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그렇게 다 깎아야만 속이 후련했냐!
세상 별로 무서울 거 없는 내게도 요즘 두려운 것이 생겼다.
“좀 깎아줘요.”
한글을 사랑하고 세종대왕님을 존경하지만 어쩐지 저 글자들은 생김새부터 마음에 안 든다. 아무리 봐도 영 정이 안 가는 모양새. 가게를 열고 난 뒤 거진 옷을 사가는 모든 손님에게 들은 문장이라 익숙해져야 할 것만 같은 생각에 담담하게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지만, 그러던 중 울화가 치밀어 이렇게 글을 쓴다는 핑계로 고자질을 하려 한다. 이 투정을 귀엽게 받아줄 사람들이 읽어준다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아, 물론 밑밥부터 깔자면 단지 '일부' 무례한 손님들에 대한 투정이다!
-억울함의 발단
인터넷 쇼핑몰과 오프라인 매장을 동시에 운영하고 있지만 아니러니 하게도 나는 인터넷 쇼핑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다. 다른 건 몰라도 특히 옷은 직접 만져보고, 입어보고 사는 걸 좋아하고 옷이 가득한 공간 이곳저곳을 휘저어 다니며 그 공간을 만끽하는 것 자체가 좋은, 쇼핑을 사랑하는 쇼퍼이기에 인터넷 화면만 들여다보며 옷을 사는 건 내 쇼핑 스타일과는 잘 맞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인터넷 쇼핑몰을 보더라도 구매로 이어지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다. 그럼 내 옷장에 더 이상 옷이 들어갈 공간이 없어 겨우겨우 욱여넣은 그 많은 옷들은 거진 오프라인 가게에서 샀다는 것인데, 내가 처음으로 억울한 건 바로 이 부분. 나는 그 많은 가게들 어디에서도 대체로 깎아달라는 말을 한 적이 없는 손님이었다는 것! 물론 내 가게 같은 성격의 동네 옷가게보다는 백화점이나 SPA 브랜드 위주에서의 쇼핑이었으니 그랬겠지 할 수 있지만, 때때로 들렀던 빈티지샵이나 보세 옷가게에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충분히 흥정을 해볼 만한 분위기여도 나는 깎아달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내뱉는 부류의 손님이 아니었다.
옷가게 주인이 된 이제와서야 하는 말이 아니라 내 나름 일종의 매너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파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다소 오버스러울 수도 있는 생각을 하던 손님이었던 것. 사는 사람 입장에서야 어렵지 않게 그냥 한 번 뱉어보는 말이지만, 엄청난 이윤을 남겨먹는 장사꾼 취급하는 것 마냥 무조건 깎아달라고 말하는 게 어쩌면 조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더랬다.-어렸을 때부터 '이기적이지 말 것'을 강조한 아빠의 말이 무의식 속 어딘가에 깊게 자리했나 보다.- 하여 '난 내 평생 깎아달라는 떼는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습니다!'라고는 못하지만, 웬만하면 제 값을 지불하고 구매를 하는 편이거나 세일 제품을 골라 사는 편이었으니 장사를 하게 된 입장에서 매 번 거르지 않고 듣는 깎아달라는 말이 사실 불편하고 조금 억울할 때가 많다. 나는 그러지 않았는데 왜 나만 빼고 모든 사람은 이렇게 쉽게 흥정을 하려 드는 거지?라는 생각에 장사 초반에는 거의 열이 받는 수준이었다. 터무니없이 깎아 들려는 손님들에겐 '안 팔고 말지'라는 극단적이고 초보 사장 티 팍팍 나는 생각을 한적도 많다. 그렇다고 깎아달라고 딱 한 마디 한 손님들을 붙잡고 '제가 이거 어떻게 수입하는지 아세요? 이거 한 벌 팔면 얼마 남는지 아시냐고요' 구구절절 설교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과거형인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여전히 진행형이다.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할 땐 깎아달라고 하지 않으면서, 식당에서 밥 값을 깎아달라고 하는 게 비일반적이라는 건 알면서 왜 유독 옷 가게에서는 당연히 깎아달라고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장사하는 사람들 모두 이윤을 남기기 위해 적정한 가격을 책정하고, 소비자와 판매자의 거래 시에는 그 가격에 대한 무언의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여길 수 있는 건 카페나 식당이나 옷가게나 매한가진데 말이다. 거기다 백화점이 아닌, 대형 몰이 아닌 동네의 작은 가게이니 더 쉽게 여기는 그 나쁜 행태는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거진 30년을 장사만 하며 살아온 큰아빠의 조언에 따라, 매 번 플러스 마이너스를 따져가며 팍팍하게 굴지 말 것, 때로는 손해가 나더라도 현명하게 장사할 줄 알 것 등 머릿속으로 되뇌어보지만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대차게 매몰차지는 못한 터라 깎아달라는 한 마디에 '그래, 이 분은 멀리에서 오셨으니까, 이 분은 동네분이니까, 이 분은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아 보이는 아기 엄마니까, 이 분은 친구의 지인이니까' 등등의 이유로 거절하지 못하고 늘 깎아주는 실상이라니. 가게를 열고 제 값을 받은 옷은 그나마도 손에 꼽는다. 동네 옷가게이니 많이 깎아줘야 한다는, 나로서는 그다지 큰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우기기식의 이유로 가끔 말도 안 되게 깎으려 드는 아주머니들을 이기지 못해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판매를 하는 날이면, 겉으로는 어렵게 단 돈 얼마 할인해 준 가게 주인일 뿐이지만, 실상은 내어드린 내 기와 기분도 얼만큼씩은 할인해준 셈이다. 그들은 더 좋은 가격에 옷을 얻었을지 모르겠지만 난 내 이윤도, 기운도, 기분도, 그리고 내 옷까지 전부 내어드렸다.
젠장.
난 땅 파서 장사하나요?
-악순환을 막아라
옷에 가격 택을 찍기 전 한번 더 고심한다. 엑셀 파일에 커미션 수식을 넣어보고는 다시 한번 고심한다. 내가 이 가격을 찍어봤자 난 이 가격을 받지 못할 게 뻔하니 커미션 퍼센티지를 조금 더 올린다. 결국 내 엑셀 파일에는 에누리 가능한 범위를 계산하는 행 하나가 추가되었다. 그러다 문득 이게 뭔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럼 결국 택에 적힌 가격을 주고 사는 사람은 바보란 말이야? 파는 사람이 이미 이 정도까지는 할인해 줄 의향이 있는데, 가격은 그것보다 높게 달아놓고 깎아달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에겐 결국 더 비싸게 팔겠다는 거 아닌가? 유레카! 그래서 사람들은 옷 가게에서 무조건 깎아달라고 말하게 된 건가 봐!
...
그렇게 여태껏 흥정하지 않고 제 값에 옷을 샀던 나만 바보 같은 손님이었다는 걸 깨닫게 됐다는 슬픈 결말.
로! 글을 마무리 짓기엔 너무 억울하다. 이 악순환을 고작 나 따위가 선순환으로 바꿀 수 없다는 건 너무 당연하지만 뭔가 더 적극적으로 투정이라도 부려야겠다. 이 악순환이 계속된다면 난 점점 더 퀄리티 낮은 싼 가격의 옷을 찾게 될 거고, 질은 낮아질 것이며 나만의 색깔도 퇴색하겠지. 좋은 옷들의 주인을 찾아주겠다는 나의 초심은 온데간데없이 오로지 이 한 벌 팔면 얼마를 깎아줘도 이 정도가 남겠구나 커미션이나 계산하고 있겠지. 그럼 내가 그토록 기피하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엉망진창 장사'만'하는 가게가 되어있겠지...?
이 시점에서 옷을 파는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가 관건. 어딘가 묻혀 있는 예쁜 옷들을 더 많이 들여오고, 모든 옷들의 제 주인을 찾아주는 이 즐거운 일을 오래도록 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난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돈을 벌어야 한다. 이렇게 장사하다가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가게 문을 닫는 날이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고작 열 평 남짓의 공간에서 많지 않은 수량의 옷을 판매하고 있지만 훗날 좀 더 넓은 공간에서 더 다양한 옷을 판매도 하고 대여도 하며 공간을 꾸리고 싶은 포부를 지닌 나는 가게 운영을 젊은 날의 추억 정도로 끝내고 싶지 않다.
결심했다. 난 '동네 옷가게 사장님의 미덕'에 대한 고객의 기대감과 현실적인 운영 손익의 중간점을 찾아 생색도 내고 장사도 이어가겠다. 나의 이런저런 억울함을 이유로 사람들의 흥정에 날이 선 채 예민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을 생각이다. 사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뚜렷하게 없어 한 발짝 물러나는 것도 있고, 여전히 고민이 되는 부분이긴 하다. 매 번 제 값을 받지 않고 손해 보는 장사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갑자기 정찰제를 시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부터 차근차근 해봐야겠단 결론에 도달! 깎지 않아도 될 만큼의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내 사입 방식에서의 지출을 줄여볼 생각이다. 터무늬 없는 가격으로 판매하는 건 퀄리티 좋은 내 옷들에 자부심을 가진 내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니, 무작정 깎아 들려는 손님들에게는 그럴 거면 사지 말라는 식의 불친절함보다는 그 옷의 질에 대해, 그 옷이 가지는 가치에 대해 더 설명하는 친절한 사장님이 돼볼까 한다. 동네 가게를 찾는 사람들의 기대감에 부응할 수 있는 약간의 친근함과 관심을 보이는 노력도 해보겠다. 부담스럽지 않고 성가시지 않되 이 작은 공간에서의 쇼핑이 편안한 경험으로 기억되는 데에 내가 일조하려 한다. 또 옷이 필요할 때, 가벼운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생각나는 샵이 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잡아 이 모든 것의 사소한 시작점을 하나하나 더 많이 찾아보려 한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아직 성숙하지 않은 내가 좀 더 성숙해지려 하는 노력만큼 소비자들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손님이 왕이라는 식의 대한민국 서비스 문화는 이미 퇴화한 지 오래. 시대가 변하는 만큼 우리네 의식도 향상하여 서로 간에 무례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곳곳 어디에 있는 나 같은 누군가들의 작은 노력들이 큰 변화가 되기를 꿈꾸며,
오늘도 '동네 옷가게 사장 언니' 마인드 장착.
어서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