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당시 나는 영국에 있었다. 기숙사 내 옆방에는 Y이라고 중국에서 온 20대 동생이 있었다. Y는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친구였다. 역사에도, 정치에도, 종교에도. 하나님을 믿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하나님이 진짜 계시다면, 정말 몇 개월밖에 안 되는 아이가 병에 걸려 죽는 이유는 뭐야?"와 같은 질문. 궁금한 것은 스스럼없이 던지던 친구였다.
어느 날이었다. Y가 말했다. 중국인들의 전용 채팅 앱 Wechat에서 시진핑이나 중국 정치체제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하면 그 발언은 물론이고 계정도 삭제되는데, 자기 친구 중 한 명이 그런 일을 당했다고. 당시 나는 2016년 촛불 혁명으로 박근혜를 탄핵시키고 2017년 선거를 통해 문재인 대통령을 세운 일에 대해 소위 국뽕이 가득 차 있던 상태였다.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도자를 국민들이 평화적인 힘으로 퇴출 시킬 수 있는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강한 확신에 차 있던 상태였다. 민주주의 제도는 잘못된 정치인에게서 힘을 빼앗을 수 있고, 중국과는 달리 정치적인 발언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에 Y가 묻는다.
"그런데 말이야, 국민들이 무조건 능력 있는 사람을 대표로 뽑는 건 아니잖아? 네 말대로 Mr. 문 이전처럼 무능력한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럼 그런 불확실한 상황보다는 차라리 중국 같은 체제가 낫지 않나? 미리 후계자를 정하고, 그(녀)가 정무 감각을 익히도록 단단히 교육하고. 비록 정부를 향해 공개적인 비난을 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나라를 엉망으로 운영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있으니까."
그 이야기에 말했다. 우리는 이미 그런 지도자를 겪어 봤으니 다시는 이전과 같은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으리라고.
그런데 지금 정치 상황을 보니, 과연 민주주의는 정답일까? 의문이 든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누구나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다. 법에서 정하는 대통령 후보 요건은 다음과 같다. 5년 이상 대한민국에서 산 사람들 중 만 40세 이상이 되는 사람. 이 조건만 만족하면 누구나 대통령 후보로 나설 수 있다(단, 금치산자-분열증 환자, 정신질환자와 같이 자기 재산을 제대로 관리하고 처분할 능력이 없다고 간주되는 사람-와 법원의 판결로 선거권, 피선거권을 잃은 사람은 제외). 자격 요건 어디에도 국정 운영에 필수적인 외교 능력, 정무 감각, 역사 인식 등에 대한 기술은 없다. 이는 아마도 나라를 운영할 대통령을 뽑는 일인데, 국민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 선택하지 않을까 하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외교 능력, 역사 인식 등에 법으로 제한을 건다는 것은 자유를 강조하는 민주주의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3억 원의 기탁금을 내야 대통령 후보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말은 돈만 있다면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다는 거다. 그러니 허경영 같은 사람이 유튜브, 후원 계좌 등을 통해 수익 창출한 돈으로 계속해서 후보에 오르지... 국제 정세를 몰라도, 세금 운영 방식에 대한 지식과 노하우, 국정 운영 비전이 전혀 없어도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후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인기와 든든한 빽(정당이나 언론 등)이 받쳐준다면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된 것처럼.
돈 있고, 만 40세가 넘으면 누구나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는 게 바로 우리나라 민주주의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살아갈 나라의 대표자가 될 사람을 뽑는 일은 철저하게 국민들 손에만 달려 있다. 많은 국민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생존하느라 바쁘다. 정치에 관심이 많아 항상 정치 관련 뉴스를 챙겨보는 사람도 있지만, 정치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먹고살기에만 바쁜 사람도 있다. 바쁘지 않아도 정치에는 하등의 관심도 주지 않는 사람도 물론 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선거권 또한 정치 관심 여부를 가리지 않고 모든 국민에게 각자 한 표씩 준다. 만 18세 이상만 되면.
누구나 국회의원, 시장,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는 체제, 정치에 대한 관심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모두에게 1표씩 주어지는 체제가 바로 민주주의다. Y가 지적했던 것처럼 국민들이 늘 현명한 선택(정말로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사람을 뽑는 일)을 한다는 보장이 없는 체제다. 미국에서도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적이 있고, 지금도 유력한 후보로 물망에 오르고 있지 않은가? 큰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 한, 대통령으로서 너무나 기만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 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나쁜 일을 하는 한, 대통령의 무능함과 사악함에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할 수는 있어도 끌어내릴 수는 없다. 민주주의 체제를 보호하는 제도이면서 한편으로는 무능한 지도자를 만났을 때의 걸림돌이기도 하다.
다시 질문,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정답일까?
정답은 아니다.
그래도 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인지 민주주의를 보완할 수 있는 뭔가가 있었으면 좋겠지, 중국이나 북한과 같은 제도는 싫다. 총리로서 수년간 교육을 받았으니 정치 지도자로서의 역량은 확실하다는 장점은 있겠지만, 내 손으로 뽑은 사람이라는 자부심은 생길 수 없다. 그런 제도에서는 정치에 대한 관심이 전혀 일 것 같지 않다. 어차피 내 손을 벗어난 일인 걸, 뭐. 권력층에서 알아서 후계자를 세우고, 역량을 갖추도록 지도하고, 나라를 운영하는 일을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이라 여길 것 같다. (정치에 관심을 꼭 가져야 하냐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건 나중에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고.)
반면, 민주주의에서 1표는 나에게 막중한 책임감이 주어지는 일이다. 어떤 후보가 정말 나라를 위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그의 과거 행적과 언어 습관을 살펴보게 한다. 이는 결국 나를 위한 공부이기도 하다. 후보들의 행적과 습관을 공부하면서 내 생활을 돌아보게 된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내 말에 신뢰가 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나 또한 잘 살아야 하니까. (후보자의 면면을 보기보다는 그 후보를 지지하는 이의 됨됨이를 보고 결정하는 사람들도 좀 있더라고요.)
민주주의는 결코 정답이 아니다. 모든 국민이 현명한 지도자를 선택한다는 보장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비록 진다 할지라도 내가 원하는 후보에게 한 표를 던질 수 있는 시스템에서 살고 싶다. 그리고 이길 수 있도록 함께 밭을 갈 수 있는 체제에서 살고 싶다. 어차피 세상에 완벽한 시스템이란 없다. 그러니 그것을 보완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는 시스템에서 살고 싶다. 확실한 결과보다는 불확실하더라도 가능성과 희망을 볼 수 있는 시스템에서 살고 싶다.