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불완전함과 우울
조지 슈타이너의 '왜 생각은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가'를 읽으며
조지 슈타이너 '생각은 왜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가' 첫챕터를 읽었다. 간단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챕터는 서문을 읽으면서 의문이었던 부분을 해소해주었다. 내 질문은 "왜 생각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는 걸까"였고, 그에 대한 답이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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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서문에서 우리는 살아있는 한 늘 생각을 해야하고, 생각을 멈추는 상태, 생각 넘어를 생각하는 상태란 불가능함을 이야기했다. 첫 챕터에서도 그러한 전제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 안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긴 하지만, 그러한 생각의 경계 안에서라면 어떤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무한한 우주를 만들어내고, 가능한 모든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기도 하다. 인간과 90프로의 유전자를 공유하는 영장류라고 해도 인간처럼 생각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을 자연의 지배자로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인간은 심지어 스스로를 통제하는 자유를 갖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 인간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피할 수 없는 슬픔, 우울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생각은 무한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무한함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실제의 현실에서는 어떠한지를 알 수 없다. 우리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하찮은지를 알 수 없다. 그러면서 우리는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우주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우리의 삶에는 의미와 목표가 있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인간이 문화와 학문, 예술, 종교를 만들게된 동력이 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생각처럼 인간은 오직 그가 답할 수 있는 질문만을 한다.
이러한 내적 모순(아포리아), 필연적인 불분명함은 모든 생각행위와 개념정의, 직관안에 존재한다. 생각의 소용돌이에 귀를 기울여보라, 회의와 절망이 느껴질 것이다. 이것이 그 우울에 대한 첫번째 근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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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번역은 아니고 대략 간추린 내용임을 밝힌다.
첫챕터를 읽으니 좀 이해가 되기는 한다. 인간이 왜 우울할수밖에 없는지를 말이다. 30대 초반에 결혼하기 전에는 생각을 하다보면, 어떻게 살아가야하나부터 시작해서 늘 답이 없는 상태에 닿게 되고, 그로인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그러다보면 결국 생각의 결론은 삶의 마감에 도달하게 되었다. 책에서 말한 이유와는 좀 다르다. 나는 내가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을 수 없기에 우울했고, 삶에 회의가 밀려왔었다.
현재 나는 내가 하나의 삶이라는, 동물과 다름 없는 하나의 생명이라는 데 초점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 즉, 하나의 생명으로서 생명의 존재 이유이자 기본 의무인 자식을 낳고 기르는 것에 집중해서 살아가는 중이다. 내게 부여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하는데 내 삶을 소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인간으로서 뭔가 대단한 것을 이루지 않더라도 내 존재는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는 것이니 말이다.
아이들이 좀 더 크고 더 이상 일상에서 사소한 아이들의 돌봄에 내 시간에 매여있지 않을때, 다시금 그 질문이 시작될 것이긴 하다. 나는 인간으로서 남은 생 동안 무엇을 이룰 것인가. 벌써부터 그 질문은 나를 두렵게 한다. 수백 수천의 가능성 가운데 나는 '어떤 것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나의 남편과 같은 사람은 '닥치는 것'을 그냥 하라고 이야기한다. 내 시간을 들인 대가로 돈을 번다는 점에서 각각의 것들은 차이가 없을 런지 모르겠다. 나라는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개개의 선택은 서로 다른 삶이라 할만큼의 차이가 있다. '내게 맞는' 선택을 하고자 하는 것에서 고민이 시작된다. 선택지가 너무 많다는 것이 선택을 어렵게 한다. 나는 더 생각해야하는가, 덜 생각해야하는가. 이 지점에서 조지 슈타이너가 말한 생각의 불완점함과 연결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George Steiner 'Warum Denken traurig mac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