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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mo Kang Jun 13. 2019

시모노세키, 시모노세키

모리 히데모토, 다카스기 신사쿠, 미야모토 무사시 그리고 아베 신조


시모노세키(下関)에서 제일 먼저 만난 얼굴은 바로 아베 신조(安倍晋三)였습니다. 네, 매일처럼 뉴스에 나오는 그 사람 맞습니다. 제가 이 여행을 시작한 2017년 10월 12일은 일본 중의원 선거 10일 전이었습니다. 이 곳, 야마구치 현 제1 선거구인 시모노세키가 아베 신조의 지역구였던 거지요. 이른 아침인데도 아베 신조를 외치는 선거유세차량과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골목마다 그 얼굴이 크게 붙어 있더군요. 이 선거에서 아베는 자신의 지역구에서는 72%가 넘는 지지율로 당선되고 전체 선거에서도 자민당이 압승을 해서 다시 총리로 선출되었습니다. 여행 초반 내내 그 얘기를 듣고 다녀야 했지요. 아베 본인은 도쿄에서 태어난 명문가 ‘도련님’인데 이쪽 기반인 외가 쪽의 선거구를 물려받았습니다. 아버지 아베 신타로가 먼저, 그다음 아베 신조까지. 기껏 밤바다를 건너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아베 얼굴이라니. 이런.



첫날이었고 이동거리도 좀 되긴 했지만 시모노세키라는 도시에도 관심이 가는 곳들이 많아 오전 동안 몇 군데를 돌아보기로 합니다. 항구 근처의 가라토(唐戸)시장을 잠깐 들렀습니다. 시모노세키는 일본에서 복어로 가장 유명한 도시. 큰 시장은 아니지만 오밀조밀 볼거리가 많습니다. 시간이 많으면 시장과 음식점들만 차분히 다녀도 반나절은 보낼 것 같더군요. 세토내해(海)가 시작되는 이곳은 혼슈의 시모노세키 항와 큐슈 모지(門司) 항이 마주 보고 있는 좁은 해협입니다. 간몬(關門)해협이라고 불리지요. 이 두 곳을 잇는 커다란 다리의 이름 역시 간몬 대교. 교토나 에도 쪽으로 이어지는 관문인 세토내해의 입구인 만큼 일본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중요한 곳이었겠지요. 대표적인 사건이 12세기의 ‘겐페이전쟁(源平合戰)'입니다. 전 일본의 패권을 놓고 지금의 간몬대교 앞 단노우라()에서 부딪힌 두 가문의 전쟁에서 승리한 겐지(原氏) 가문은 일본의 무사정권 시대의 시작인 카마쿠라 막부를 열었고, 패배한 헤이시() 가문이 옹립했던 안토쿠 천황은 8살 나이에 외조모의 품에 안겨 간몬 대교 아래 바다에 잠겼습니다. 이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붉은색 ‘아카마신궁(赤間神宮)’이 안토쿠 천황을 위로하는 신사지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예능프로라면 역시 연말의 '홍백가합전'이겠지요. 우리나라는 좌청룡 우백호에서 따와서 주로 청백전으로 양편을 나누는데 일본은 홍백전입니다. 이 겐페이전쟁 때 양쪽 군의 군기(軍旗)가 홍색과 백색이어서 그렇습니다. 


간류지마에서 본 간몬대교. 왼쪽이 혼슈 시모노세키, 오른쪽이 큐슈 모지.
간몬대교 아래, 겐페이 해전을 상징화한 조형물.
시모노세키 역사박물관의 겐페이 해전 재현 모형. 홍기가 헤이시(平氏), 백기가 겐지(原氏)
안도쿠 천황을 위로하기 위한 아카마 신궁


바다를 끼고 모터바이크를 달려 우선 좀 먼 곳, 조카마치(城下町) 조후(長府)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옛 성 아래 고요하고 깨끗한 마을이 나옵니다. 이 곳에 시모노세키 시립 역사박물관과 미술관, 1900년 무렵에 세워진 조후모리저택(長府毛利邸)도 있습니다. 오래된 문을 통해 마당으로 들어 가면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의 동상이 보입니다. 어린 나이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모두 출정했고 세키가하라 전투에도 모리 가문을 대표해서 참전했습니다. 유명한 ‘도시락’ 사건의 주인공이지요. 서군 총대장을 맡았던 의부 모리 데루모토는 전장에 나오지 않고 오사카 성에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함께 있었지요. 세키가하라 패배 이후 도쿠가와 이예야스에게 거대한 영지를 거의 몰수당하고 동해바다의 작은 마을 하기로 쫓겨간 모리 가문에게서 이 곳 조후(시모노세키) 영지를 받아 초대 조후 번주가 되었다지요. 그래서 시모노세키 박물관의 거의 절반은 모리 가의 역사로 채워져 있습니다. 시내에서 좀 먼 곳이서 그런지 박물관도 모리 저택도 관람객이 거의 없더군요. 일본에 건너오기 전에 여기저기 쑤셔 넣었던 모리 성을 가진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피곤한 머릿속에서 뒤섞입니다. 

조후 모리저택
작대기 밑 삼원이 모리 가문의 카몬(家紋). 조후 번의 작대기는 곧은 일자.
조후 초대번주 모리 히데모토
시모노세키 시립역사박물관의 전시. 료마는 지역 사람도 아닌데 지나만 갔어도.. 일본은 료마, 료마..

이 동네의 가장 핵심 방문지는 고잔지(功山寺)입니다. 아아주 오래된 절이지요. 당나라 양식의 불전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모리 가문묘가 있기도 하지만 제가 이곳을 굳이 찾은 이유는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의 카이텐(回天) 때문입니다. 메이지 유신의 시작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지요. 막부말 존왕운동의 선봉에 섰던 죠슈(長州) 번을 에도 막부가 무력으로 누른 1차 죠슈 정벌에서 패배한 뒤 죠슈 번의 존왕파들이 실각했을 때, 이 곳 고잔지에서 다카스기 신사쿠가 소수의 기헤이타이(奇兵隊)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죠슈 번을 장악합니다. 이후 죠슈 군을 현대화시키고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사쓰마 번과의 동맹(그 유명한 삿쵸동맹)을 이끌어 2차 죠슈 정벌에 나선 막부 군을 대파하게 되지요. 이 타격으로 결국 다음 해에 에도 막부는 막을 내리고 메이지 유신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 근처 두 곳에서 700년 일본 무사정권의 시작과 마지막을 상징하는 사건들이 일어난 거지요. 고잔지 경내에는 그래서 말머리를 돌리는 다카스키 신사쿠의 동상이 우뚝 서 있습니다. 정작 다카스키 신사쿠는 메이지 유신의 시작을 못 보고 바로 전에 병사하고 말았는데 그래서 같은 해에 암살당해 죽은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특히 인기가 많은 유신지사입니다. 실제로 아베 신조와 아버지 아베 신타로 두 명의 이름에 들어있는 신(晋)이라는 글자가 다카스기 신사쿠의 이름에서 가져온 거라고 합니다. 다카스키 신사쿠의 이야기는 하기(萩)에서 계속.^^

카이텐(回天)이 일어난 고잔지의 다카스기 신사쿠 동상
고잔지(功山寺). 국보로 지정된 불전과 모리가문 묘소


시모노세키 항구와 맞은편 모지 항구 중간 정도에 작은 섬 간류지마(巌流島)가 있습니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만화 ‘배가본드’를 보신 분은 기억하실 이름입니다. 주인공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가 사사키 고지로(佐々木小次郎)와 결투를 한 장소지요. 시모노세키와 모지 양쪽에서 배가 다닙니다. 작은 무인도일 뿐인데 ‘결투의 성지’로 워낙 유명해져서 두 사무라이가 칼을 들고 마주하고 있는 동상과 여기서 죽은 사사키 고지로를 기리는 작은 사당이 있고 그걸 보러 꽤 많은 사람이 이 곳에 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지요. 미야모토 무사시는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을 즈음에 태어나서 전국시대 말기를 살았던, 어쩌면 제일 ‘유명한’ 검객이지요. 19세에 앞에서 언급한 세키가하라 전투에도 참전했다는데(누구의 휘하였는지는..) 이후로 60여 차례 결투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다가 이 ‘간류지마 결투’에서 사사키 고지로를 이긴 후에는 근처 구마모토 번에 들어가서 중급 사무라이 검술 사범으로 살았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대단한 검객이었겠지만 떠돌이 낭인이어서 이름이 더 났을 뿐, 다이묘나 가신 사무라이들과는 다른 식으로 전국시대를 살아낸 사람입니다. 번사(번에 소속된 사무라이)였다면 어쩌면 못난 주군을 따라 할복하거나 높은 자리를 얻으려는 정쟁에 휩쓸려 검술을 연마할 생각을 못했겠지요. 

사사키 고지로는 긴 장검을, 미야모토 무사시는 후나지마(당시의 섬 이름)로 가는 노(櫓)를 깎아 만든 목검을 들고 있습니다
사사키 코지로 묘비.


시모노세키 시내의 오래된 근대 유적들이나 복어식당, 아이스크림 가게들도 더 살펴보고 싶긴 했지만.. 이동해야 할 거리도 적지 않아서 점심 무렵엔 길에 나서야 합니다. 일본 길에 조금 적응되긴 했지만 그래도 첫날이니 조심해야지요. 그리고 이번 일본 여행 첫 번째 음식으로 정해놓은 가와라 소바집까지도 좀 가야 합니다. 이 도시의 구석구석은.. 다음 기회에. 안도쿠 천황의 유혼과 다카스기 신사쿠의 뒷모습, 모리 히데모토와 미야모토 무사시의 자취를 지나 거기다 아베 신조의 못생긴 얼굴까지. 자, 이제 메이지유신의 본류, 조슈 번의 도시, 하기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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