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다 보면 고개가 갸우뚱거려질 때가 많다. 특히 전래동화를 읽다 보면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자꾸만 딴지를 걸고 싶어 진다. 오늘은 혹부리 영감님을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들을 한번 이야기해볼까 한다.
우리 집에는 두 가지 버전의 전래동화가 있다. 하나는 친한 선배 언니의 아이들이 읽던 책을 물려받은 것이고, 또 하나는 시누이가 사 준 것이다.
처음에는, 전래동화가 두 종류나 있을 필요가 있나 생각했었다. 안 그래도 좁은 집에 공간도 차지하고, 두 시리즈의 80프로 정도가 중복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받은 것이니 일단 책장에 꽂아두어 보기로 했다.
그런데 같은 이야기라도 출판사에 따라 이야기 전개의 디테일이 미묘하게 달라 비교해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하긴 전래동화라는 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다 보면 여러 가지 각색을 거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아닌가. 일단 오늘의 주인공 ‘혹부리 영감님’을 살펴보자.
두 버전 모두 착한 혹부리 영감님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길을 잃어 빈집에 들어간다. 어쩐지 무섭고 잠이 오지 않아 노래를 불러보는데 흥겨운 노랫소리에 이끌린 도깨비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여기까지는 똑같다. 그런데 두 버전에서의 혹부리 영감님의 대응이 달라진다.
먼저, 첫 번째 버전에서 혹부리 영감님은 도깨비들이 무섭지 않다는 생각에 장난을 친다. 어찌 그리도 노래를 잘하냐는 도깨비의 물음에 턱에 달린 혹 덕분이라고 뻥을 치는 것이다.
어허, 도깨비들을 마주하고도 무섭지 않다니! 오래 살다 보면 저 정도 담력이 생기는 것인가? 일단 나 같은 쫄보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드립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순진한(?) 도깨비들은 그 말을 믿고 영감님의 혹을 떼어가는 대신 보물을 준다. 그런데 영감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니, 장난이었다며? 그럼, 아니라고 오해라고 말려야 되지 않나? 착한 거 맞아?!!! 게다가 거짓말인 게 금방 들통날 텐데, 나중에 찾아와서 해코지할까 봐 무섭지도 않나? 무려 도깨비들인데? 아참, 담력 센 영감님이었지!
뭐 어쨌거나, 거추장스러운 혹을 떼어가고 보물을 준다는데 순간 혹할 수 있겠구나 싶다. 사람이 살다 보면 뒷 일을 생각하기보다 눈앞의 이익에 혹해서 실수를 저지를 때가 종종 있는 법이니까. 착한 사람도 실수는 할 수 있는 법이지.
그런데!!!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님이 찾아와 빈 집이 어딘지 물었을 때는, 이거는 인간적으로 알려주면 안 되는 거다.
그 양반이 어떤 생각으로 빈집을 물어보는지 모르지는 않을 거 아닌가? 지금쯤 노래도 안 나오는 혹을 붙들고 분통 터뜨리고 있을 도깨비들과 마주치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짐작이 가지 않는가?
성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알려준다 하더라도 경고 정도는 해주는 게 인지상정이거늘. 설마 도깨비들이 이번에도 속아 넘어갈 정도로 순진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 영감님 이거 도깨비들을 너무 물로 보시네. 누가 이 영감님을 보고 착하다 했던가. 이 정도면 착한 게 아니라 생각이 없는 거다.
두 번째 버전의 혹부리 영감님은 좀 더 인간적이다. 일단, 도깨비들을 보고 무서워 떨었다. 그래, 이게 정상 아닌가?
노래가 어디서 나오냐는 물음에 입에서 나온다고 솔직히 대답했다. 그런데 도깨비들이 믿지 않았다. 목에서 나온다고 해도 믿지 않았다. 말문이 막힌 영감님이 가만히 있자, 도깨비들은 턱에 달린 혹이 노래 주머니인 게 틀림없다고 마음대로 생각하더니 다짜고짜 팔라고 한다. 영감님은 무서워서 고개만 끄덕인다. 엉겁결에 혹도 떼고 부자도 되었다.
그런데 이 영감님 역시 자신을 찾아온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님에게 어떤 경고도 없이 빈 집의 위치를 알려준다.
결말은 뭐, 우리가 아는 그대로.
두 버전에서 모두 착하다고 하지만 결코 착한 것 같지 않은 혹부리 영감님은 혹도 떼고 부자도 되었다. 나도 한 번 저 영감처럼 혹도 떼고 팔자도 고쳐보자고 나섰던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님은 오히려 쌍 혹부리가 되어 돌아온다.
심지어 첫 번째 버전의 혹부리 영감님은 본인이 너무 욕심을 부려 이렇게 되었다고 반성까지 한다. 이쯤 되면 정말이지 누가 착한 건지 모르겠다.
권선징악의 메시지가 강한 전래동화의 특성상, 두 등장인물을 통해, 착하게 살다 보면 우연찮게 복 받는 일도 생기지만 무리해서 욕심을 부리면 험한 꼴을 당하게 된다는 교훈을 담고 싶었던 것은 이해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아이들이 정말 그런 교훈을 얻게 될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우리 집 큰 아이는 전래동화를 이해하기엔 아직 어리다. 내용보다 그림이나 단어의 어감에 더 관심이 많은 나이이다. 혹부리 영감님을 읽어주면 욕심쟁이가 등장하는 장면을 좋아한다. 어감이 재미있는지,
‘욕심쟁이? 엄마! 욕심쟁이야? 욕심쟁이?’
하면서 어눌한 발음으로 몇 번이고 따라 한다.
참고로, 서점에서 잠깐 훑어본 일본판 혹부리 영감님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한 마을에 혹부리 영감님이 둘 있는 것까지는 같은데, 누가 착하고 누가 나쁘다는 지칭은 없었다. 한 영감님은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흥부자인 반면, 다른 영감님은 춤과 노래에는 영 취미가 없다. 흥부자 영감님이 산에 갔다가 도깨비들을 만나게 되었고 같이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다가 헤어진다. 아쉬운 도깨비들은 내일 꼭 다시 오라며, 약속의 징표로 영감님의 혹을 떼어간다. 혹이 영감님의 소중한 것인 줄 알고 혹을 떼어가면 다시 찾으러 오리라 생각한 것이다. 물론 혹을 뗀 영감님은 다시 가지 않았다.
흥 없는 영감님도 혹을 떼고 싶은 마음에 산으로 간다. 노래와 춤에는 영 자신이 없어 쭈뼛쭈뼛하다가 용기를 내어 도깨비들 앞에 나서 보지만, 도깨비들의 반응이 좋지 않다. 소중한 혹 다시 돌려줄 테니 가라고 한다.
그렇게 혹이 두 개가 되어 우울하게 돌아온 영감님을 보고, 흥부자 영감님은 미안한 마음이 든다. 본인의 특기를 살려 마을에 잔치를 벌이고 신나게 노래하고 춤을 춘다. 그 모습을 본 쌍 혹부리 영감님은 왠지 모르게 흥이 돋아 같이 춤을 춘다. 몇십 년 만에 격하게 춤을 춘 탓인지 혹이 너무 심하게 흔들려 그만 뚝 떨어지고 만다.
잉? 이 무슨 황당한 결말인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쨌거나 두 영감님 모두 혹을 떼고 해피한 결말을 맞았다.
좀 나이가 있는 일본인 지인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착한 혹부리 영감님하고 나쁜 혹부리 영감님 나오는 이야기 아니야?’하고 되물었다. 아마도 예전에는 한국판과 크게 다르지 않은 스토리였던 것을 최근에 새로 각색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억지스러운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빼고 둘 다 해피해지는 결말로. 나도 정확히 확인해 본 게 아니라 추측에 불과하다.
어쨌거나, 일본판 혹부리 영감님을 읽고 참 일본스러운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지양하는, 아니 그보다 기피한다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할 것 같다.
얼핏 바람직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게 좀 답답할 때가 있다. 사실 관계를 명확하게 가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보다, 가치판단을 유보하려는 태도, 쉽게 말해, 누구의 편도 들지 않겠다는 태도다.
일본인들을 대할 때면 이런 식의 태도가 몸에 배어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을 때 어느 쪽이 좋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을 별로 만나보지 못했다. 그저 두 가지 모두 장단점이 있다고, 어느 쪽도 괜찮다는 식이다. 결국 선택은 네 몫이니, 너의 판단에 나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게 편할 때도 있고 답답할 때도 있다. 일종의 선긋기처럼 느껴져 외롭고 서운한 감정이 들 때도 있다. 살다 보면 혼자 결정하기 힘든 문제들에 직면하기도 하니까. 그럴 때 내 일처럼 같이 고민해주고 때로는 이게 맞다고 강하게 이끌어주는 따뜻한 손 길이 그립기도 하다.
쓰다 보니 이야기가 너무 샛길로 센 것 같다. 아무튼, 언젠가 아이들이 커서 전래동화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그때가 되면 착하지 않은 혹부리 영감님에 대해 같이 토론해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