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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Mar 08. 2022

뜻밖의 만남

런던 명품거리 한복판에 있는 상업화랑에서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의 전시를 한다고 해서 길을 나섰다. 추상화가 미술사에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추상을 그렸던 스웨덴 여성화가.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니 사후 20년 후에 작품을 공개하라고 유언했던 예술가. 작품이 공개된 후에는 20세기의 혁신적인 예술가이자 추상화의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는 그녀의 작품을 만나러 갈 생각에 기대로 가득 찼다. 그곳에 가려면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명동과도 같은 옥스퍼드 서커스 역의 쇼핑가를 지나가야 했는데 평일 오전인데도 사람들로 붐벼서 조금 놀랬다. 그 모습을 보며 일상을 빼앗긴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떠오르며 마음이 무척 착잡해졌다. 물건을 가득 사고, 쓰고 버리고, 쌓아두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욕망으로 들끓는 용광로를 가득 채우는 사람들을 보며 야속한 마음마저 들었다.


힐마 아프 클린트는 죽음으로 여동생을 잃고 나서 영혼과 정신적인 것에 심취되어 있었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작품은 영속의 세계로, 천상의 세계로 향하는 제단처럼 느껴졌다. 죽음에 의미를 두는 예술가들의 작품은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늘 있는데 그것은 고인을 사랑하는 방식을 작품으로 보여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힐마 아프 클린트의 추상을 보면서도 여동생과 닿고 싶은 애잔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림 속에서 만큼은 현실을 초월하여 연결되고 싶었던 그 마음을...

 

<지식의 나무(Tree of Knowledge)> (1913-1915), 힐마 아프 클린트

같은 갤러리의 1층에서는 내가 아는 이름의 사람이 전시를 하고 있었다. 미술계에서 슈퍼스타가 된 그녀의 근황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뜻밖의 만남에 나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의 작품은 세계 최고의 현대 미술 갤러리 런던 지점 1층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스크린의 텍스트로만 남아 있던 그녀의 성공이 내 일상에 침투해 들어와 피부에 새겨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이렇게 거물이 되는 동안 나는 무얼 했나 하는 생각 들었다. 갑자기 내가 하는 일들이 괜히 하찮게 느껴졌다. 신을 바짝 차리고 살지 못한 것 같아 후회도 됐다. 그녀의 명성이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을 열고 갤러리를 나왔다. 거리의 소음이 점점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어떤 소리가 천천히 나를 따라왔다. 그 소리의 그림자가 내 몸에 겹쳐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비난하던 욕망의 무리 속에 사실은 내 자리도 있었다는 걸 슈퍼스타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켜 내게 알려주는 것 같았다. 나는 허탈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모습만 다를 뿐 뿌리는 같은 그 허황된 것에 현혹된 내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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