은폐하려고 치밀하게 계획을 짜는 회의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계획이 있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작당모의가 있었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은 일제가 광개토대왕비 탁본을 왜곡하지 않았냐고 반문한다. 이른바 ‘석회 도포설’이다.
1972년에 제기된 뒤로 일본인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이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한 사례로 등장하는 이야기다. 일본 육군이 광개토대왕릉비를 발견한 뒤 탁본을 바꿔치기하고 왜곡시켰고, 게다가 비석에다가도 석회를 발라서 비문 내용을 교묘히 뒤틀어버렸다는 것이다. 일본 육군이 이런 왜곡을 했던 이유는 단 하나,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점령했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광개토대왕비에 실제로 석회를 덧입힌 흔적이 발견됨에 따라 ‘석회 도포설’은 힘을 받았다.
하지만 비문에서 발견된 석회는 광개토대왕비 근처에서 살면서 비문을 탁본으로 떠서 팔았던 동네 사람들이 바른 것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비석 표면이 워낙 울퉁불퉁해서 여기에 종이를 대고 탁본을 찍으면 찢어지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그 위에 석회를 덧입혔던 것이다. 최근에는 석회를 바르기 전에 찍힌 탁본이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석회 도포설’은 타당성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만약 작당모의가 진짜로 있었다면 그 으슥한 자리에 조선인들도 일찍부터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고 봐야만 한다. 식민지배가 시작되기 전이었던 대한제국 때에도 애국계몽에 앞장섰던 신문들도 조선 역사의 미개함을 비판하고 나섰으니 말이다.
이 신문들은 사설을 통해서 조선인 농부가 서양 농부에 비해 500년이나 뒤떨어졌다거나 조선 사회의 억압적이고 미개한 성격이 2~300년 전 서양과 비슷하다고 비판했다. <독립신문>은 자조하듯이 ‘세상에 보험회사 없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묻고서는 스스로 ‘조선’이라고 답했다. 일본인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이 조선인들을 미개하고 뒤떨어진 민족으로 묘사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기도 전에 조선인들로부터 나온 말들이었다.
일본인들이야 불온한 의도로 한국사를 왜곡시켰다고 치고, 조선인들이 날조할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어떤 이들은 이들 역시 일본인 식민주의 역사학자들끼리 작당모의가 이루어졌던 으슥한 자리에 껴서 훗날 식민지에서 한 자리라도 얻어 보려던 친일파들이었다고 치부하고 끝낼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역사학이 아니라 음모론의 영역이다. 음모론에서 빠져나와서 더 넓은 세계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 다른 설명이 충분히 가능해진다.
일본인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이 조선사에 보낸 가학적인 ‘사랑’이나 구한 말 조선의 엘리트들이 보인 자학적 비난 모두 한 줄기에서 뻗어 나온 동기간이다. 그들의 눈을 온통 사로잡았던 것은 ‘문명’이었다. 18~19세기는 전 세계를 통틀어서 문명의 시기였다. 세계 곳곳에서 문명이 만개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전 세계가 마치 열병 앓듯 문명을 열망했다고 말하는 편이 훨씬 적확하다.
문명이라는 개념은 유럽에서도 18세기 중반에서야 나타났다.
프랑스 정치가 미라보(marquis de Mirabeau)가 『인간의 벗 또는 인구론』이라는 책에서 civilisatión(문명)이란 표현을 썼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이 용어의 근원이 되는 civil(시민의, 예의 바른)과 civiliser(교화하다, 개화하다)는 각각 13세기와 16세기부터 사용되고 있었다.
어원에서 볼 수 있듯이 문명은 ‘시민다움이 꽃을 피움’이나 ‘예의로 교화함’ 같은 뉘앙스를 가진 개념이었다. 이 신조어는 미라보가 활동하던 당시에 프랑스에서 유행처럼 번졌다.
이 당시 문명의 대척점에 서있던 것은 타락한 궁정이었다. 금박과 샹들리에로 화려하게 꾸민 궁전에 모인 왕족과 귀족들이 파티를 벌이는 장면을 떠올려보면 좋을 듯하다. 절대군주들은 권력욕에 취해서 무분별하게 전쟁을 일으키고, 귀족들은 걷기도 불편할 만큼 과하게 치장을 하고서는 자신을 꾸밀 사치품에 끊임없이 욕심을 내고 있다.
이러한 습속은 계몽주의자들에게 사회를 발전시키지 못하게 만드는 악습으로 비춰졌다. 즉, 문명은 인간의 이성을 충분히 발휘하여 얻어낼 목표인데, 정치가 비이성적이고 야만적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이 가혹한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Adam Smith) 역시 『국부론』에서 civilization(문명)을 자주 언급했을 만큼 문명이라는 개념은 18세기 후반이 되면 유럽에서 유행어로 자리를 잡게 된다.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은 문명이라는 말을 통해 바람직한 국가와 국민에 대해 이야기했다. 프랑스대혁명으로 부패한 절대왕정을 몰락시키자 문명은 이제 현실이 된 듯이 보였다. 성공한 혁명가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 역시 자신들이 만들어낸 성과가 보편적인 역사발전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혁명으로 인한 혼란스러움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자유(liberté), 평등(egalité), 형제애(fraternité)라는 가치를 내세운 국가를 새로이 세웠다는 것이 인류 역사에서 의미하는 바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당시 인류문명이 이뤄낸 가장 값진 성과가 바로 자신들이 세운 새로운 국가라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프랑소아 기조(François Guizot)와 같은 역사가들 역시 새로운 국가가 인간이성의 결실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국사’가 보편적인 역사발전 법칙을 보여준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역사적 궤적을 과학적으로 연구한다면 인류가 나아갈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기조는 국가가 문명이 궁극적으로 도달할 목적지라며 이렇게 말했다.
문명은 대양大洋과 같은 것으로, 그것은 국민의 부를 만들고 국민생활의 모든 요소, 그 생존의 일체의 힘이 다 그 품에 집중되는 것입니다.
그에게 문명을 품은 너른 바다는 결국 자신의 조국 프랑스였고,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는 프랑스 역사를 보편적 문명사라는 관점에서 탐구해야 하는 과제를 맡은 것이다.
영국의 역사가들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자신들의 조국에서 문명의 뿌리를 찾고자 노력했다. 이들은 영국이 프랑스혁명보다 한 세기 전에 이미 명예혁명을 이뤄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의 혁명은 권리장전을 통해 시민권을 보장하고 평시에 상비군을 가지지 못하게 만드는 등 입헌군주제를 정착시켰다. 게다가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면공업과 제철 및 제강업 등 새로운 산업이 확장하고 있었다.
증기기관을 이용해서 자동으로 면실을 뽑아내는 방적기 공장이 돌아가는 모습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당시 노동자들이 자동방적기에게 ‘철인’이라는 애칭을 붙여줬다고 하니 그 광경이 볼거리이긴 했던 모양이다.
영국의 역사학자들은 영국이 과학의 시대를 열어젖혔다고 생각했다. 세계사는 세계 각국을 문명발달에 따라 한 줄로 세우는 작업이 되었다. 영국은 문명의 일직선에서 가장 앞서 있었고 유럽이 뒤를 이었다. 토마스 버클(Thomas Buckle)은 『영국문명사』를 통해 이렇게 물었다.
다른 지역은 꿈만 꾸고 있는 동안에 유럽에서는 어떻게 과학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는가?
그는 그 이유로 유럽의 '자연적 환경'을 꼽았다. 인도나 아메리카처럼 자연경관이 압도하는 지역과 달리 유럽은 인간이 능히 지배할 수 있을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유럽인들은 자연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연법칙에 대해 탐구할 여력을 갖추게 되었고 따라서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해나가기 위해서 이성을 고양시킬 수 있었다. 역사가들은 이제부터 전 세계 인류가 유럽인들을 뒤따라 올 수 있도록 문명사를 써내려가야 할 책임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 누구도 요구하지 않은 책임이었다. 오직 문명인의 사명감에 의해 스스로 짊어진 짐이었다.
문명에 대한 열망은 오늘날 브라질 국기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브라질 국기는 월드컵이 열릴 때마다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에 더욱 친숙하지만 자세히 볼 기회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녹색 바탕에 노란색 마름모 그리고 가운데에 파란 지구가 있는데, 그 지구를 얇은 띠가 감싸고 있다. 가까이에서 보면 ‘Ordem e Progresso’ 즉, ‘질서와 진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 말은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가 문명의 성격을 요약한 것으로, 당시 문명론자들 사이에 유행했다. 콩트는 인간의 정신이 발달하면 문명이 정점에 달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질서와 진보가 바로 인간 정신이 가닿을 수 있을 궁극적인 목적지였다. 브라질에서 왕정을 무너뜨린 혁명가들은 유럽이 이룩한 문명을 쫓아가겠다는 다짐을 자신들의 국기에 적어 넣었던 것이다.
문명은 이처럼 눈부셔보였다. 유럽에서 시작된 문명에 대한 열망은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갔다.
그러나 그 과정은 문명론자들이 이야기하듯이 숭고하거나 아름답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후예를 자처하며 이성에 대해 소리 높여 이야기했지만 그 이면에는 노예무역과 식민지배라는 폭력이 은폐되어 있었다. 당시에 문명사를 써내려갔던 역사가들은 어떻게 유럽인들이 남다른 이성에 기초해서 국가를 마침내 세웠는지 질문할 뿐이었다.
문명에 대한 열병은 곧 동아시아로도 퍼졌다. 1870년대에 들어서 ‘문명(文明)’이라는 단어가 영어 civiliztion의 번역어로 선택되어 쓰이기 시작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서양사정 외편』에서 ‘문명개화’라는 표현을 처음 썼다고 알려져 있다. ‘문명개화’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계몽주의자들 역시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를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상태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문명은 도달해야 할 과제처럼 보였다.
(Part 4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