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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테머 Nov 24. 2019

결국 무기계약직

내 열심만으로 되지 않는 일들. 사업에 손대다.

 매일같이 구직 사이트를 드나들던 취준생 시절, 사이트에 들어가자마자 내가 하는 일은 조건 검색창을 열어 '정규직' 란에 체크를 하는 것이었다. 매 년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전전긍긍해야 하는 계약직은 불안해서 싫다는 이유였다. 그때는 정규직이면 만사 오케이, 고용 불안에서 해소되는 줄로만 알았으니까.


그리고 그게 거만한 생각이었다는 건 오래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열심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


 꽤 어린 나이부터 패션 잡지를 즐겨봤다. 당시 내 능력으로는 살 수 없는 값비싼 명품들로 잔뜩 채워진 페이지들을 보고 있자면 어쩐지 열심히 일 할 동기부여가 되는 것도 같았다. "그런 영양가 없는 거 백날 들여다본다 한들 헛바람만 들고 허영심만 늘 뿐이야, 그거 볼 시간에 책이나 한 자 더 봐"라는 말을 종종 들어왔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매년 잡지 정기구독을 갱신했다. 그게 기특했던 걸까? 그 잡지의 SNS 페이지에 '패션 어시스턴트 모집'이라는 글이 올라온 타이밍에 마침 핸드폰을 쥐고 있던 운 좋은 나는, 그렇게 늘 보던 잡지의 진짜 세계로 들어갔다. 면접 하루 전 날 부어라 마셔라, 내일은 없는 것처럼 놀았던 터라 일어나자마자 순대국밥이 간절하던 그때, 그냥 해장이나 하자던 친구들의 유혹을 떨쳐낸 게 얼마나 다행인지.-새삼 참 대단한 친구들이다. 면접 가는 친구를 붙잡고 그냥 밥이나 먹자니. 한참 나중에 선배에게 들은 비하인드 스토리로는 면접 당일, 묻는 질문마다 다른 지원자들처럼 가식 떨지 않고 빠릿빠릿하게 대답하는 모습이 솔직해 보여 좋았다고 하더라. 난 밖에서 순대국밥을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던 친구들 때문에 마음이 급해서 그랬던 건데. 인생 참 모를 일이다.-


그렇게 패션 에디터의 꿈을 안고 입사한 나는 어시스턴트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했다. 입사 당시부터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잡지사의 어시스턴트 생활은 말 그대로 기약 없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내가 채용된 형태는 잡지사의 공채와는 전혀 무관했을뿐더러 인쇄 매체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마당에 공채 기회가 쉽게 올리 만무. 에디터가 되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쉽게 보고 달려든 건 아니었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렵고 가혹했더랬다.


엎친데 덮친 격 그즈음 엄마가 암 선고를 받았다. 서울 패션위크 취재 준비로 한창 열을 올리던 날, 바빠 죽겠는데 울리는 전화벨에 신경질 섞인 목소리로 "왜"라고 전화를 받던 못된 딸에게 당신이 내일 입원을 한다며 뒤늦게야 그 사실을 알려온 것이다. 머리가 새하얗다는 말, 들어만 봤지 겪어본 건 당시가 처음. 믿기지 않아 멍했던 스튜디오 거울 속 내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넋이 나간 채로 선배에게 지금 엄마에게 좀 가봐야 할 것 같다며 스튜디오를 뛰쳐나와 병원으로 가던 그 길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얼마나 울었는지.


아픈 엄마에게 딸 노릇을 해야 했던 나는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회사를 나와야 했다.



-회사의 운명이 곧 나의 운명.


 모 대학 앞 대형 쇼핑몰의 세 개 층을 통틀어 사용하는 대규모 복합 라운지. 각 층마다 약 백 평의 크기를 자랑하는 유일한 대규모 복합 라운지인 데다 자금력이 비교적 탄탄한 기업의 첫 F&B 사업이었다. 럭셔리함을 앞세운 카페와 레스토랑, 세미나실과 소규모 대관 홀이 갖춰진 이 복합 문화 공간에 입사하게 되었을 때, 이곳이 비로소 나의 마지막 직장이 되겠구나 싶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예감 역시 완벽하게 땡!


나는 서류상 이 기업의 영업팀 컨시어지 부서 소속 사원으로 입사했고, 사실상 컨시어지와 바리스타 업무를 겸했다. 엄연히 따지자면 '바리스타'직으로 지원했지만, 대관 업무를 겸하는 부서도 잘 맞을 것 같다는 차장님의 판단하에 컨시어지팀으로 배치되었고 이는 나로서도 만족스러운 배치였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음은 물론, 다른 일도 배울 수 있는 데다 다른 팀보다 할 일이 두 배쯤 많을 테니 에너제틱한 내게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회사 생활이었다. 하고 싶은 일도 하며, 새로운 일을 배우는 재미까지 있는 데다 나름 잘 맞는 또래의 동료들도 많았으니. 입사할 당시 이 곳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고, 노련함을 갖추었을 때 즈음 독립하겠다는 나의 바람이 아무 장애물 없이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평화롭던 어느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기 전까지만.


덩치 좋은 건장한 남자들이 매장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니며 종이를 붙이던 그 날, 알게 모르게 조성된 공포 분위기에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내용인즉슨 해당 건물의 관리비를 몇 달치 내지 않았으니 기한 내 미납금을 내지 않으면 단수와 단전을 감행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지금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만큼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내막이 있었던 것. 본사에서는 이미 관리비를 지불하고 있었지만, 건물 관리단과 건물 주인이 따로 있었던 이중계약 건물이라나 뭐라나. 결국 회사는 고래 싸움에 낀 새우 격이었다.

매장에는 손님보다 반대 측 용역과 우리 회사 측 용역이 더 많은 일촉즉발의 나날이 계속되었고, 험악한 분위기에 손님은 끊겼으며, 진전 없이 시간만 흐르던 와중에 서서히 전기가 끊기고, 물이 끊기고, 그렇게 문을 닫았다. 우리 회사가 소송에서 질 확률은 1%라고 했지만, 우리는 그 1%의 확률로 소송에서 졌고, 그 많은 직원들은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었다.


문을 닫기 직전까지도 소송에서 이길 수 있다는 희망찬 회사의 입장 덕에 40명 남짓의 직원들은 땡볕 더위에도 출근해 빈 매장을 지켰더랬다. 이 위기만 지나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으니 버텨보자며 메뉴도 리뉴얼하고 회의도 여러 번 했지만 하염없이 흐른 그 삼 개월 동안 우리는 열심히 친목만 다졌다. 월급은 나온다고 하니 다들 선뜻 나가지도 못하고 회식만 열심히 했던 날들. 이제와서야 추억이라며 말하지만, 당시의 불안감은 떠올리고 싶지 않다.




'네 힘만으로, 네 노력만으로 되는 건 없으니 종교를 가져라'는 결론이 나올 것만 같은 흐름이 되어버렸으나 종교를 권할 생각은 아니다.


성인이 된 후 짧은 내 경험을 빗대어 깨달은 바를 말하고 있지만, 결국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 어차피 내 열심만으로 직장과 내 삶의 안정성이 보장되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이제 그걸 핑계 삼아 도망쳤던 것들에 부딪혀보기로 한다. 나의 노력과 성실만으로 안정이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 한 번 주체적으로 일해보는 것도 좋겠다. 그 무거운 책임감을 어깨에 온전히 지고 나아가 보련다. 벌써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흔들리고 있지만 이렇게 비틀비틀 걸어 끝내는 어딘가에 닿으리라는 굳은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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