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포를 좋아한다. 오래도록 한 자리를 지켜온 곳이라 믿음이 간다. 복잡한 근대사로 우리나라에는 오래된 가게가 많지 않은 것이 아쉽다.
'노포'라는 단어는 일본식 한자어이다. 이에 서울시에서는 우리말로 '오래된 가게가 더욱 오래가기를 바란다'는 의미를 담아 '오래가게'라는 표현을 만들었다. 30년 이상 운영되거나 대를 이어온 가게, 또는 무형문화재와 관련된 가게를 발굴하여 '오래가게'로 선정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저자는 서울시의 오래가게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얻어, 전국의오래된 가게들을 방문하여 가게 주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기록했다. 루시드로잉 작가가 섬세한 펜화로 담아낸 가게의 모습일러스트도 페이지마다 함께 담겨 있다. 사진으로는 느끼지 못했을 아날로그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책이다.
또 올게요, 오래가게
'또 올게요. 오래가게' 목차
각 가게 물건을 그린 일러스트로 목차마저 감성적이다.
'또 올게요. 오래가게' 융태행제과점
지역마다 그 음식 혹은 물건이 유명하게 된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있다.
진주비빔밥은 그 유래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첫째,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전투가 있었을 때, 병사들을 위한 간편식으로 고안되었다는 이야기, 둘째, 진주에서 꽃핀 교방문화에서 파생되었다는 이야기, 셋째, 제사를 지낸 후에 남은 음식을 한 그릇에 넣고 비벼 먹었는데 그 맛이 일품이라 제사가 없는 날에도 제사 음식을 장만해 즐긴 헛제삿밥이라는 이야기이다.
1952년부터 충무공의 얼을 기리기 위해 거행되던 추모제를 향토문화예술의 진흥을 도모하는 문화축제로 탈바꿈하자는 논의를 이끌어 1963년 오늘날의 진해군항제로 거듭나게 한 데에도 흑백을 드나든 지역 예술가들의 역할이 컸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유 화백은 제1회 진해군항제부터 10여 년간 축제 포스터를 제작했고, 1980년에는 진해군항제 부위원장을 맡은 만큼 우리가 즐겨 찾는 군항제와 인연이 깊다. ( p190. 진해 '문화공간 흑백')
돈 벌 생각으로만 하면 못 해요.
페이지마다 담긴 노포의 철학이 정말 감동적이다. 긴 시간 한 가지 일을 몰두할 수 있는 장인 정신, 돈만 벌 생각으로는 유지할 수 없다.
이 가게가 SNS 인증 사진을 찍는 곳으로 빠르게 소비되기보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 나누었던 이야기, 그날의 분위기가 오래도록 추억으로 되새겨지길 바란다고 했다. (p73. 인천 '등대경양식')
잘할 수 있는 있는 일을 이렇듯 오랫 지속할 수 있었던 까닭을 생각해 보게 된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그에 앞서 사람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일하는 태도를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남 잘되는 것에 배 아파하지 않고, 나 손해 볼 것 같다고 훼방 놓지 않고, 해코지하는 사람은 스스로 멈출 수 있게 기다려주고, 득이다 실이다 따지지 않고 나눌 수 있는 것을 기꺼이 나눈 시간들이 오늘의 오래된 자전거포를 있게 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p151. 경주 '시민자전차상회')
요즘엔 수영장도 목욕탕과 한 번 받은 물을 순환해서 재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순환하는 과정에서 살균, 여과를 해 깨끗한 수질을 유지한다. 바닷물이 순환하며 자정 능력을 갖는 데서 착안된 방식이다. 다만 만수탕의 '물맛이 좋다'하는 근거는 여느 욕탕과 달리 이미 사용한 온천수를 순환하지 않고 모두 하수로 흘려보내는 방식이라는 데서 짐작해 볼 수 있다. 1966년 개업했을 때의 설비와 운영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요즘엔 만수탕과 같은 방식으로는 영업 허가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p166. 부산 '만수탕')
돈 벌 생각으로만 하면 못 해요. 재미도 없고.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일하셨고요. 일례로 지금은 고무신이고 장화고 합성고무나 PVC로 만들지만 예전엔 생고무로 만들었어요. 생고무로 만든 것은 수선이 가능해요. 닳거나 터지거나 해서 새 신 사러 온 손님을 앉혀놓고 아버지께서는 실로 기워주였어요. 더 신고 오라고.
그래서 한번 기다려보려고요. 이 가게가 정말 백 년 가게가 될 때까지. 그때 두 아이 중에 누구라고 해보겠다고 하면 기꺼이 물려줘야지요. (p181. 충북 영동군 '동양고무')
너도 나도 살 수 있는 것들은 큰 서점에 가면 있지. 그런데 그들이 찾는 책은 여기에 있는 거야. 여기에 와야만 살 수 있는 책들이 있어. 저건 언젠가 임자가 나올 텐데 싶은 책들이 있거든. 그런데 어느 날 누가 와서 그걸 찾아. 얼마나 반가워하는 줄 몰라. 보석을 찾은 것 같이. 그런 거 보면 나도 참 좋아. 그렇게 한 10년 만에 팔리는 책들이 있다고. 그 재미지.
자기 직업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해. 물건 하나하나 자기 자식같이 다뤄야 하고. (p260~261. 용산구 '포린북스토어')
벌교 삼화목공소
태백산맥 출간 이후 벌교를 찾는 관광객이 늘면서 삼화목공소 왕 목수는 소설 속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새시를 떼어내고 옛날 상점처럼 미세기문을 달았다. 이 모습에 감명받은 보성 군수는 주변 가게의 출입구를 목조 미세기로 바꾸는 정비 사업을 추진했다. 나 역시 태백산맥을 읽고 벌교를 방문했고, 소설 속 풍경 그대로의보성여관 주변 거리를 거닐며 사진을 찍었다. 그때 찍은 사진 속 삼화목공소를 찾았다.
삼화목공소. 2019년 벌교.
2019년 벌교
각 지역의 문화와 역사, 노포의 철학, 그리고 아름다운 일러스트가 어우러져 잔잔한 감동을 주는 책이다. 앞으로 여행지에서 오래된 가게를 찾아 그곳만의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