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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드 Aug 12. 2024

애씀과 참말이 깃든



공부 / 김사인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 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꿇은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     


* 수록면 : 김사인, 「공부」, 『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 2015, 118~119쪽.                         




엄마 없이 시골 버스를 혼자 타고 맨 처음 간 곳은 읍내 서점이었다. 학습지 매대를 지나쳐 고심 끝에 고른 책은 『세계의 명시』였다. 릴케는 외톨이 기질이 다분했던 나에게 “고독은 비와 같은 것”(「고독」)이라는 말을 가르쳐 주었다. 책 모서리가 접힌 ‘고독’을 나는 수시로 들락거렸고 “강물과 함께 흘러”가는 고독한 사람들을 흠모하게 되었다. 미숙하고 무지하기 짝이 없던 나는 까마득한 밤이 오면 낯선 시인들의 시집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사무치게 필사했다. 좀 더 나은 인생을 살고 싶었고 그저 간절했다.


어느 날 <인문학극장-시가 나를 불렀다>라는 2년 전 기획공연 영상을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보게 되었다. 마음과 힘을 다한 우연이었다. 대담자로 나온 김사인 시인의 목소리는 “외로운 떨림들”(「풍경의 깊이」)로 절실했고 단호했다. 그는 방언하듯 공수하듯 말을 불러내는 자들이 시인이라 말했고 그는 방언하듯 공수하듯 사사롭지 않은 말들을 황홀하게 읊조렸다. ‘시인은 애를 쓰며 말하는 자이고, 시는 애쓴 말이다’라는 그의 주술을 곱씹어 삼키고만 싶었다.


공부


올해 여름 김사인 시인의 「공부」를 읽으면서 폭우를 견뎠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사철나무 삽목들을 애지중지 키우던 비닐하우스에 빗물이 어른 키만큼이나 차올랐다. 애쓴 것들은 한순간에 망가졌고 나무 농사를 망쳐서 어떡하냐고 사람들은 걱정했다. 빗물이 빠진 처참한 비닐하우스에서 흙떡이 된 플라스틱 화분들을 호스를 길게 끌고 와서 씻겨냈다. 물배가 찬 꼬맹이 나무들은 살아나지 못했고 나는 그것을 쓸어 모아 마대에 담았다. 애쓴 시늉이겠으나 ‘다 공부지요’라고 말하고 나니, 좀 견딜 만해졌다.


비가 그쳤고 「공부」를 외울 지경이 되고 나서야 나는 이 시가 애쓴 말에 대한 본색이라는 걸 넝마주이 같은 비닐하우스 안에서 깨달았다. 활자로 구현된 시 전문 속에서 유독 작은따옴표로 맺힌 속말에 주목하게 되었는데 ‘다 공부지요’와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 하고 계십니다’라는 두 말이 “어머님 떠나시는 일”(죽음)에 대한 강력한 응대의 말이듯, 그것은 나의 기도와도 맞닿아 있었다. 나는 죽은 어린 나무들과 아직 작별하고 싶지 않았다. 나무가 죽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죽음’ 이외의 다른 말이 필요했으므로 나는 그의 ‘공부’라는 말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러니까 ‘우리 나무 마지막 큰 공부 하고 계십니다’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었고 나는 이 말에 크게 위로받았다. ‘공부’가 아니었더라면 이 여름은 아득하기만 했을 것이다.


비는 오고 그치기를 반복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떠나시는 일”과 “남아 배웅하는 일”은 속수무책으로 벌어지고 그것은 서러운 일임을 잊지 말라는 속울음 같은 비. ‘우리 어매’의 죽음을 직면한 “무릎 꿇은 착한 소년”들이 맞는 비. 그것은 고맙다기보다는 차라리 서러운 비였다. 그래서 ‘다 공부지요’라는 말은 스스로 견딜 말한 힘을 장착한 내면의 발화인 셈인데 ‘내’가 애를 쓰며 “앉은뱅이책상 앞”을 지키는 이유는 죽음을 피하기보다는 ‘어머님’의 죽음을 견디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김사인 시인은 지상에 뿌린 내린 존재가 자신의 한평생을 매듭짓는 일이 죽음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안다. ‘어머님’이 한번 ‘떠나시면’ 그것이 영원한 작별이라는 걸 그는 너무나 잘 안다. 죽음을 잘 안다고 해서 죽음을 잘 견딜 수 있겠는가. 공부는 미숙하고 무지한 존재가 덜 미숙하고 덜 무지하기 위해 애쓰는 일이다. 나는 ‘덜’이라는 부사어의 끝을 생각해 본다. 더 이상 미숙하지 않고 더 이상 무지하지 않은, 저 인생의 끝자락에 놓인 죽음이 시인의 말대로 ‘마지막 큰 공부’라면 ‘우리 어매’의 죽음은 삶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김사인 시인은 “참 좋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에는 참말이 깃들어 있으리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듯 죽음은 무한하고 이 무한한 반복은 마치 죽음의 영원성처럼 느껴진다. 어느 날 죽은 나무가 ‘새움’을 피운다면, 그것은 애쓴 자의 말과 같은 것이리라.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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