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주의 너머 역사읽기 - Part 4
문명은 왜 이다지도 중요한 과제였을까? 일본 정부가 메이지유신 직후에 서구 국가들에 파견한 이와쿠라 사절단을 쫓아가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서 대규모 사절단을 보냈는데, 이들이 가져간 전권 위임 국서에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종래의 정약定約을 고쳐 바로잡고자 하지만, 우리나라의 개화가 아직 두루 미치지 못하고, 정률定律 역시 달라서 일정한 시간이 흐르지 않으면 그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한다. 그런 고로 힘써 개명 각국에서 행해지는 여러 방법을 택하고 우리나라에 시행하는 데 적절하고 타당한 것을 채택하여 점차 정속政俗을 바로잡아 동일하게 만들기 바란다.
다시 말하면, 서구 국가들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려고 사절단을 보내지만 일본의 ‘문명’ 수준이 국제적 기준에 미치지 못하니 무시를 당한다는 것이다. 마치 현대법이 어린아이는 금치산자라고 해서 스스로 재산을 책임질 능력이 없다고 보는 것처럼 문명 수준은 어떤 국가가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는 기준이었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어떤 국가를 두고 문명 수준이 떨어지는 ‘야만’ 상태에 놓여있다고 판단한다면 그 국가는 더 이상 독립국가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문명은 야만을 훈육하고 이끌 책임이 있었다. 그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고,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이 스스로 짊어진 짐이었지만 말이다. 이 시대는 ‘백인의 짐’이란 요상한 말을 실제로 믿는 사람들이 세계를 지배했던 시대였다.
이처럼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문명을 내세워서 식민 지배를 정당화했다. 문명은 편리하고 쾌적한 삶을 촉진시키는 마법처럼 비쳤지만 그 속내는 결국 자본주의였다. 문명론자들은 유럽인들의 정신을 배우자고 말했지만 그들을 매료시킨 건 유럽이 질서와 진보를 통해 달성한 신기술이었다.
결과만 놓고 봤을 때 더 많은 변기와 더 빠른 기차를 만들어낼 수 있는 생산력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를 향해 떠날 때 타고 갔던 군함과 대포 역시 생산력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산물이었다. 일본은 그와 같은 생산력의 롤러코스터 꼬리에 아슬아슬하게 올라탔고, 조선의 엘리트들은 그 모습을 부러워했던 것이다.
일본이 제국주의 위치에 오르자 일본 엘리트들 역시 자신들의 역사를 세계사적 보편성 위에 올리고자 노력했다. 자신들 역시 문명을 이뤘고, 국가를 만들었기에 유럽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주장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보편성은 유럽의 근대국가들이 그간 거쳐 온 발전과정이었다.
일본의 역사가들은 일본사를 보편적 역사발전 과정 위에 올려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인정을 받길 바랐다. 하지만 그들은 완전히 그럴 수 없었다. 일본의 위치가 정말 아슬아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조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근대화했다며 뽐냈지만 서구의 문명과 비교할 때면 자꾸만 주눅이 드는 모습도 보였다. 일본이 처한 어정쩡한 위치는 러일전쟁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1905년에 벌어진 러일전쟁은 아시아 국가 일본이 서구 국가를 이겼다는 점에서 놀랄만한 사건이었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일본은 미국 메튜 페리(Matthew C. Perry) 제독이 군함 4척을 이끌고 도쿄 앞바다에 나타나서 대포를 쏘면서 불평등한 수교를 강요하는 처지에 있었다. 당시 청나라야 아편전쟁이다 태평천국의 난이다 해서 동네북이 된 지 오래였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어도 큰 사건이라도 보이지는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러시아를 이겼다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러시아가 ‘유럽의 아시아’로 불리는 국가였지만 어쨌든 유럽은 유럽이었다.
러시아군은 일본군에 비해 병기, 장비, 보급능력 등에서 앞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특히 생산력에서 앞서있었기 때문에 대포와 탄약의 수도 그만큼 많았다. 초기 전투에서 일본 해군이 러시아 군함들을 침몰시키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이 불리했다. 러시아가 동아시아 바다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경계했던 영국 등 제국주의 열강들이 급히 중재에 나서지 않았다면 일본은 포탄이 없어서 대포를 쏘지 못하는 사태를 맞았을 수도 있었다. 당시에 러시아 역시 혁명을 진압하느라 전쟁을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기 때문에 중재에 응했던 것이다. 일본은 비록 러시아에게 승리했지만 그 한계 역시 여실히 드러났다.
러일전쟁은 일본의 민족주의자들에게 자극을 크게 줬다. 그들이 보기에 조국 일본은 유럽에 비해서는 조금 뒤처지고, 중국에 비해서도 확실히 앞섰다고 말할 수 없는 어딘가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중국은 오랫동안 중화질서 속에서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지였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여러 모로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서구 식민주의자들의 기준을 따라서 서구 문명을 내세우자니 유럽을 따라가기가 힘들 것 같고, 서구에 맞서 아시아가 똘똘 뭉치자고 주장하려니 조선이나 중국의 ‘급’이 너무 떨어져 보였다. 문명은 너무도 눈이 부셔서 포기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지만 자칫하면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문명을 내세워서 아시아를 집어삼킬 수도 있었다.
일본에서 근대 역사학은 이처럼 모호한 위치를 정리하는 해결사 역할을 자임했다. 국사(일본사), 동양사, 서양사라는 특징적인 3분과 체계가 나타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일본은 서구 문명을 본받아서 아시아의 다른 ‘후진적’인 이웃들과 거리를 두고 싶어 했지만 동시에 일본이 서양과 대등하게 맞서기 위해서는 ‘후진적’인 이웃들을 친구로 붙잡아두어야 했다.
동양은 서양과 달리 일본 식민주의의 앞마당이 될 공간이었다. 비슷하지만 거리를 둬야 했던 ‘후진적’인 이웃들에 대한 연구가 바로 동양사였다. 이런 점에서 일본의 동양사는 ‘투 트랙 전략’을 취했다. 한편에서는 서구적 문명을 기준으로 내세워서 조선이나 중국과 거리를 두고, 다른 한편에서는 동종동문(同種同文)-‘인종과 글이 같다’-처럼 아시아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말로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을 견제했다. 서양사와 구분되는 동양사, 그리고 동양사를 다루는 일본인들의 역사… 이것이 바로 3분과 체계가 담고 있던 세계상이었다.
일본에서 동양사 연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보여주는 기록이 하나 있다. 동양사 개척자로 불리는 시라토리 쿠라키치는 자신이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메이지 36년(1903) 말에 일본으로 돌아왔는데, 그때는 러시아와의 관계가 긴박하게 돌아가 폭풍 전야와도 같은 시기였다. … 다행히 우리 군대가 만한(滿韓)의 벌판에서 러시아군을 압박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그와 더불어 유럽 유학 중에 느꼈던 바가 점점 깊어져 동양의 연구는 동양인이 솔선해서 맡아야 한다는 신념이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실태를 보니 그러한 연구는 대개 이미 서양인에게 선수를 빼앗겨서 일본이 새로 손댈 곳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하나 남은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현재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곳, 또한 전쟁의 동기를 만드는 곳, 그리하여 장차 일본의 세력 아래 귀속되려 하는 만한 지방이다.
이 글은 일본인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이 품고 있던 동양에 대한 인식을 꽤나 투명하게 보여준다. 여기에서 “동양의 연구는 동양인이 솔선해서 맡아야 한다”라는 부분을 주목해보자. 동양을 연구할 ‘동양인’은 다름 아닌 일본인일 것이다. 반면에 연구대상이 되는 ‘동양’은 일본이 아니다. 그곳은 만한(滿韓), 즉 만주와 한반도처럼 일본 바깥의 아시아를 의미했다.
동양은 서양이 군침을 흘리기 전에 서둘러 일본이 손을 대야 하는 무주공산처럼 그려지는 곳이었다. 시라토리의 세계상에서 일본은 서양의 침입에 맞서 동양을 지켜내는 역할을 맡은 주체였다. 이러한 인식에서 역사학은 국사(일본사), 동양사, 서양사라는 3분과로 나뉘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이 지점에서 질문거리가 하나 생긴다. 일본 역사학에서 조선사는 어디에 놓였을까?
조선이 식민지가 된 뒤라면 다른 나라라고 말할 수 없기에 일본사에 들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식민지민들은 문명이 뒤떨어진 존재들이 아닌가. 만약 그들이 일본인들과 다를 바 전혀 없는 존재들이라고 인정하면 조선을 더 이상 식민지인 채로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제국이 앞선 문명으로 식민지민들을 보살펴준다고 정당화할 수 없다면 식민지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힘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건 통치에 비용이 너무 드는 일이다.
그렇다면 조선사를 일본사에서 분리해서 동양사에 넣는 방식은 어떨까? 이 경우는 본국과 식민지 사이에 구분을 확실히 둘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조선사를 일본사에서 너무 분리해버릴 경우 식민지에서 민족주의를 자극할 위험이 있었다. 일본과 다른 조선인들만의 역사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현실 정치로 이어지게 되면 분리 독립으로 표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이라면 문명을 기준으로 식민지민들과 자신들을 확실히 분리했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백인의 짐’이라는 사명감을 부여했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식민지민들과 피부색부터 달라서 구분을 짓기가 훨씬 수월했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불평등 조약을 맺는 굴욕을 함께 겪던 나라 중 하나였으니 갑자기 문명 타령을 하기가 어려웠다. 버클과 같은 영국 역사학자들은 유럽의 자연조건에서 문명의 뿌리를 찾았는데, 동아시아는 좁은 바다를 끼고 이웃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자연조건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난다고 보기도 애매했다.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을 완전히 적용하기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민도民度’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이 말은 오늘날까지 남아서 한국 매체에서도 종종 접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두고 ‘우리 국민들의 민도가 무섭게 나타난 선거’ 혹은 ‘투표율이 낮았던 것은 우리 국민들의 민도가 성숙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평하는 말들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민도는 글자 그대로 국민성이나 민족성의 수준을 의미한다. 조선과 일본이 비록 유사한 점이 많더라도 그 수준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식민지배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때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개념이었다. 실제로 한일합방을 전후해서 식민정책 담당자들이 내놓은 말들을 보면 ‘민도’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교육은 시세와 민도에 적합하도록 할 것”, “민도 실정에 비추어”, “민도에 적합한 간이한 시설”……그러나 민도가 객관적인 지표로 제시된 적은 없었다.
일본 식민정책 담당자들은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이야기할 때면 ‘민도’보다 ‘국민성’이라는 표현을 선호했다. 식민지 정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나 민도 운운했다. 그래서 민도에는 두 가지 뉘앙스가 있었다.
하나는 일본의 ‘국민성’을 기준으로 그에 미치지 못한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성 수준은 ‘100점 만점에 82점’ 같은 식으로 점수를 매겨서 측정할 수가 없고, 단지 ‘낮다’고만 평가할 뿐이었다. 민도가 80점이라면 노력에 따라서 90점도 될 수 있고 100점도 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의 민도가 낮다고 말할 뿐이라면 그 말은 조선인들에게 스스로 개선할 능력이 없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민도라는 말에는 식민지민들의 문명 발달 정도와 그들의 ‘민족성’ 자체에 대한 판단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이 교묘한 방식으로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민도라는 기준이 현실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으니 역사학자들 역시 그 기준에 따라서 식민지 조선의 역사를 써가기 시작했다. 일본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은 조선 역사를 두고 이렇게 물었다. ‘조선은 어쩌다 저 모양이 되었나?’ 이들이 보기에 조선인들은 스스로 국가를 세울 능력이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그 이유를 역사에서 찾는 역할을 스스로 맡았다.
(Part 5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