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는 냄새로, 오후에는 소리로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는 곳이 있다. 10시 즈음부터 그곳은 냄새로 '나, 여기 있소!'라며 위치를 알린다. 12시에는 달그락대는 소리로 그곳의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린다. 그곳은 바로 급.식.소. 2교시나 3교시 즈음이 되면 온 학교로 냄새가 퍼진다. 급식소 가까이 위치한 교실에서는 흔하게 일어나는 일,
"우와, 맛있겠다. 오늘은 떡볶이 냄새다. 선생님, 배고파요!"
내 배도 지금 야단법석인데, 교실까지 야단 났다.
올해는 전담교사로 일하고 있다. 그렇기에 올해 나는 매우 우아한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다. 입 안에 음식을 넣고 꼭꼭 씹어 삼키며, 오로지 밥 먹는 행위에만 집중한다. 이렇게 점심시간을 점심시간답게 보내는 게 과연 몇 년만인가? 다음은 지난 해까지 담임을 하는 동안 점심시간을 보낸 절차다. 먼저, 급식을 위해 우리 반 어린이들을 화장실로 보내 손을 씻긴다. 둘째, 줄을 세운다. (20-21년에는 어린이들 체온을 측정하고 기록하는 일도.) 셋째, 급식소로 차분히 줄을 지어 이동한다. 넷째, 급식판을 들고 오는 어린이들 자리를 지정해준다. 다섯째, 밥을 먹는 중에 밥을 다 먹고 찾아오는 어린이들 급식판을 일일이 검사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다 먹은 후에도 먹기 싫어 오래도록 남아있는 어린이들의 급식판을 검사한다. 점심시간에도 일은 계속된다.
담임을 하는 동안 급식 검사를 단 한 번도 놓은 적이 없다. 저경력 교사일 때 어린이들에게 표면적으로 드러낸 급식 검사 이유는 이러하다. 모든 영양소가 골고루 섭취되면 여러분들 건강에 좋다. 이 음식을 만드신 분들의 정성을 생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음식 처리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를 생각하고 우리가 급식을 다 먹어 그 비용을 줄여야 한다. (쓰고 보니 학생들에게 납득될 이유가 단 한 가지도 없는 것 같다. 이런 나의 의견을 꾸역꾸역 따라준 어린이들에게 정말 고맙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이거다. '내가 너희들의 편식 습관을 반드시 고쳐놓고 말겠어!' 따라서 급식 검사도 매우 엄격한 편이었다. 밥부터 반찬까지 다 먹은 식판을 들고 와야만 "통과!"하고 외쳤다. "선생님은 왜 다 안 먹어요?" 하는 말을 듣기 싫었기에 나 또한 급식판을 싹싹 비워야 했고, 내가 다 비울 때까지도 오지 않고 숟가락으로 딴청을 부리는 어린이들 곁으로 가서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도무지 왜 그렇게 생딴전을 부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과 함께.
급식 반찬으로 조개 종류가 나온 어느 점심시간, H 어린이가 끝까지 남았다. 평소에도 편식으로 오래도록 남아있던 어린이라 '너는 어쩜 그리 여전하니?' 싶었다. 옆으로 가 앉았다.
"조개 먹어라."
끝까지 안 먹는 H를 보며 나도 괜한 오기가 생겨 어떻게든 먹이고야 말겠다 싶었다. 조개를 집어 H의 밥숟가락에 얹었다.
"얼른 먹어야지. 세 개는 먹어야 교실에 갈 수 있어."
"저 조개 싫어해요."
"조개가 왜 싫어? 얼마나 맛있는데. 맛있어, 한 번 먹어 봐."
"조개 너무 징그럽게 생겼어요. 집에서도 안 먹어요."
"뭐가 징그럽다 그래? 다 네 선입견이야. 한 번 먹어봐."
다그쳤다. 담임교사가 옆에 와서 자꾸만 먹으라고 재촉하니 결국 한 입 베어 문다. 베어 물자마자 "우웩"하고 바로 뱉어낸다. 남아있던 밥에는 H의 침 섞인 조개와 이전에 꾸역꾸역 넘겼던 것들이 올라왔다. 결국 식판에 남아있던 음식을 다 퇴식구에 버리고 함께 교실로 올라왔다.
올라오는 동안 그제야 생각했다. 나는 과연 어릴 때 모든 음식을 좋아하고 다 잘 먹었나? 아니다. 나는 버섯과 가지를 정말 싫어했다. 버섯은 맛도 없는 게 식감은 고무지우개 같았다. 어머니는 쫄깃하다 하시는데, 나는 그 씹히는 맛이 도무지 좋아지지 않았다. 가지 또한 마찬가지. 보라색 껍질에 연한 연두색 속살, 도무지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한 생김새를 가진 데다 식감은 정말 콧물, 그 자체다. 이런 걸 대체 왜 먹나? 어머니께서 해주시는 버섯, 가지 반찬에는 좀처럼 내 젓가락 열차가 멈춰 선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맛있게 잘 먹는다. (사실 여전히 가지'나물'은 싫다.) 그렇다고 어릴 때 부모님께서 나에게 반드시 이걸 다 먹어야 한다고 강요하셨다면 나는 어땠을까? 오, 그것은 지나친 간섭이오, 끔찍한 정서적 폭력이다.
'당신은 왜 그 음식을 좋아하나요?"
이 질문에 대한 이유는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맛.있.다. 그러나 싫어하는 음식에 관해 물어보면 이유는 꽤나 다양하다. 나처럼 식감 때문에 싫어하는 이도 있고, H처럼 생김새로 인해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음식 특유의 냄새로 싫어하기도 한다. M이라는 지인은 익힌 당근은 맛있게 잘 먹지만, 날것은 먹지 못한다고 한다. 생당근에서 나는 특유의 흙냄새에 적응이 안 된단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알레르기로 인해 먹질 못한다. 이처럼 싫어하는 이유는 매우 다양하고 굉장히 구체적이다. 무척이나 분명한 불호의 이유를 가진 어린이들에게 이렇듯 계속 급식 검사를 해도 되는가 의문이 들었다.
'야, 너도 어렸을 땐 편식쟁이였으면서 왜 어린이들한테는 다 먹으라고 강요해? 그리고 너 다 안 먹는 선생님한테는 옆에 가 앉아서 다 드셔야 합니다 얘기하니?'
이 일을 겪은 후로 나의 급식 검사는 '각자의 음식 취향을 존중하되 지도는 하자'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나의 경우에 버섯을 너무나 끔찍할 정도로 싫어했지만 부모님의 권유로 몇 번 시도해보았고, 시간이 흘러 이제는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고무를 질겅질겅 씹는 것 같다는 느낌도 익숙해져서 이제 아무렇지 않다. 가지도 정말 싫어했지만 다른 방법으로 조리된 것을 먹어보니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럼 학생들에게도 '하나 정도' 먹어보도록 하는 건 어떨까? "요거 젓가락도 안 댔네. 그럼 딱 하나만 먹고 올까?" 요청하면 뒤에 오는 반응이 제각각이다. 대부분이 딱 하나만 먹고 온다. 너무 싫지만 선생님의 부탁이니까 마지못해 먹고 오는 것. 고마웠다. 이런 반응도 있다. "선생님, 진짜 맛있어요. 저는 처음 보는 거고 이상하게 생겨서 맛이 없을 줄 알았는데, 먹어보니까 맛있었어요. 또 먹고 싶어요." 이런 어린이들은 생경한 음식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다. '한 번 먹어보기'를 도전하면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게 된 것 같아 이 또한 고마웠다. 확실하게 의사를 표현하는 어린이도 있다. "이렇게 양념된 고기는 안 먹어요." "교회에서 이거랑 저거랑은 먹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 어린이는 그런 어린이대로 고맙다. 불호의 새로운 요인을 알게 되었으니까.
어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호불호가 생기는 취향의 문제다. 그리고 시간의 문제다. 불호가 더 강해질 수도 있고, 불호가 호로 변화될 수도 있고, 호가 불호로 바뀔 수도 있다. 그동안 나는 지금 당장의 효과를 바라며 급식 지도를 했구나. 그렇다면 난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정서적 폭력(아니, 토를 한 어린이까지 생각하면 신체적 폭력까지 포함되려나?)을 행사했던 것은 아닌가, 무척이나 반성되는 요즘이다.
미시적인 것에서 거시적인 것을 바라보는 안목을 지닐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급식과 관련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다음으로 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