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영국 최고 권위의 미술상인 터너상의 2022년도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베로니카 라이언(Veronica Ryan)이라는 66세의 흑인 여성 조각가가 그 영예를 차지했다. 요즘 영국 예술계의 동향으로 보아, 베로니카 라이언은 흑인이고 게다가 여성이니 어찌 보면 뻔한 수상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라는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 운동 이후 영국에서 흑인 예술가들이 주목받고 있고, 이에 못지않게 여성 예술가의 전시도 자주 기획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디언의 기자와 평론가들은 터너상의 최고령 수상자가 된 그녀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오랜만에 적합한 수상자가 호명되었다며 반색하기까지 했다. 이런 반응 때문에 그녀의 전시가 더욱 궁금해졌다.
베로니카 라이언의 메인 전시는 올해 터너상의 주최지인 테이트 리버풀(Tate Liverpool)에서 전시되지만, 런던의 한 상업 갤러리에서도 그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보통 유명 미술관에서 기획전으로 조망되는 작가의 작품은 상업 갤러리에서도 동시에 전시되곤 하는데, 대대적인 기획전의홍보 효과가상업 갤러리에서 작품 판매에 도움을 주나보다.
런던 번화가 한 복판에서 살짝 옆 골목으로 빠지니 전시장이 나타났다. 전시는 언제나 나를 다른 시공간으로 데려다주는데, 이번에는 어느 더운 나라의 한적한 바닷가에 도착한 것 같았다. 토착민만 찾을 것 같은 그런 외지고 평범한 해변. 베로니카 라이언의 작품은 이곳의 모래사장을 거닐 때 발견할 법한 것들로 가득했다. 해변 주변의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 열대열매의 씨, 찌그러진 페트병들, 그물, 어망, 물병 뚜껑, 플라스틱 포장재 같은 것들. 상업화랑에서 판매가 될 가능성이 있을지 의심스러운 소재들로 가득 찼다. 해변가에 나뒹굴다 누군가의 발에 밟히고, 모래에 묻히거나, 쓰레기로 쌓일 수도 있을법한 것들. 그런 하찮아 보이는 것들이 어딘가에 돌돌 감겨 있거나 묶여 있었다. 카리브해에 있는 영국령의 섬인 몬트세랫에서 태어나 아기 때 영국으로 이주해온 작가의 배경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작품들이 내게 뭉클하게 다가왔다. 그녀의 부모가 오래전에 배를 타고 낯선 땅에 도착한 것처럼, 그녀의 작품들도 어딘가로부터 파도에 휩쓸려온 것 같았다. 영국에서 이민자로 살아온 그녀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도 같았고, 이민자의 팍팍한 삶 또한 작품에 투영된 것 같았다.
베로니카 라이언의 전시 이미지
2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력이 부족해진 영국은 식민지 국가 국민들의 영국 이주를 장려했다. 그중, 카리브해 출신 이주민인 윈드러쉬 세대는 영국에서 계속 합법적인 거주를 해오다가2018년에갑자기 불법 이민자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이주 당시엔 주먹구구식으로 아무 조건 없이 그들을 환영하던 영국 정부가 노인이 된 그들에게 이제 와서 이민 서류를 증명하라고 나선 것이다. 그 결과, 적합한 문서가 없던 많은 이들은 여권을 몰수당하고, 법적 권리를 거부당하거나 추방당했고, 아직도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이런 일방적이고 불합리한 처사에 대해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2021년 베로니카 라이언은 윈드러쉬 세대를 기리는 최초의 공공예술 조형물을 런던 해크니 지역에 선보였다. 카리브해의 과일인 커스터드 애플, 빵나무 열매, 가시여지를 바위크기만큼 크게 만들어 그녀가 해오던 작업의 일관된 성격을 보여주었다. 고향을 떠나 먼 이국 땅에 온 윈드러쉬 세대들이 영국에서 뿌리를 잘 내리고 열매를 맺어 더욱 융성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 같았다.
한때 바다를 떠돌던 부유물이었다가 어느 모래사장에 불시착한 보잘것없는 사물들, 미미하고 평범하고 하찮아 보이지만 아름다운 베로니카 라이언의 오브제들은 마치 지구에 흩뿌려져 있는 인간들 같았다.나라는 인간도, 타인도시간의 파도를 타고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된 조상들의 퇴적물, 그렇게 이 땅에 도착한 피의 창조물이기도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깨달음이 드니 나 자신이 새롭게 다가온다.뿌리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인간이라는 존재가 더 고귀하게 느껴진다.
"내 마음속의 거대한 변화는 안중에도 없이 세상은 너무나 잘 돌아가고, 그보다 더 나를 작고 보잘것없게 만드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자유로운 것 또한 없다. 이 세상 속에서 나의 미미함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살아야 할 이유> 매트 헤이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