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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이 Feb 28. 2020

말하지 않아도

<안녕 드라큘라>

<안녕 드라큘라>, JTBC, 2020.02.17.~2020.02.18., 연출: 김다예 / 극본: 하정윤 / 제작: 드라마 하우스




한국의 단막극 시리즈 3대장을 뽑으라고 한다면, 바로 'KBS 드라마 스페셜', 'tvN 드라마 스테이지', 그리고 'JTBC의 드라마페스타'라고 할 수 있다. (세 시리즈 모두 각기 매력이 있다. 드라마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웨이브, 티빙에서 다시 볼 수 있으니 한 번쯤 보시길 권한다.) 그중에서 JTBC 드라마 페스타는 매년 한결같이 찾아오는 스페셜이나 스테이지와는 달리 언제 몇 개를 할 지 정해져 있지 않아서 방영 소식을 알려올 때마다 어쩌다 받은 선물 같은 느낌이 있다. 이번에 방영된 <안녕 드라큘라>는 무려 2020년 '첫 번째' 드라마페스타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왔다. 2018년, 2019년에는 한 편씩만 방영되어 아쉬운 감이 있었는데 올해에는 '두 번째' 드라마페스타를 내놓을 수도 있다는 거다. JTBC의 올해 첫 단막은 어떤 모습일지, 여러 모로 기대감에 차 이 작품을 봤었다.

내가 생각하는 단막극만의 매력은 크게 세 가지다. 16부작 미니시리즈에 비해 비교적 실험적이고 독특한 내용, 확실한 주제의식, 그리고 영화적으로 집약적인 이야기다. 그리고, <안녕 드라큘라>에서 가장 돋보이는 매력은 바로 '확실한 주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쉽게도 이 작품에서 확실한 주제의식은 강점보다는 약점이 된 느낌이다.



세 명의 피해자

<안녕 드라큘라>는 세 가지 주제의식을 담은 세 가지 이야기가 한데 엮인 옴니버스 형식의 작품이다.

누구에게나 꿈꿀 자유가 있고, 누구에게도 남의 꿈을 비난할 권리는 없다고 말하는 서연(이주빈 분)과 상우(지일주 분)의 이야기. 형편과 경제력은 친구가 되는 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유라(고나희 분)와 지형(서은율 분)의 이야기. 그리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길 바라는 안나(서현 분)와 그녀의 엄마 미영(이지현 분)의 이야기.

각각의 세 이야기는 아주 보편적인 관계-연인, 친구, 가족(모녀)과 주제의식을 담은 소재-꿈, 재건축, 동성애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조합이 그 자체로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의미있는 소재가 보통의 관계와 얽혀 있고, 또 여러 관계를 한데 보여주니 꽉찬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세 이야기에서 주제의식이 독이되었다고 느낀 이유는 각 이야기마다의 중심 화자가 '피해자' 모드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작품은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서연,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유라,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안나를 사실상 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각자가 다른 인물 혹은 사건 때문에 겪고 있는 문제를 그들의 입장에서 서술한다. 그러나 내 이해심의 문제인 건지 작품에서 드러나는 이 화자들의 모습은 피해의식에 젖어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작품은 주인공을 고난에 빠트리는 인물 또한 단편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들이 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했던, 받아주지 못했던 데는 그들 나름의 이유도 있고, 논리도 있고, 입장도 있다. 그리고 시청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행동과 말은 충분히 이해가 가능했다. 그런데 주인공은 문제를 해소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상대를 원망하고 비난한다. 결국 나는 주인공보다 상대역을 더 이해하며 작품을 따라갔고, 그래서 주인공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작품이 주인공으로 삼은 인물은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전하고자 하는 문제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인물. 작품은 그들의 내면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 고발하고,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싶었을 거다. 그런데 그 시도가 너무 과한 나머지, 오히려 주인공에게 이입하지 못하게 된 것 같다.


명대사로 남는 법

작품에서 주제의식이 독이 됐다고 느낀 두 번째 이유는 대사다. 작품에서 주제의식을 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줄거리도 있고, 연출도 있고, 대사도 있고, 그리고 이 모든 게 어우러질 수도 있다. 내가 본 이 작품은 대사에 힘을 많이 준 느낌이었다. 작정하고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쓴 듯한 대사가 많았달까.


내가 지금 내 비극에 대해서 딱 두 줄로 요약해 줄테니까
여기 얼마나 많은 비극이 숨어있나 맞춰봐.
나는 8년 사귄 여자친구한테 일방적으로 차였다.
그리고 엄마가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날 외면하고
다른 남자한테 의지할까봐 두렵다.


있죠, 선생님. 저한테 순수하다고 하는 건 칭찬이죠.
근데 그게 꼭 나쁜 것 같아요.
다들 저한테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데
제가 뭘 모르는지 말해주지를 않거든요.


너 내 말 아직 이해 못했구나.
니가 뭔데 남의 인생에 평가질이야.
넌 니가 그렇게 사는 게 좋음 그거 꼭 붙들고 살아.
누가 뭐래?
난 개똥밭을 굴러도 음악이라고!
냄새가 나도 기분 최고라고! 어?


제발 그만 좀 하시라고요!
지금 이거 애들한테 상처예요. 어른 되도 아파요.
책임 못 지시잖아요. 아니 안 지실 거잖아요.
그럴 거면 상처 주지 말라고요.
뭐가 제대로인데요? 대체 뭐가 맞는 건데요.


학교에서 드라마 작법에 대한 강의를 들을 때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있다.


좋은 드라마는 가르치지 않는다.


드라마는 토론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래서 말하고 싶은 바를 직접적으로, 정확한 워딩으로 전달하지 않고 이야기라는 포맷에 맞게 은유적으로 전달한다. 좋은 대사는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느끼게 한다. 그래서 기억에 남을 명대사는 무심코 드라마를 보고 있다가 훅 속수무책으로 가슴 속에 들어오고, 대사를 시작한 순간, '아 공들인 대사 시작한다' 하고 느꼈더라도 대책없이 감동받는다.

말하고 싶은 바를 대사로 표현하는 건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머리로 오는 대사보다 가슴으로 오는 대사가 나는 더 듣고 싶었다.


세 이야기의 조합

앞서 소개했듯 이 작품은 세 이야기가 담긴 옴니버스 형식의 작품이고, 각 세 이야기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이 세 이야기가 모였을 때의 시너지가 크지 않았다는 점이다.

작품에서 이 세 이야기는 학교라는 공간을 기점으로 연결되어 있다. 안나와 서연은 각각 초등학교 정교사와 방과후 수업 교사로 동료 관계고, 유라와 지형은 안나와 서연이 일하는 학교의 학생이다. 그리고 마지막 즈음에서는 유라와 지형의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안나, 미영, 서연이 개입하기도 한다.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장면에서 이야기가 의도한 시너지는 분명하다. 안나가 유라에게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는 것. 어른들에게 상처받은 아이를 구하면서 어린 시절 자신이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

하지만, 그 외에는 이 세 이야기가 왜 한데 얽혀있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 주제의식이 모여서 하나의 큰 주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각 이야기의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게 아니어서 이 세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느낌보다는 각자 자기 주장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결국 크게 보았을 때 같은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각 이야기의 소재와 인물 관계만 다르게 설정했다면 세 이야기가 얽혔을 때 더 큰 감동과 시너지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오랜만에 만난 드라마페스타 작품이었고, 특히 미영 역할을 맡은 이지현 배우의 연기가 아주 아주 좋았다. 핸드헬드로 찍은 듯한 카메라 움직임이나 어린 시절의 자신과 맞닥뜨리는 안나의 모습 등 좋은 연출도 많았고. 그래서 내가 느낀 아쉬움이 더 안타까웠다. 다음 페스타 작품은 별 아쉬움 없는, 더 기억에 오래 남을 드라마이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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