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diculous!
어릴 적부터 나는 높은 곳에서 떨어질 것만 같은 꿈을 참 많이도 꿨다. 한 번은 누군가에게 쫓기다 높은 담벼락 위에 섰는데 뛰어내릴까 말까를 고민하는 꿈, 사방을 둘러싼 벽 없이 바닥만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상하좌우를 매우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꿈. 절대로 떨어지진 않는다. 떨어진다면 다치거나 아프거나 고통을 느끼는 것으로 끝이 날 텐데, 도무지 떨어지질 않으니 떨어질지도 모르는 공포에만 시달리다 잠을 깬다. 그리고 그 공포는 후에도 비슷한 류의 꿈을 꾸며 계속된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는 것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이 때문인지 나는 스스로를 고소공포증을 가진 자로 규정하며 살았다. 놀이공원에 가서도 무서운 놀이기구 같은 것은 엄두도 못 냈다. 내 최애는 에버랜드 피터팬. 이 놀이기구는 하늘 위로 뜨지 않고 레일 위를 오르락내리락 빠른 속도로 달린다. 그나마 용기를 내어 탄 것이 매직 스윙, 미니 바이킹이다. 그러나 그 놀이기구를 탈 때에도 절대 뒷자리에 앉지 않는다. 절대 손을 들지 않는다. 손잡이를 꼬옥 잡고 비명만 질러댄다.
어느 날 <정글의 법칙>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되었다. 김병만이 스카이 다이빙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자격증을 딴 그는 홀로 경비행기에서 뛰어내려 하늘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다. 공기를 매트리스 삼아 하늘 위에 드러누워 있는 그의 모습이 무척이나 자유로워 보였다. 아, 나도 저렇게 하늘을 내 것 삼아 누려보고 싶다 생각했다. 내가 과연 뛰어내릴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언젠가 한 번은 뛰어내리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혼재했다.
그리고 나는 어느 여름, 호주 케언즈 하늘 위 경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고소공포증 환자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거기까지 오는 과정은 매우 수월했다. 여행사에 들러 스카이 다이빙을 하고 싶다 얘기하고, 비용을 지불하고, 픽업 지점을 알려줬다. 당일 아침 픽업 버스가 나를 데리러 와 경비행기를 탈 곳으로 이동한 후 서약서에 서명하고, 동영상을 보고 몇몇 자세를 익히고, 나를 책임질 전문가를 만나 인사하고, 경비행기에 타고, 그리고 하늘 위로 올랐다.
사실 나는 케언즈에 오기 전 고소공포증을 어느 정도 이기고 난 후 스카이다이빙에 도전하겠다는 마음으로 시드니 타워에서 스카이 워킹을 체험했다. 그러나 발바닥이 바닥에 붙어 내가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는 스카이 워킹과 허공에 발바닥을 둘 곳 없어 나부끼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이미 하늘 위 비행기 안인데, 여기에서 떨어지는 것 말고는 땅에 내 발을 둘 방법이 없는데, 대체 나는 무슨 생각으로 이것을 하겠다 한 건가 나의 무모한 선택과 결정을 원망하고 후회했다. 엄청난 긴장으로 얼굴이 절로 굳어졌다.
그러던 중 제일 먼저 뛰어내기로 한 여성이 울며 불며 안 하겠다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그녀는 안전을 책임질 전문가뿐만 아니라 공중에서의 그녀의 모습을 담아줄 두 명의 카메라맨을 더 고용한 상황이었다. 그런 그녀가 얼굴이 일그러져 눈물범벅이 된 상태로 "Crazy! I can't, I can't!" 외치며 발버둥을 치는 게 아닌가. 순간 그 장면이 정말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두 명의 카메라맨을 고용한 사람이 이제 와서 못 뛰어내리겠다고 발버둥을 치다니, 저렇게까지 할 일인가?' 한편으로는 그녀의 두려움이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엄청난 기대를 갖고 무려 세 대의 카메라로 본인을 담으려고 했다는 사실이 참 모순적이다 느낀 것이다. 결국 그녀는 잠시 뒤로 빠지고 다른 사람이 먼저 뛰어내렸다. 그가 안전히 뛰어내린 것을 확인한 후에야 드디어 그녀가 용기를 내 다음 순서로 뛰었다. 그리고 나는 그다음.
아마 내가 처음이었다면 나도 그녀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지 모른다. 혹은 그저 두려움을 꾹 참고 뛰어내렸을지도 모른다. 낙하 자체를 전혀 즐기지 못하는 채로. 그러나 그런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보고 난 후라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뛰어내리는 것이 전혀 아무렇지 않다 느꼈다. 그리고 그 과정 자체를 온전히 즐겼다. 코로 쏟아져 들어오는 엄청난 공기의 양에 아찔함도 느꼈고, 마침 굉장히 흐린 날이어서 구름 속으로 들어가 온몸으로 구름 샤워를 하는 상쾌함도 느꼈고, 펼쳐진 낙하산으로 하늘하늘 내려오며 초록으로 꽉 찬 들판을 바라보는 여유도 가졌고. 마치 호그와트 교실에서 무서워하는 대상으로 변했던 보가트를 처치하기 위해 'ridiculous!'하고 마법 지팡이를 흔들자 우스꽝스럽게 변한 보가트를 보고 깔깔깔 웃었던 꼬마 마법사가 된 것 같았다. 그녀의 호들갑 덕분에 오히려 편하게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쓰고 나니 누군지 모를 그녀에게 미안하다. 그대가 가진 두려움, 나도 갖고 있었으나 그대의 호들갑에 공감에서 의아함으로 변하는 건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이것이 내가 고소공포증을 치유한 과정이다. 이후로 나는 스카이 워킹 체험도, 높은 다리도, 유리 바닥에 서는 것도 전혀 무섭지 않다. 이미 나는 그것이 우습게 느껴지는 과정을 거쳤기에 이제는 높은 곳에 발 붙이고 서는 것은 별로 무섭지 않다. 공중에 발을 띄워야 하는 상황은 여전히 겁이 난다. 그럼에도 막상 도전하고 나면 adrenaline-seeker라는 소리를 듣게 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